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의 선면을 기계적으로 딱 반으로 나눠 경계선 좌우에 각자 그림을 그리고 호를 써넣어 두 사람이 합작했음이 한눈에 드러난 재미있는 구성이 됐다. 오른쪽에 표암(豹菴), 왼쪽에 연객(煙客)으로 호가 있어 강세황과 허필이 각각 그렸음을 알 수 있다. 필치로 보아 네 글자는 강세황이 한꺼번에 쓴 것이다.
표암은 표범 같은 얼룩무늬가 몸에 있어 지은 호이고, 연객은 담배를 좋아한다는 뜻이다. 신체의 특징, 자신의 기호를 그대로 드러내 무겁지도 상투적이지도 않다. 두 분의 소탈한 마음자리를 엿보게 해주는 호다.
'산수'는 주제나 구도, 필치가 비슷해 얼핏 보면 한 사람이 그린 것 같다. 두 그림 모두 높은 산을 배경으로 하면서 담채를 살짝 올려 시각적 청량감을 주었고 근경에 키 큰 나무가 있는 언덕을 배치했다.
허필 쪽에 산의 덩어리 감을 주는 세부 묘사와 잔 붓질이 더 많아 산세가 웅장한 점, 강세황 쪽에 붉은색이 많고 허필 쪽에 푸른색이 많은 것 외엔 화풍에 큰 차이가 없다. 인물은 둘 다 없지만 집은 다르다. 강세황은 강가의 누각을 고급스런 기와집으로 그렸고, 허필은 대숲을 배경으로 아담한 초가집을 그렸다.
강세황과 허필은 마음으로 통하는 '지심우(知心友)'였다. 허필이 나를 알아주는 것이 내가 나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낫다고 강세황이 말할 정도였다. 두 분은 봄꽃이 피거나 가을 단풍철이면 인근의 유명한 산수를 함께 구경 다니며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려 첩으로 만들었고 이를 각자의 호에서 한 글자씩 따 '연표록(煙豹錄)'이라고 했는데 사람들이 부러워하며 감상했다. 강세황의 맏손녀와 허필의 맏손자가 혼인한 사돈이기도 했다.
강세황은 시서화 삼절의 화가일 뿐 아니라 심사정, 강희언, 최북, 한종유, 김응환, 김홍도, 이인문, 신위 등 화가들과 교유하며 화평(畵評)을 많이 남긴 것으로 유명한데, 허필은 명망 있는 비평가인 강세황의 그림을 비평한 것으로 또 유명하다. 허필 스스로 "강세황의 서화첩에 허필의 제평(題評)이 없으면 현인(賢人)이 관(冠)을 쓰지 않은 것 같다"고 자부했다. 한 예로 허필은 강세황의 '매화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 "매화의 암향(暗香)을 그려내는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속기는 벗어났다"라는 엄정한 비평을 써넣기도 했다.
'산수'는 그림 합작이 드물었던 18세기에 그림을 중심에 놓은 두 사람의 동호(同好)의 우정을 보여주는 선면화다. 왜 절반씩 합작으로 그렸을까? 두 분 모두와 친분이 있는 어느 그림 애호가에게 둘의 작품을 한꺼번에 감상하며 부치시라고 그려준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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