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 화성 연쇄살인을 다룬 연극 <날 보러와요>(김광림 작, 연출)를 모티브로 한 영화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80년대 말부터 91년도까지 화성 일대에서 일어난 잔혹한 연쇄살인의 진범은 DNA 증폭 및 복원 기술 덕에 증거품에서 DNA를 채취해 교도소 복역 수감자들 DNA와 대조하던 중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이춘재로 밝혀졌다. 강력반 형사 박두만으로 분한 배우 송강호의 독특한 억양과 말투, 전봇대에 올라가 있는 백광호(박노식 분)를 향해 "비 낙오던 날 밤에 향숙이 죽은 거 봤지"라며 툭툭 뱉어대는 날것의 연기는 배우의 본능적인 감각을 보여주었다. 이 영화로 박해일은 스타덤에 올랐고, 송강호는 천만 배우의 확고한 불패 신화를 굳혔다. 복수와 살인을 모티브로 하는 연극은 고대 그리스 비극부터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오고 있다. 반전과 서스펜스, 인물 내면의 심리적 갈등, 악과 선의 스테레오타입의 극 중 인물 설정 등 살인의 수수께끼를 풀어가기 위한 구성이 예측할 수 있는 결말로 이어질 때 별점 테러를 당할 수도 있다.
평면적인 무대에서 재연되는 연극에서 살인과 복수의 소재는 영화보다 더 많은 제약이 뒤따른다. 영화적 재미와 사실적 세트, 롱테이크와 입체적인 앵글의 효과, 다양한 몽타주 기법과 영화적 미장센의 구도를 무대에는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연극은 치밀한 플롯과 극적인 장면 구성, 공간 배치, 반전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밀도 있는 전개, 배우들의 연기 호흡, 연극적인 구현과 사실성을 극대화하는 소품과 무대장치로 극적인 효과를 드러내야 한다. 그런 만큼 살인과 복수의 짜릿한 전율을 극적으로 제대로 우려낼 수 있는 배우와 치밀한 연출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연극 <살인극: 에필로그>(홍진형 작, 정범철 연출)는 연쇄살인 후 20년의 형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살인자 아버지(윤성원 분)를 향한 아들(김정식 분)의 복수극으로 설정되어 있으면서도 복수의 실체가 밝힐 때까지 75분 동안 극적인 긴장감을 보여주는 2인극이다. <살인극: 에필로그>는 그 동안 <이 땅은 니캉내캉>(2013), <망원동 브라더스>(2014),<체홉. 여자를 읽다>(2015), <안네 프랑크>(2017), <칼치>(2022) 등을 무대화해 온 극단 제자백가의 공연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비 오는 날 빨간 잠바와 우산을 쓴 채 논두렁을 걸어가다 살해당하는 피해자로 분해 강한 인상을 주었던 배우가 극단 제자백가의 대표이자 이번 공연에서 프로듀서를 맡은 이훈경씨다.
◆치밀한 반전의 복수극
연극은 20년 전 노숙자 연쇄살인을 한 뒤 만기 출소 후 아들이 사는 원룸형 빌라로 아버지로 보이는 한 남자가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70석 규모의 극장(혜화당 소극장)을 채운 관객들 시선은 음습한 무대에 고정된다. 어두운 조명, 습한 실내 분위기, 사람 흔적과 생활 냄새가 차단된 폐허의 집처럼 보인다. 흑색 빛의 낡은 싱크대와 탁자, 그리고 안방으로 보이는 무대 뒤편의 문 위쪽으로 통나무가 출입금지 구역처럼 방문을 차단하고 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이 정도면 살인과 복수가 잔인하게 일어날 것 같은 무대 분위기는 충분히 시선을 끌 만하다. 우측 길가로 걸어들어오는 아버지는 호흡을 가다듬는다. 문 앞에서 몇 차례 초인종을 누른다. 관객들은 분할되어 있는 극 중 아버지와 아들의 행동을 교차적으로 응시하게 된다. 긴장한 표정으로 방안을 서성이다가 출입문을 여는 아들, "어이, 아들" 하며 씨익 웃고는 거실로 들어서는 아버지, 연쇄 살인자와 아들의 숨겨진 비밀이 시작된다. 문 여는 소리, 초인종, 끼익, 덜컥, 쿵쾅거리는 효과음과 함께 밀폐된 방의 분위기가 증폭되면서 극적 긴장의 볼륨이 높아진다. 살인자를 대하는 아들의 행동, 아버지의 죄책감과 가족사, 연민이 뒤섞인다.
연극 초반에는 이들의 20년 전 기억을 다룬다. 아들이 초등학교 입학 전 서울역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연쇄살인을 저지른 아버지는 20대로 성장한 아들과 끊긴 관계를 회복하려 하고, 아들은 칼을 꺼내 든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는 패륜아의 존속살인이 일어날 것 같은 대립적인 장면구도를 형성한다. 막장드라마보다 더 막장 같은 아들의 욕설과 아버지를 경멸하는 대화들이 섞일 때쯤 관객들은 살인자 아들로 살아야 했던 아들의 복수극을 생각하게 된다. 예측을 분산시키기 위한 작가의 설정이다. 분노는 칼날로 향하고 두 사람의 팽팽한 긴장감이 무대로 흐를 때쯤, 아버지를 죽일 수 없는 아들의 감정들이 거실을 움직이며 대사에 섞인다.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이 애비가 사람 셋이나 죽인 전문가잖냐. 믿고 찔러보라니까."라며 능숙하게 칼을 뺏으면서 아들의 복수는 싱겁게 끝나는가 싶다. 여기까지가 극적인 가속 페달을 밟기 위한 밑그림이다.
