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래빗홀 펴냄 / 정보라 지음

해양 생물 이미지. 클립아트코리아.
해양 생물 이미지. 클립아트코리아.

"나 책 좀 읽어"라고 하는 독자들 중, 2022년 출간된 소설집 '저주토끼'를 모르는 사람들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단편 소설 여러 작품을 묶은 소설집으로, 신선한 엽기 호러물로 당시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표제작인 '저주토끼'는 화자의 할아버지가 저주를 위해 만든 토끼에 관한 이야기로, 국내 문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아, 국내 뿐만이 아니다. 전 세계 20개국에도 번역 계약을 했을 정도로 해외에서도 반향을 일으켰다.

'저주토끼'는 2022년 부커상 국제 부문 최종 후보에도 이름을 올렸고, 지난해에는 국내 최초로 전미도서상 번역문학 부문 최종 후보에도 선정됐다. '부커상'은 노벨문학상과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로, 1969년 영국의 '부커사(Booker)'가 제정한 역사와 전통, 권위를 자랑하는 상이다. 이렇게 큰 사랑을 받은 '저주토끼'의 저자는 '정보라'다. 그리고 그는 올해 새로운 소설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로 다시 독자를 찾았다.

정보라는 연세대 인문학부를 졸업하고 예일대에서 러시아·동유럽 지역학 석사를 거쳐, 인디아나대에서 러시아문학과 폴란드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수 십 년 간 문학도로서의 삶을 산 것이다. 그의 작품인 '머리'는 1998년 연세문화상에, '호(狐)'는 2008년 디지털문학상 모바일 부문 우수상에 당선됐다. 그리고 2014년에는 '씨앗'으로 제1회 SF어워드 단편 부문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이 밖에도 '여자들의 왕', '아무도 모를 것이다' 등의 소설집과 '문이 열렸다', '죽은 자의 꿈' 등의 장편 소설을 여럿 펴냈다.

그가 이번에 새롭게 펴낸 소설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는 해양(외계) 생물을 주제로 한 '자전적' SF소설이다. '자전적인' 이라는 뜻에 맞도록 작가 본인이 살고 있는 포항이 배경이다. 등장인물 또한 그의 가족이나 이웃, 친구 등 주변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유머스럽고 경쾌한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지만, 그 내면에는 힘들고 어려울 때 서로 상부상조한 따뜻한 사랑의 모습이 담겨있다.

책은 각각의 해양 생물을 중심으로, 총 6개의 목차로 구성돼있다. 첫 번째인 '문어'에서는 강사법 개정과 팬데믹 이후 대학에서의 비정규직 강사 대량 해고 사태를 배경으로 한다. '대게'와 '상어'에서는 이주 노동자와 해양 생태계를 근심하는 한편, 새로운 가족들을 향한 애정을 드러낸다. '개복치'에서는 "남들과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니기에, 각자의 삶의 방식을 찾으면 된다"는 작가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해파리'와 '고래'에서는 소설의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이 여섯 종의 해양 생물과 소설 속의 '나'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서로 얽히고설킨다. 하지만, 그 종착점은 명료하다. 변화의 가능성을 믿고 세상을 조금씩 바꿔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겉으로 봐서는 바삭해 보이지만, 한 입 베어물면 촉촉한 반죽을 느낄 수 있는 '겉바속촉(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소금빵이 생각난다. 이 소설이 그렇기 때문이다. 다만, 겉바속촉이 아닌 '겉촉속바'다. 독자들이 '겉'으로 표면적으로 읽고 느낄 수 있는 문체는 유쾌하고 속도감있게 풀어내 '촉촉'하지만, '속'은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다.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해고 처분, 장애인의 이동권을 무시한 시설, 작은 나라의 이권을 호시탐탐 노리는 21세기 제국주의, 잔인한 해양 생태계 파괴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등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현안들을 다루기 때문이다. 소설에는 '외계' 생명체가 등장하지만, 진짜 주인공은 우리 '인간'이다.

여기, 작가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 "항복하면 죽는다. 우리는 다 같이 살아야 한다." 268쪽, 1만6천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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