1960년 2월 28일 오후 대구 수성교 옆 신천에서 열린 민주당 선거유세에 청중들이 몰려 연설을 듣고 있다. 당국의 갖가지 참석 방해에도 학생 등 10만 인파가 모였다. 신천 건너 큰 건물은 남산여고와 신명여중이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1960년 2월 28일 오후 1시 5분, 이대우의 당찬 결의문을 신호탄으로 경북고생 8백여 명이 교문을 뛰쳐나와 도청으로 내달렸습니다. 일요등교 지시에, 끝내 봇물이 터졌습니다. 대구 8개 고교에서 일제히 들고 일어났습니다.
3·15 정·부통령 선거를 꼭 한 달 앞두고 민주당 대선 후보 조병옥(65) 박사의 갑작스런 서거로 현직 대통령이자 자유당 후보 이승만(85) 당선은 따논 당상. 그런데 그의 나이는 85세, 잘못되면 정권이 부통령에 넘어갈 판이었습니다. 민주당 부통령 후보는 현직 부통령인 장면. 자유당은 이기붕 당선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조병옥 박사 국민장(25일) 후 첫 지방유세 장소는 대구. 27일(토) 자유당에 이어 일요일인 28일 민주당 선거연설이 예고되자 25일 당국은 곳곳에 모종의 지시를 하달했습니다. 그것은 일요등교 외 제일모직·대한방직·내외방직 등 대기업은 전원 출근, 2군사령부 예하 전 부대는 체육대회와 노래자랑, 각급 공무원은 줄줄이 출장으로 드러났습니다.(1960년 2월 29일자 매일신문)
속내를 빤히 알면서도 도리 없던 시절. 걸릴 게 없는 학생들은 달랐습니다.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부수는 것이 우리들의 기백…." 결의문 처럼 거침이 없었습니다. 배운 대로, 행동으로 정의를 외쳤습니다. 대구 학생데모는 29일 전국 뉴스를 넘어 AP통신을 타고 지구 한 바퀴를 휙 돌았습니다. 대구를 보고 전국 학생들이 용기를 냈습니다.
장면 후보 대전 유세 날인 8일 대전고생 1천명이 담장을 넘었습니다. 수업은 끝났는데 연설이 안 끝났다고 계속 붙잡아둔 때문이었습니다. 이틀 후, 대전상고·충주고·청주고·청주농고·수원농고생들이 '학원 자유', 자유당의 3인조 공개투표 취소' 등을 외치며 거리로 나왔습니다.
12일엔 부산 동래고, 13일엔 경북 문경고 학생 33명이 '선량한 농민들이여 협잡선거에 속지말자'는 삐라를 뿌리다 잡혀갔습니다. 선거 하루 전 14일엔 포항고, 부산 항도고·부산상고·동래고, 경기도 오산 시골 학생까지 '공명 선거', '학원에 자유'를 외쳤습니다.( 동 신문 3월11일~14일자)
2·28 대구학생의거는 자유당 정권에선 상상할 수 없던 일대 사건. 해방 후 최초 학생민주운동이었습니다. 단 하루였지만 함성은 지구촌을 울렸고, 그날의 기록은 역사의 증인이 됐습니다.
그날 현장을 지킨 매일신문 사진기자 신현국은 1960년 6월 17일 자필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그 당시 우리 기분으론 한 사건도 빼놓지 않고 다 찍어 놓겠다는 것이고, 통쾌감이 절로 났던 것이다…."
그와 함께 배상하, 정재소 기자가 남긴 저 필름과 사진들은 지난해 5월 4·19혁명 기록물과 함께 대구의 두 번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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