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극이 쏟아지고 있다. 낭독극은 '스테이지 리딩(Stage Reading)'의 개념으로 고대 시극, 희곡, 문학작품을 웅변투로 낭독하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1945년 'Readers Theater'라는 뉴욕 전문 극단에서 교육과 공연의 개념으로 활용되기 시작하면서 공연의 형태로 정착되기 시작했다. 낭독의 역사는 우리나라에서도 찾을 수 있다. 우리 낭독극의 원형으로는 조선 후기 직업 낭독가였던 전기수(傳奇叟)가 있었다. 직업은 소설을 읽어주는 남자였다. 그들은 대중 취향의 틈새를 노린 흥행사였다. 현대 낭독극과 다른 점이 있다면, 1인 중심의 소설을 전문적으로 읽어주는 낭독가였다는 점이다. 전기수는 조선의 1인 크리에이터 성우였던 셈이다. 탁월한 입담과 소리 연기로 <숙향전>, <소대성전>, <심청전>, <설인귀전> 등 당대 인기 작품들을 사람들이 모이는 시전 바닥에서 읽어주며 돈을 벌었다. 전기수의 입으로 생생하게 전달되는 변화무쌍한 장면들을 상상하며 사람들은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니, 전기수의 낭독은 단순한 낭독이 아니라 라디오 드라마처럼 소리 연기에 가까웠을 것이다. 한편 일본 낭독극의 원형은 일본 전통 예능 중 하나인 고단(講談)에서 찾을 수 있다. 메이지 시대 이전까지 고샤쿠(講釋)라 불리던 고단은 17세기부터 시작되었다. 고단시(講談師)라 불리던 남성 1인이 샤쿠다이(釋臺) 앞에 앉아 이야기를 낭송하고, 줄거리가 전개되는 식이다.
한일연극 교류를 활성화하자는 취지로 2002년 발족한 한일연극교류협의회(회장 이성곤)는 그 해 10월 <사랑을 찾아서>, <대대손손>, <바보각시>, <허탕>, <미친 키스>의 김광림, 박근형, 이윤택, 장진 등 다섯 희곡작가의 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해 도쿄 대학생회관(바시티 홀)에서 사흘에 걸쳐 낭독공연을 가졌다. 그 해 11월에는 일본 현대희곡인 <히네미>(미야자와 아키오), <천황의 입맞춤>(사카테 요지), <엄마, 안녕>(나가이 아이), <침묵의 빛>(마스다 마사타카), <루트 64>(가네시타 다쓰오)의 작품을 소개했다. 제11회 현대일본희곡 낭독공연이 국립극단과 한일연극교류협의회 주최로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렸다. <가타부이, 1972>(나이토 유코内藤裕子 작, 이연주 연출)와 <조지 오웰-침묵의 소리>(스즈키 아쓰토鈴木アツト 작, 서지혜 연출)등 두 편의 현대일본희곡이 낭독극으로 소개되었다. 초기 한일연극 교류 낭독극 공연은 양국의 현대희곡을 교류하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22년이 된 올해 한일연극 교류 낭독공연은 변화를 보여주었는데, 낭독과 읽기의 방식에서 탈피해 무대화되었다. 배우들은 극 중 인물을 충실히 전달하고, 캐릭터를 나타낼 수 있는 의상, 소품, 오브제, 조명 등 간소하면서도 효과적인 도구와 장치를 통해 '읽는 희곡'에서 '보는 희곡'으로 무대화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특정 장면에서는 영상으로 무대 배경을 전환하고, 소도구, 조명과 음향으로 극적인 분위기를 내며, 장면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두 편의 현대일본희곡 낭독공연 중 서지혜 연출의 <조지 오웰-침묵의 소리>의 이야기다.
