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이근필 퇴계 16대 종손이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종택 뒤편 선영에 묻혀 영면에 들었다. 가족과 문중 후손들만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애도했다. 이날 장례식은 고인께서 생전 유림 사회와 현대 사회에 전했던 가르침에 비해 너무 조촐해 남은 유림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왜 유림장(儒林葬)으로 모시지 않았을까?' 하는 미안함과 아쉬움이 크다.
안동의 한 유림 어르신은 퇴계 종손이 영면에 든 이날 저녁 귀가해 우편으로 보내 온 봉투 하나를 받았다. 이 봉투에는 퇴계 종손께서 직접 한지에다 붓으로 쓴 '조복'(造福)이라는 글씨 20여 장이 들어 있었다. 우편 소인에는 4일 발송된 것으로 찍혀 있었다. 종손께서 서세하기 며칠 전이다. 찾는 사람이 뜸했던 코로나19 시기에도 쉬지 않고 썼던 글들을 전국 유림들께 보내신 듯했다. 이 유림 단체장은 한동안 가슴 먹먹함과 애통함을 떠나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을 어찌 할 줄 몰라 망연자실, 캄캄한 저녁 하늘을 한참이다 쳐다봐야 했다고 전해 왔다. 그는 "'유림장'으로 모시지 못한 아쉬움과 죄송함이 크다"고 했다.
고인의 빈소에서 지역 유림 인사들 사이에서 '유림장'에 대한 의견이 오고갔다. 하지만 '선대인'(先大人)이신 고 이동은 퇴계 15대 종손을 비롯해 고 류영하 서애 14대 종손의 장례도 문중장으로 모셨다는 이유로 '유림장'에 대한 논의는 진척되지 못했다. 고인을 곁에서 모시고 의지했던 유림 인사들은 왜 '유림장'을 건의하지 않았을까? 지역 유림들은 아쉽고 미안한 마음이다.
고 이근필 종손은 영남을 벗어나 우리나라 유림 사회에서 존경받았던 '참선비' '참스승'이셨다. 그러하기에 '유림장'을 통해 고인의 학덕과 유가의 실천 모습을 알리고, 남은 유림들이 화합해 더욱 유가의 덕목을 보존·전승하는 모범으로 삼아야 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크다.
지난 2007년 8월 경남 김해 월봉서원 앞마당에서는 영남 기호학파의 거유로 불린 화재(華齋) 이우섭(李雨燮) 선생의 장례가 전국 유림장으로 거행됐었다. 전국에서 모인 유림과 문하생, 조객, 일반 시민 등 1천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된 이날 유림장은 단순한 장례를 벗어나 고인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는 교훈적 기회가 됐었다.
이근필 종손 서세(逝世) 소식에 전국 유림들이 슬픔과 애통함을 전해 왔다. 원근 가리지 않고 한걸음에 달려와 유림 큰어른의 죽음을 애통해했다. 황망한 마음을 글로 적어 보내 왔다. 콩추이장(孔垂長) 공자 79대 종손도 빈소에 조사를 보내 "근필 선생의 서세는 한국 유림에는 중대한 손실"이라며 슬픔과 애통함을 전했다.
생전 반평생을 유가의 덕목과 철학, 사상을 전승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신 고인은 그야말로 '참선비' '참스승'이셨다. 퇴계 선생의 유맥을 잇고 각별한 몸가짐으로 종법 전통을 지키면서도, 옛것에 머무르지 않았다. '문중의 법'이라는 종손의 권한도 스스로 내려놓으셨다. 전국 유림 사회의 혁신을 종가 맏형 격인 '퇴계 종가'가 모범을 보여 주셨다.
종택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는 '조복'(造福)이라는 글씨를 직접 써서 주면서 '스스로 복을 지을 것'을 권유하셨다. 또 '은악양선'(隱惡揚善)을 권했다. '남의 나쁜 점은 덮어 주고, 좋은 점은 널리 알리자'는 의미를 몸소 실천하셨다.
퇴계 종손께서는 '진정한 유림'이셨다. 영남 유림을 지탱해 온 상징적 기둥이셨다. 이제 남은 유림들이 화합해 선생의 학덕과 사상을 기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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