20년 동안 쌓여온 아들의 분노와 복수의 심리, 부자 간 갈등은 연쇄살인 후 아들이 군대에 갈 무렵 도망간 아내 이야기로 이어지며 2라운드의 긴장감을 형성하고, 막장을 달리는 두 사람의 대화는 살인극의 에필로그를 향해 달린다. 아버지의 연쇄살인은 사회를 향한 묻지마 식 분노로 인한 것으로 드러나고, 라면을 끓여 놓고 아들과 소주를 마시며 아버지는 20년의 시간을 대화로 풀어간다. 살인자의 아들을 위해 제2의 살인도 할 수 있다는 내용이 두 사람의 대화로 드러날 즈음, 극의 포인트는 서서히 두 사람 관계에서 밀폐된 방으로 옮겨지고 긴장감이 파동된다. 비로소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복원된 것처럼 느껴질 때쯤, 아들은 엄마를 살해했다고 말한다. 작가는 두 사람의 대화와 무대의 밀폐된 방에 극적 반전을 숨겨둔 채 극을 속도감 있게 조여가며 충격적인 반전을 위한 섬뜩한 전류를 흘려보냈다. 복수극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게 묘미다. 극의 흐름이 정직하게 살인자가 되어가는 연쇄살인범의 아들을 그려낸다면 반전과 복수의 극적 전율은 반감되기 마련이다.
결말을 미리 알면 재미가 없다. 한 발 더 극으로 들어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보자. 아들은 연쇄살인범의 아들로 살아왔던 초중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쏟아내고 아버지는 20년 동안 못 준 생일선물인 셈 퉁치자며 아들을 대신해 살인자가 된다. 경찰을 기다리며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안아보자며 짠한 부성(父情)애를 드러내고 마지막 소주는 복수하려는 자의 축배의 잔이 된다. 아버지는 거실에서 혼자 살아온 것처럼 흔적을 지우고 칼과 탁자, 식기에 묻은 아들의 지문을 지우며 완전 계획범죄 현장을 만든다. 조명은 잔혹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방문과 문을 봉인하고 있는 통나무를 비추고 그 사이로 새어 나오는 전자레인지 불이 서서히 꺼져 갈 때쯤 "살인사건의 희생자가 범인 인모 씨의 친아들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라는 뉴스 진행자의 소리가 들린다. 뉴스 오디오가 암전된 무대로 들려올 때, 관객들은 20년의 긴 시간을 기다려 아들 행세를 하고 연쇄살인범의 친아들을 죽인 후, 연쇄살인범을 범인으로 만든 '그'의 정체에 대해 뇌피셜을 작동하며 상상하게 된다. 연극의 반전은 범인의 실체가 아닌 아들 역할을 해온 인물의 정체(定處)에 숨겨져 있다. <살인극: 에필로그>는 극의 제목처럼 마지막에 충격을 끌어낸다. 교도소 면회실 장면에서부터 숨겨져 있던 놀라운 비밀이 에필로그의 치밀한 반전의 복수극으로 전환된다.
◆2인극의 희곡, 배우와 연출, 삼박자의 균형감
<살인극: 에필로그>에서 에피소드1이 '아버지의 방문' 이었다면, 에피소드2는 '아들의 방문'이다. 젊은 세대의 옷차림에 노란색의 헤드폰을 착용하고 아들은 교도소 면회실에 나타난다. 75분 중 20분을 이 단일 장면에 할애했고, 두 사람의 대화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반전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연쇄살인범의 아들 행세를 하며 그의 진짜 아들을 살인한 범인은 20년 전 연쇄살인 사건의 피해자였던 노숙인의 아들이었던 것. 피해자 아들은 20년 동안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를 기다리며, 그의 아들을 살해하고 연쇄살인범을 범인으로 만드는 치밀한 복수극을 계획한다. 진범의 실체가 드러나는 에필로그 장면까지 눈치챌 수 없는 마지막 강력한 한방으로 반전의 묘미를 살려냈다. <살인극: 에필로그>는 배우들의 연기가 긴장감 있게 극을 몰고 가면서도, 한국극작가협회 신춘문예에서 희곡 <가족연극>으로 등단한 후 <환절기에서>, <남겨진 사람들>을 발표한 신진작가의 탄탄한 극적 구성이 극을 뒷받침하고 있다. 대중적 연극을 선보이고 있는 정범철의 연출력이 극작가의 희곡과 교집합을 이루고, 여기에 두 배우의 연기가 극적 반전과 복수의 비밀을 연극 후반까지 긴장감 있게 몰고 간다. 배우, 희곡, 연출의 3박자가 잘 어우러진 것이다.
아쉬운 점은 '에피소드2'에서 20년의 세월을 두 사람의 정보와 대화만으로 채웠다는 점이다.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극 마지막의 에필로그(면회실 장면)로 계획된 살인의 정보를 해결하는 두 사람의 대화를 조금 걷어내길 바란다. 특히 2인극을 살려내고 있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이다. 아버지로 분한 윤성원은 한 아들의 아버지이자 연쇄살인범의 심리적인 내면과 갈등을 정확하면서도 유연한 화술과 연기의 호흡적 리듬으로 연극이면서도 영화적인 인물구현을 보여주었고, 아들로 분한 김정식은 이번 공연이 대학로 데뷔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연쇄살인 피해자의 아들과 살인자의 두 인물이 중첩되는 내면의 대비감을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기대되는 신인배우다. 아들 역할은 더블 캐스팅(김정식, 장현호)이다. <살인극: 에필로그>는 6월 12일부터 23일까지 동숭무대소극장에서 재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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