◆ 작가 스즈키 아쓰토의 전쟁과 식민 지배 역사의 인식
낭독공연의 백미는 희곡의 입체적 '낭독' 방식이다. 연기와 연출은 낭독공연을 입체적으로 설정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특정 장면에서 극 중 인물의 상황과 갈등을 부각하여 희곡을 효과적으로 확장시켜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지 오웰-침묵의 소리〉는 100분 동안 배우, 연출, 희곡, 작가가 선명하게 부각된 낭독공연이었다. 현대 일본 작가인 스즈키 아쓰토(鈴木アツト)는 영국의 대표적인 소설가를 소환해 인도를 식민 지배하는 대영제국의 민낯과 식민지배와 전쟁을 위한 프로파간다 역할을 해온 BBC방송을 다룬다. 스즈키 아쓰토는 일본의 제주의 침략전쟁과 동아시아 식민지배의 역사를 〈조지 오웰-침묵의 소리〉를 통해 대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조지 오웰–침묵의 소리〉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2년 뒤 인도에서 출생해 영국에서 조지오웰이라는 무명 소설가로 살아가고 있는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 이하 에릭, 김성태 분)의 서사가 중심이다.
무대 공간은 아내 아일린 블레어(정선미 분)와 살아가는 런던에 에릭의 집(조지오웰의 집필실)과 에릭이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BBC 라디오 방송 스튜디오로 구성된다. 이번 희곡이 소설가 조지 오웰의 평전(評傳)으로만 읽혀지지 않는 것은 7년(1940~1947)이라는 시공간의 시차를 두고 조지 오웰과 주변 인물들, BBC방송국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상황들이 일본의 조선 식민 지배 역사와 겹쳐진다는 점이다. 영국은 침략 전쟁으로 식민지를 확장하는 일본으로, 독립운동을 벌이는 인도는 식민지 조선의 상황과 겹쳐진다. 그런 만큼 <조지 오웰-침묵의 소리>의 시간은 자유와 독립을 위한 저항, 국가 검열과 통제, 야만적인 폭력과 전쟁이 여전히 진행 중인 현재이기도 하다. 스즈키 아쓰토는 폭력으로 식민지를 만들고, 피식민 국가의 언어를 말살하고, 민중들의 목소리를 억압하고서는 세계 역사의 승자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는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2차 세계대전 후 소설 <동물농장>을 쓰며 세계적인 작가가 되어가는 에릭의 시간을 그리면서도 독일, 이탈리아, 일본, 영국의 2차 세계대전 당시 내전 상황과 런던대공습, 소련의 소비에트 연방, 진주만 폭격과 히로시마 원자폭탄, 간디의 평화적 독립운동과 인도의 독립까지 현대 전쟁의 역사를 에릭을 중심으로 압축하여 보여준다.
극의 중심 서사는 에릭이 BBC 프로듀서 조나단(남동진 분)으로부터 인도 엘리트들 사이에 늘어나고 있는 반영파(反英派)들을 계몽할 수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들어 줄 것을 제안받는 것이다. 에릭은 국가 검열과 통제에 시달리면서도 인도와 영국을 위해 라디오 방송을 진행한다. 그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인도를 식민 지배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였음을 알게 된다. 반전 활동을 이어가던 간디가 체포되자, 에릭은 비로서 영국이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 인도와 동맹을 맺은 것이 아니라 대영제국의 영토 확장과 전쟁의 승리를 위해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주변 인물들도 영국이 인도에서 철수하면 일본에게 점령당할 수 있다는 입장과 대영제국의 식민 족쇄를 풀기 위해서는 간디의 비폭력 평화독립 운동을 지지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나뉘면서 갈등을 드러낸다. 5장의 에릭의 대사다. "자유를 외치면서, 평등을 내세우면서, 결국은 인도인을 이용하고 있잖아!" 5장의 마지막 장면은 정부의 통제와 검열을 받아왔던 원고를 대신하여, 에릭의 자유의 언어(문학)를 BBC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마이크 앞에서 '목소리'라는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장면이다. 에릭은 문학(예술)만이 야만의 역사를 기록할 수 있으며, 시인(시)의 언어는 전쟁으로 인한 고통과 갈등을 드러내고 피식민국가의 비폭력 자유를 향한 진실의 열망을 표현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조지 오웰의 침묵의 소리는 비폭력 저항운동이자 1947년 8월 15일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주도한 마하트마 간디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침묵의 소리인 셈이다.
