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중반에서 16세기 후반에 걸친 센고쿠시대(戰國時代)는 일본 최대의 난세였다. 지역을 분할해 다스리던 다이묘(大名)들의 야망이 충돌하면서 전란이 끊이지 않았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이 모두 다이묘 출신이다.
그런데 이 시대를 평정한 도쿠가와의 세력이 처음부터 강했던 것은 아니다. 토호(土豪) 출신이라고는 해도 이웃 다이묘들에게 인질로 끌려가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을 정도였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라는 말을 증명한 셈이다.
그는 젊은 시절 오다에게 패한 뒤 수치심에 자결하려 했으나 고승의 가르침을 받고 재기했다. 자신의 군기(軍旗)에도 적은 '염리예토 흔구정토'(厭離穢土 欣求淨土)였다. 어지러운 현세를 극락정토로 만들겠다는 웅대한 포부 덕분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우거지상(相)'이란 초상화도 이런 그의 성격을 보여준다. 다케다 신겐에게 대패한 뒤 비참한 모습을 오래 기억하고 반성하기 위해 그리게 했다고 한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역시 창사 이래 최대 적자를 냈던 재작년 이 그림을 내걸고 사과한 바 있다.
지난 일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큰 뜻을 이루기 어렵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이다. 자신의 역량을 인정하고 더욱 분골쇄신(粉骨碎身)하는 것도 대업을 꿈꾸는 이가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다. 인생의 목표를 멀리 높게 둬야 눈앞의 시련들을 견뎌 낼 수 있다.
그러나 총선 공천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온갖 잡음이 나오고 있는 우리 정치권의 정신세계는 완전 딴판이다. 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치욕(袴下之辱)을 언급하며 승복한 이도 있지만, 명분이 없어 보이는데도 뜬금없이 단식에 나서거나 탈당하는 이들이 속출한다.
비명횡사(非命橫死)가 아니라 비명횡사(非明橫死)할 수 있다는 것도 예상 못 한 일이 아니다. 대선 때 내걸었던 불체포특권 포기 공약마저 손바닥 뒤집듯 하는 이들 아닌가. 불공정 여론조사에 따른 후폭풍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제1 야당 내부에서 쏟아진다.
특히 위성정당 재연에 따른 폐해는 앞으로 4년을 벌써부터 짜증 나게 한다. 다시는 안 봐도 될 줄 알았던, 검증되지 않은 금배지들의 요설(妖說)과 탐욕의 난무는 민주주의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 것이다. 역대 최악의 국회는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을까 봐 두렵다.
상식을 뒤엎는 꼼수는 중도·실용을 표방한 제3지대에 대한 기대마저도 버리게 했다. 개혁신당은 위성정당 창당은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위장결혼'에 이어 보조금 먹튀 논란을 자초했다. 보조금자진반납법을 발의한다지만 이미 유권자의 마음은 돌아섰다.
국민의힘 또한 정치 개혁을 이끌기에는 역부족이다. 위성정당이란 기형적 제도를 막지 못한 정치력 부재부터 책임져야 한다. 대선 승리 이후 2년 동안 자중지란에 빠져 민주주의를 바로 세울 기반을 닦지 못한 채 야당의 자책골만 기다리는 모습이 안쓰럽다.
통계청의 '국민 삶의 질 2023' 보고서에 따르면 시민들이 느끼는 '정치적 역량감'은 10년래 최저였다. 유권자들의 정치에 대한 실망이 포기 수준이다. 샤를 드골은 "정치는 너무나 중요해서 정치인에게만 맡겨 둘 수 없다"고 했지만 이제 우리는 누구를 믿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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