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은 민족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일대 사건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운동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한국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으며, 일제의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게 한 운동"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거족적인 운동이 하필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1918~1919년 한반도 북부지역에 닥친 미증유의 가뭄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기근에 시달렸고, 수십 년 만에 강력한 폭풍우가 몰아쳐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 와중에 콜레라가 대유행하여 사망자가 속출했다. 민심이 극도로 흉흉한 와중에 이 태왕(고종)이 1919년 1월 21일 오전 6시, 덕수궁 함녕전에서 전날 밤 식혜를 먹고 갑자기 승하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그런데 조선총독부가 사망 일시를 실제보다 하루 늦은 "1월 22일 오전 6시 30분"으로 발표하면서 불온한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내용인즉 1월 20일 밤 10시께 고종이 나인 김춘형이 올린 식혜를 마신 뒤 새벽부터 경련을 일으키다 사망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김춘형이 1월 23일 죽었는데, 고종독살을 은폐하기 위해 누군가 고의로 그를 살해했다는 내용이었다.
소문을 악화시킨 또 하나 이유는 1월 24일 고종을 염하는 과정에서 시신이 심하게 부패했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이다.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 고종을 염하는 자리에 있었던 민영달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제로 "고종 황제의 팔다리가 엄청나게 부어올라 사람들이 황제의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었고 황제의 입 안에 이가 모두 빠져 있었고 혀가 닳아 없어졌다. 30cm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1920년 10월 13일)라고 기록해 놓았다.
고종의 독살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나가 고종의 인산(장례) 예행연습일인 3월 1일에 대규모 시위가 폭발했고,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1920)에서 고종독살설을 기정사실로 서술해 놓았다.
▶고종독살설 제기한 이태진 교수
이런 소문과 저작을 근거로 이태진 교수는 2009년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하자 고종이 항일전선에 다시 나설 것을 우려한 일제가 독살했다고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했다(이태진, 「고종황제의 독살과 일본 정부 수뇌부」, 『역사학보』 Vol.0 No.204, 역사학회, 2009).
이태진 교수가 독살의 근거로 삼은 것은 당시 일본 궁내성 제실 회계심사국 장관 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의 1919년 10·11월 일기다. 구라토미의 일기(1919년 10월 26일)에는 구라토미가 송병준으로부터 들은 얘기를 전제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총리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어떤 뜻을 전했고, 하세가와는 이 태왕(고종)을 찾아가 이를 전달했다. 이태영이 수락하지 않자 이를 은폐하기 위해 윤덕영·민병석 등을 시켜 독살했다."
이 내용은 송병준에게 들은 내용을 구라토미가 일기에 적은 것이다. 그렇다면 송병준은 무엇을 근거로 이런 말을 일본인에게 전했을까? 그의 증언은 사실일까, 사실이라면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사료는 무엇인가?
박은식을 비롯하여 이태진 교수의 고종독살설을 반박하고 나선 학자는 윤소영(독립기념관)이다. 윤소영 박사의 논문(「한·일 언론 자료를 통한 고종독살설 검토」,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6권,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1; 「고종독살설과 3·1운동」, 『내일을 여는 역사』, 재단법인 내일을여는역사재단, 2019, Vol.74)에 의하면 고종 발병 후 진찰하고 사망 과정에 대한 첫 진술을 남긴 사람은 일본 여의사 도가와 기누코(戶川錦子)다.
▶의사들이 진단한 사인(死因)은 뇌일혈
이 밖에 고종의 촉탁의사 가미오카 가즈유키(神岡一亨), 총독부 의원장 하가 에이지로(芳賀榮次郞) 등이 진단한 고종의 사인은 뇌일혈(뇌내출혈이 일어나 발생하는 뇌혈관 장애)이다.
도가와 기누코의 진술에 의하면 고종은 사망 4~5일 전부터 이상증세를 호소했지만, 자신과 촉탁의사 가미오카는 이를 심각하게 보지 않았다고 한다. 윤소영 박사는 두 사람의 진료 소홀 문제가 제기될 것을 우려하여, 이 사실을 은폐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또 한 가지 일본 측이 우려한 것은 일본 여의사가 고종을 진찰한 사실이었다. 극단적인 유교적 보수성이 팽배한 조선 사회에서 일본인 여의사가 황제의 옥체에 손을 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심각한 반발이 제기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윤 박사는 또 주검에 나타난 현상은 사망 후 시신 부패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사망 직후 바로 염을 하지 못한 상황에서 발생한 시신 부패의 일반적인 과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당시에도 시중에 독살설을 반박하는 내용이 떠돌았다. 특히 황제에게 식혜를 올렸다는 김춘형 관련 소문은 전형적인 가짜 뉴스였다. 김춘형(79)이 1월 23일 죽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는 안동별궁(풍문여고 자리에 있던 왕실 직속 별궁) 근무자였을 뿐, 덕수궁에는 출입한 적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황제에게 독이 든 식혜를 올릴 수 있단 말인가.
병합 후 고종은 총독부로부터 막대한 세비를 받아 안락한 은퇴 생활을 즐겼다. 특히 고종은 덕수궁의 하급 궁녀, 무수리와 동침하여 환갑이 지난 나이에도 불구하고 덕혜옹주·이우·이육 등을 연이어 얻어 이들 재롱에 세월 가는 것을 잊을 정도였다. 게다가 일본 육군 장교가 된 이은 왕세자와 일본 황족 마사코의 결혼을 앞둔 상황이었다.
윤 박사는 퇴위하여 실권 없는 고종을 일제가 암살해야 할 정치적인 이유가 발견되지 않으며, 의도적으로 사망 일시를 조작한 흔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사망 발표 시점이 하루 늦게 이뤄진 이유는 영친왕의 혼례(1월 25일)가 목전에 있던 상황에서 일본 당국이 결혼식 연기 여부를 놓고 우왕좌왕하다 공표 시기를 놓쳤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망 날짜를 정확히 밝힐 수 없었으며, 시신 수습이 늦어지면서 부패·피하 출혈이 일어나 오해를 낳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은 독살, 다른 사람은 독살되지 않았다는 정 반대 주장을 내놓았다. 독살설의 근거는 타인에게 전해 들은 내용을 근거로 했을 뿐 그 밖의 구체적 증거는 없다. 그렇다면 '역사적 사실'은 무엇일까? 독자들은 누구 주장이 보다 사실에 근접한 것인지 냉정하고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판단을 할 때가 왔다. (김용삼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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