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시스템 공천과 기울어진 운동장

하세헌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하세헌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총선을 앞둔 각 정당과 후보자들은 4월 10일 유권자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공천 과정에서 다수의 현역 의원 탈락으로 내홍을 겪은 더불어민주당에 비해, 국민의힘은 대다수 현역 의원이 재공천을 받았다. 국민의힘 지역구 의원 93명 가운데 불출마나 낙천 등을 한 경우를 제외하고 70명이 공천 티켓을 확보했다. 재공천율은 75.3%에 이른다. '감동 없는 공천'이라는 평을 듣는 이유다.

현역 재공천율이 높은 것은 이른바 '시스템 공천'에 기인한 바가 크다. 이전까지는 정당 지도부가 물갈이 목표를 정하고, 이에 맞춰 단수 추천 또는 전략 공천으로 새로운 인물을 내리꽂았다. '공천 학살' '공천 농단' 같은 비판도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현역이 있는 경우 대부분 경선을 거쳐 결정했다. 경선은 당원과 일반 국민에 대해 여론조사 방식으로 치러졌다.

정당 간 대결인 본선과는 달리 현역 의원과 신인이 맞붙는 당내 경선은 현역에 절대 유리한 지형이 된다. TK 지역에서는 경선이 치러진 15개 지역구 가운데 현역이 떨어진 곳은 3곳에 불과했다. 현역 생존율은 80%이다. 신인에게는 최대 20%의 가점이 부과되고, 현역 의원에게는 최대 35%까지 감점되는 규정이 있었음에도 대부분 현역 의원이 승리했다. 도전자가 이긴 지역은 직전에 대구시장을 했거나 용산 대통령실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매우 지명도 있는 인물이 출마한 곳이었다.

후보자에 대한 유권자의 선택이 이루어지는 '정치 시장'(political market)에서는 후보자가 평소에 얼마나 '브랜드'(brand)를 구축하고 있었는지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유권자는 선거에 무관심한 경우가 보통이므로, 선택에 임해서는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시장에서 구매하고자 하는 물품에 관한 정보가 충분치 않을 때, 브랜드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현역 의원들은 최소한 4년 동안의 의정활동을 통해 자신을 홍보한다. 의정보고회·당원연수회 등의 명목으로 주민 및 당원들과 일상적으로 만나고, 때로는 의정활동이 언론에도 보도된다. 반면 신인은 선거 120일 전부터 시작되는 예비후보자 등록 때가 돼서야 비로소 주민들과 접촉할 수 있다. 당원 명부도 경선이 시작되고 난 뒤에야 받아볼 수 있다. 홍보 문자 발송, 여론조사 등에 드는 비용도 신인들에게는 큰 부담이 된다. 어지간한 지명도를 가진 신인이 아니고서는 짧은 경선 기간 내에 자신을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경선을 통해 본선에 나갈 후보자를 결정하는 것은 정당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중요한 방법이 된다. 하지만 현행처럼 경선이 현역 의원들의 손쉬운 공천 획득의 수단이 된다면 세대교체는 없고, 기득권만 고착화되는 '노인 정치'(Gerontocracy)만 만연해질 따름이다.

시스템을 유지하면서도 정치의 역동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신인들이 더욱 평평한 운동장에서 경쟁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폐지된 지구당을 부활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지구당을 무대로 해서 정치 지망생은 평소에 당원들과 자주 만나고 자신의 포부를 알릴 수 있다. 선거 공영제 확대도 필요하다. 경선 과정에 지출된 경비에도 보전이 이뤄진다면, 신인들은 비용 부담을 덜 느끼면서 운동을 할 수 있다. 신인들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것은 정치 쇄신을 위한 길일 뿐 아니라, 더욱 공정한 사회로 나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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