총 8장으로 구성된 <조지 오웰-침묵의 소리>는 1장부터 영세한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 에릭의 친구 프레드릭(최무인 분)이 등장하고, 2차 세계대전의 독일과 영국의 치열한 전쟁 상황과 BBC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에릭이 그려진다. 6장 이후부터는 소설 <동물농장>을 출판하는 에릭과 인도의 독립을 다루고, 2년 뒤(1947) 시간이 흐른 시점으로 전환되는 7장에서는 아내 아일린(정선미 분)의 죽음과 에릭의 소설 <동물농장>이 라디오 전파를 타는 장면이 그려진다. BBC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전반부 에릭의 장면들이 자유가 통제된 역사의 시간들이었다면,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마지막 장면은 소설 <동물농장>과 연결된다.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을 대비시킨 것은 문학(예술)의 진실만이 자유와 평등의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는 점을 환기하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전쟁의 위협과 폭력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는 점을 드러낸다.
◆낭독공연의 연극성, 배우들의 입체감
<조지 오웰-침묵의 소리>가 80분 동안 낭독공연의 극적인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평면적인 낭독을 탈피해 입체적으로 희곡을 구현했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침묵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닌 무대를 보는 것처럼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했다. 특히 배우들의 안정된 연기, 장면의 극적인 감정(소리)의 템포와 리듬, 내레이션의 효과적인 전달과 스크린 영상을 투사해 장면의 실제감과 극적 효과를 높였다. 서지혜 연출은 낭독공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스크린에 투사되는 영상과 이미지의 조합으로 서사를 입체화하는 연출적 감각을 보여준다. 연출의 장점은 희곡을 자기화하여 강렬한 연극성으로 무장해 연출의 시선을 분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에 있다. 각 장면에서 극 중 인물들의 대화 사이로 투영되는 스크린의 이미지와 최소한의 도구는 낭독공연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연출적인 재료라기보다 작가의 언어에서 연출자의 시각으로 치환되는 도구였다. <조지 오웰-침묵의 소리>의 실현 무대를 기대할 정도로 효과적이었다. 우선 2차 세계대전의 비극적인 현장, 원자폭탄의 강렬함, 에릭과 BBC방송 스튜디오, 마이크 앞에서 있는 에릭의 고뇌와 표정, 자유와 평화를 갈망하는 간디의 간절한 음성과 동물농장의 라디오 소리와 배우들의 대사는 전쟁과 폭력의 역사가 반복되는 것처럼 교차적인 효과를 냈다. 연극적으로 영화의 몽타주 효과를 내는 편집도 감각적이었지만 서사의 극적인 볼륨을 조절하는 연출적 배치가 돋보였다.
두 번째로 극 중 인물 조나단 뒤편에 세워둔 조명 스탠드가 인상적이었는데, 극적 부감(俯瞰) 효과를 내는 동시에 자유를 억압하는 인물과 식민 지배 국가로 캐릭터를 상징화하는데 주요했다. 세 번째로 극 중 인물들의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인한 고통의 서사를 인물별로 전달될 수 있도록 독립시켰다는 점이다. 마지막 장면은 에릭이 미래에 보내는 편지처럼 전달된다. 소설의 문장들이 독백처럼 전달된 뒤 희곡의 마지막 문장으로 되어 있는 "눈이 계속 내리는 가운데, 에릭은 소설을 쓰고 있다. 암전."문장의 지문을 마치 우주에서 눈이 내리는 것처럼 영상으로 전달했는데, 눈은 미래를 희망으로 바라보면서도 비극적인 시대의 역사에 갇혀 있는 에릭의 현재이기도 하다. 서지혜 연출은 한 예술가의 용기와 고뇌로 자유를 쟁취한 지난 역사의 눈을 무대로 날려 보내며 미래를 희망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프로젝트 아일랜드 서지혜 연출의 배우 사단인 최무인, 남동진, 김성태, 정선미의 고른 감정호흡과 연기, 극단 58번 국도를 이끌고 있는 고수희가 자유를 갈망하는 소설가이자 시인인 캐서린으로 분해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극의 균형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특히 연극, TV드라마, 영화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최무인은 날것의 즉흥성과 연기호흡으로감각적인 연기를 드러내며 등장하는 장면과 상황들을 생동(生動)하는 극중인물로 전달시켰다. <조지 오웰-침묵의 소리>가 무대구현이 기대되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올해 두편의 일본 현대희곡이 한국 연출로 일본과 국립극단에 의해 공연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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