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한의 연작소설 '왕룽일가'의 두 번째 이야기 '우묵배미의 사랑'은 신림동 친구네 맞춤가게에서 소일하다 우묵배미로 다시 돌아간 배일도가 미싱사 민공례를 만나 벌이는 사랑과 불륜의 이야기를 회고담 형식으로 그려낸다.
'왕룽일가'에 따르면 우묵배미는 "서울시청 건너편 '삼성' 본관 앞에서 999번 입석을 타고 신촌·수색을 거쳐 50분쯤 달려와 낭곡 종점" 근처에 있는 변두리 마을 이름이다. 김포 부근에 위치한 소읍으로 예전에는 완연한 시골이었겠지만 지금은 연립과 빌라 신축 분양 광고가 줄지어 나부끼는, 도시도 아니고 시골도 아닌 곳. 하지만 우묵배미로 진입하는 낭곡 종점이 김포 인근인지 아닌지는 하나도 중요치 않다. 서울의 지속적 팽창이 마침내 인근 도시까지 파고들어 난개발을 유도한 결과 생겨난 동네가 '우묵배미'이고 그곳에 있던 원주민과 흘러들어온 사람들 사이에서 피어난 이야기라는 점에서, 유사한 삶의 경관을 펼쳐진 곳이라면 어디라도 무방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묵배미의 사랑'은 민공례 남편의 방문을 받은 나리아빠와 배일도와 새댁으로 화자를 옮기며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펼쳐진다. 박영한은 남편의 학대와 힘겨운 노동 속에 사는 민공례와 "첩첩 산골에서 올라온 순 무식한 촌년"인 거친 아내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배일도 사이의 불륜을 어떤 구원처럼 묘사하고 있다. 추레한 공간과 남루한 삶을 전경화시키고 있음에도 이들의 불륜이 한 없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일 터. 한편 작가는 배일도와 민공례의 불륜을 낭곡 지역의 급속한 도심화가 빚은 성도덕 추락의 단편으로 진단하는데 "쿠웨이트 박한테 곱게 미쳐 있는 은실네며 은실이 고모는 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는 편"(16쪽)이라고 할 정도다.
주목할 것은 배일도 시점이 끝날 때 그러니까 두 사람의 애정행각이 비닐하우스에서 발각되는 장면에 이어 등장하는 새댁의 독백이다. 이 대목은 서사에서 타자화된 여성의 완강한 존재증명처럼 읽힌다. 5쪽이나 할애해 새댁의 서글픈 삶의 이력을 묘사한 작가는 배일도와 고향집을 향해 분노의 칼날을 정 조준하더니 한판 씻김굿으로 마무리한다.
자신의 환경을 벗어나려 애쓸수록, 우묵배미 밖으로 나갈수록 패배감과 절망감이 엄습하는 경험. 배일도와 민공례의 행로는 낭곡 외곽이거나 동대문에서 영동까지 이르지만, 끝내 둘은 낭곡 인근의 변두리 여인숙을 벗어나지 못한다. 둘의 첫 번째 데이트에서 "계속 우린 이렇게 샛길루 가야 할 거예요"라는 배일도 말에 "넓구 환한 길은 재미가 없잖아요"(38쪽)라 민공례가 답했고, "겉잡을 수없이 평펑 쏟아진 눈물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었던 "서로의 가난이 서로에게 바람벽이 되어준" 그 밤을 건너면서 둘의 관계는 정점으로 향하지만, 민공례 말대로 "다아 허깨비 놀음이었"을 뿐이다.
'우묵배미의 사랑'을 읽을 때마다 배일도와 민공례를 생각하면 고달픈 민중의 삶 속에서 길어 올린 초라하고 가난한 사랑이 보였다가 새댁과 마주하면 도덕과 책임이란 단어가 튀어 오르곤 한다. 그럼에도 몇 만원을 조물거리는 게 고작인 못난 남자와, 그런 사내와 여인숙에서 첫 밤을 보내면서도 "이따금씩 이렇게 좋은 남자 가까이 지내면서 서방 뭇매를 당하는 게 차라리 낫다"는 여자를 어찌 손가락질 할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이 소설이 등장한 건 1989년 7월 10일인데.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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