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수도 워싱턴DC는 연중 이맘때 가장 붐빈다. 북미 최대 벚꽃 축제인 '내셔널 체리 블로섬 페스티벌'을 보러 150만 명 이상이 찾는다. 1912년 일본이 양국 우호의 상징으로 벚나무 3천 그루를 기증한 게 그 시발점이다.
그런데 워싱턴DC가 행정·입법·사법 중심지가 된 데에는 반전(反轉)이 있다. 시위대의 '방해' 없이 국정을 논하려고 일부러 외진 곳을 새 도읍지로 택했다는 것이다. 독립전쟁을 치르면서 월급을 못 받은 군인들이 수시로 필라델피아에 몰려와 불만을 쏟아내면서다.
결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은 새 수도 건설을 결정했고,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1793년 국회의사당 머릿돌을 놓았다. 하지만 새 도시에 만족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관료는 물론 의원들 스스로도 황무지와 늪지에 들어선 입지를 비난했다.
출범 20년이 되도록 인구 5천 명에 그칠 정도로 외면받던 새 수도에 대한 국민들의 태도가 바뀐 것은 국가적 비극이 계기였다. 1814년 영국군의 공격으로 백악관, 국회의사당 등이 불타 버렸다. 애국심으로 뭉치자 수도를 다시 정하자는 여론은 수그러들었다.
관광객뿐 아니라 전 세계 로비스트들이 몰려드는 워싱턴DC의 현재 위상에서 이런 역사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세계 정치·외교의 핫 플레이스가 시위대를 피하려고 만든 도시라니? 더구나 우리 정치권이 세종특별시의 롤 모델로 삼는 도시가 아닌가!
올해 출범 12년째인 세종시가 느닷없이 총선 이슈로 떠올랐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국회의 완전한 세종시 이전'을 공약으로 발표하면서다. 야당은 물론 대통령실까지 거들고 나서면서 선거에서 누가 이기든 추진할 분위기는 조성됐다.
그러나 과정이 순탄하진 않을 전망이다. 우선 헌법재판소의 행정수도 이전 위헌 결정과 배치될 소지가 있어 개헌이 필요하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11개 국회 상임위원회를 '세종시 국회 분원'으로 이전한다고 돼 있는 국회법도 고쳐야 한다.
국가 재정에 빨간불이 들어온 상태에서 예산 확보 역시 문제다. 일부 이전을 전제로 하는 국회 세종의사당 건립 추정 예산이 3조6천억원인데 완전 이전에는 훨씬 큰돈이 필요하다. 법사위·외교통상위가 세종시로 가면 법무부, 외교부, 통일부도 옮겨야 한다.
무엇보다 '잿밥' 때문에 급조된 공약이 아닌지 우려스럽다. 실제로 한 위원장은 "여의도와 그 주변의 개발 제한을 풀어서 서울 개발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했다. 국가 백년대계를 국회 서울 48석, 충청 28석과 수도권 개발의 지렛대로만 생각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물론 한 위원장은 행정 비효율 해소, 국가균형발전 촉진, 지역 경제 활성화라는 당위성도 제시했다. 하지만 이왕 하려면 홍준표 대구시장 등의 지적처럼 대법원, 감사원의 지방 이전도 함께 검토하는 게 마땅하다. 이는 헌재의 행정수도 이전 위헌 결정과도 무관하다.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중대한 국사를 툭 던지는 모습은 곤란하다. 지방균형발전, 지방분권 차원에서 차분히 접근하지 않고 얼렁뚱땅 밀어붙였다가는 역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 선거가 끝나고 벚꽃이 지고 나면 그냥 없던 일로 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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