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칼럼] 우리가 불행한, 아니 불안한 이유

김수용 논설실장
김수용 논설실장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때 폭염 속에 방호복을 입고 탈진 직전까지 환자를 돌보던 의사들에게 응원 편지를 보냈던 국민들이 지금은 제 밥그릇 챙기려고 환자 목숨을 내팽개치는 파렴치한 집단이라고 의사를 욕한다.

집값이 하염없이 치솟을 때 '영혼까지 끌어다 대출 내서' 집을 사지 않는 청춘들을 비웃었지만 이젠 고금리 시절을 겪지 못한 철부지로 치부한다.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됐고 인공지능이 세상을 바꾼다고 난리다. 멋진 신세계가 펼쳐질 것으로 기대하는 이들보다 그저 막연한 불안감에 떠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일자리를 대체한다는데 도대체 무슨 직업을 택해야 할지 막막하다. 관련 전문 인력을 대거 육성한다는 정부 발표가 있었지만 의과대학 정원을 2천 명 늘리면 과연 누가 이공계에 진학해 나라의 미래를 이끌지 아득하다.

국민연금은 고갈되고 건강보험료는 이대로 가면 적자가 뻔하다는데 뚜렷한 대책이 나왔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불안한 마음에 은행과 증권사 말만 믿고 고위험 투자를 했더니 수익은커녕 반토막 나 버렸다.

부모님은 정정하시고 자식들은 취업할 자리가 없는데, 정년이 다가오고 연금은 용돈이나 될지 걱정스럽다. 큰 병에 걸리면 아슬아슬 줄타기처럼 꾸려 오던 가계가 파탄 날 판이다.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하지만 지나치게 낮은 병원 문턱 탓에 불필요한 지출로 휘청거리는 국민건강보험 제도가 힘겹게 버텨 주면 다행이지만 만에 하나 '영리병원 허용, 민간 의료보험 도입' 소리가 나오면 그마저도 위태롭다. 지금 돌아가는 판세를 보면 슬슬 불안해진다.

현대사회는 가히 '급변'이다.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빠르게 변한다. 며칠만 뉴스를 안 보면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따라가기 힘드니 포기한다. 외면하고 비난한다. 근거는 매우 단편적이다. 편견과 아집의 방에서 좀처럼 나오려 하지 않는다. 정치는 이를 악용한다. 선거철을 맞아 온갖 마타도어가 난무한다. '저 자(者)는 이런저런 나쁜 짓을 저질렀으니 단죄해야 한다. 내가 옳다'가 핵심이다. 인공지능이 만든 '가짜 정치인'이 내뱉는 말까지 가려내야 하는 판국이다.

정치는 나쁜 놈을 걸러내는 게 아니다. 무릇 정치는 국민을 평안하게 해야 한다. 일상이 순조롭게 흘러가도록, 그렇게 조금은 여유로워도 미래에 큰 지장이 없도록 보살피는 게 바로 정치의 역할이다. 그런 나라를 선진국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지금은 정반대다.

국민들이 정치를 걱정한다. 염려가 지나쳐 염증을 느끼고, 급기야 무심해진다. 내 목숨과 안위를 살피기도 힘겨운데 정치꾼들의 감언이설에 시간과 감정을 소비하는 건 사치다. 그러니 일부 극렬 세력들의 목소리가 세상을 뒤흔든다.

개혁과 혁신, 혁명적 변화는 불안을 키우고 피곤하게 한다. 교육, 사법, 정치, 연금, 노동 등 온갖 개혁 대상투성이다. 살 수 없는 나라에 사는 기분이다. 불안하니 행복지수가 높을 수 없다. 건국 이래 정권마다 혁명적 과업을 수행 중이다. 미래 준비는 필요하고, 변화는 마땅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그런 과정들은 그에 걸맞은, 아울러 책무를 짊어지겠다고 자임하는 이들에게 맡기고 부디 국민들은 안정감 있고, 질곡 없는 삶을 누리도록 하면 좋겠다. 특히 정치 집단의 이해를 위해 국민 불안을 증식시키는 행태는 반드시 뿌리 뽑아야 한다. 피로가 누적돼 혐오를 낳고, 무기력이 무관심으로 이어지면서 미래를 더 칙칙하게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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