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동맹에 대한 일반상식은 휴전협정 체결 직후인 1953년 8월 8일 서명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해 탄생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상식은 역사적 사실과는 크게 다르다. 그 정확한 과정을 추적해 본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이 원하는 휴전회담은 한반도 영구 분단으로 귀결된다면서 이를 집요하게 방해했다. 미국은 휴전 방침에 저항하는 이승만을 제거하고, 미국에 충성하는 인물로 대체하기 위해 에버레디 작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에서 이승만을 대체할 리더십을 가진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에 부딪쳤다.
이 무렵 미 국무부는 한국을 중립화한 후 미군을 철수하고 한국을 미국의 군사 영역에서 제외시키자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미 국방부와 합참은 한국을 중립화하고 미군이 철수하면 남한은 중국에 의해 공산화될 것이며, 미국은 중요한 반공 기지를 상실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논란 끝에 미 국무부 의견이 NSC-157 문서로 채택되어 미국 정책으로 결정됐다.
1953년 6월 18일 이 대통령이 미국과 협의 없이 2만7천여 명의 반공포로를 전격 석방했다. 이것은 미국의 휴전 추진을 이승만이 깰 수도 있음을 보여준 일대 사건이었다. 충격을 받은 미국 정부는 이승만을 달래기 위해 6월 25일 로버트슨 국무부 차관보를 한국에 특파한다.
◆미국 정책을 바꾼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
이승만과 회담한 로버트슨은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하면 이승만은 단독 북진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승만의 단독 북진으로 휴전협정이 깨져 전쟁이 재개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미국 정부는 이승만이 원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주기로 했다.
1953년 8월 8일 서울에서 가조인되고, 그해 10월 1일 워싱턴에서 정식 조인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무려 11개월 후인 1954년 11월 17일 발효됐다. 이승만이 그토록 원했던 조약이 발효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이승만 덕분이다.
상호방위조약 제2조는 한국이 무력 공격당했을 경우 그것을 저지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규정하고 있다. 문제는 제3조에서 그 '적절한 조치'가 '각자의 헌법상의 절차에 따라 행동할 것'이라고 규정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헌법상 절차에 의해 미국 대통령이 의회에 파병 승인을 요청해도 미 의회가 거부하면 미국은 참전이 불가능해진다.
어떻게든 공산군이 재남침할 경우 미국의 자동 개입을 보장받기 위해 이승만은 미국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1954년 초 미국은 상호방위조약 체결 때 약속한 한국군 20개 사단을 창설해 주었다. 이승만은 20개 사단에 더해 15개 사단의 추가 증설을 요구했다. 이 요구가 수용되지 않으면 이승만은 국군 단독으로 북진하여 통일을 이루겠다고 외쳤다.
미국 정부는 이승만의 군사적 행동을 막기 위해 닉슨 부통령을 한국에 파견했다. 닉슨 부통령은 이승만에게 "한국이 단독으로 북한을 공격하면 한국군은 참담한 패배 면치 못할 것"이란 메시지가 담긴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친서를 전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미국에 통고 없이 단독 행동을 취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미국 정부가 한국군 추가 증강에 대한 답을 미루자 이승만은 1954년 3월 중순, "한국은 통일을 위해 독자적인 행동을 취할 수도 있다"고 미국을 공격했다.
이승만이 집요하게 한국군 전력 증강을 요구하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밴 플리트 특사단을 한국에 파견, 한반도 군사정책에 대한 평가를 맡겼다. 이승만을 아버지처럼 존경하는 밴 플리트 특사는 한국 방문 후 "동아시아에서 미군을 철수해선 안 된다"며 한국군 추가 증강을 역설했다. 이 보고가 미국의 한반도 정책 전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밴 플리트 특사단의 보고서에 영향받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장기적 목표에 대한 수정작업을 지시했다. 이것이 NSC-170 문서로 정리되어 1954년 1월 8일, 미국 정부 정책으로 확정된다.
◆자신의 목숨 담보로 얻어낸 한미 합의의사록
미국 정부는 한국군 총규모를 67만 명으로 확정하고, 이의 실천을 위해 1954년 7월 한미 합의의사록을 작성했다. 이 합의의사록에 대한 최종 협상을 위해 미국 정부는 이 대통령을 1954년 7월 26일 국빈 초청했다. 네 차례에 걸친 한미 정상회담은 군사 문제가 주요 의제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는 내용이 담긴 합의의사록에 동의하지 않았다. 더 많은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이승만은 미국 정부를 압박했고, 이에 맞서 미국은 한국에 대한 석유공급 중단으로 맞섰다. 합의의사록이 협상되는 1954년 8월부터 11월까지 한미 간 갈등은 극에 달했다.
미국은 11월 8일 이승만이 자기주장을 고집하면 그의 제거를 포함한 일련의 비상조치를 또다시 검토했다. 제2의 에버레디 계획을 수립한 것이다. 미국으로부터 더 이상의 양보를 얻어내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11월 17일 오후 4시, 한미 합의의사록에 공식 조인했다. 같은 날 그와 동시에 워싱턴에서 양국 의회가 승인한 한미상호방위조약 비준서를 상호 교환함으로써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법적 효력이 발생하게 되었다.
합의의사록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미진했던 부분을 보완하는 의미가 중요하다. 즉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유엔군 사령관이 보유하는 조건으로 미국 육해공군이 대한민국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했다. 그리고 미군 1개 사단을 서울 북방에 배치하여 공산군의 재침 시 미군을 공격할 수밖에 없도록 배치했다. 이것이 인계철선 개념이다.
미국 법에는 해외 주둔 미군이 무력 공격을 받을 경우 미 의회의 승인 절차 없이 자동 개입하는 조항이 있다. 이처럼 미군 자동 개입의 근거를 확고히 함으로써 상호방위조약의 미비점을 보완한 것이다.
오늘날 전 국민이 향유하고 있는 한미동맹은 이처럼 한미 상호방위조약과 그로부터 1년여 후 체결된 한미 합의의사록에 의해 굳건한 토양을 다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1년이 넘는 상호방위조약·합의의사록 조인 과정은 굳건한 혈맹의 아름다운 시작이 아니라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승만의 미국을 상대로 한 혈투였다. 그러한 혈투의 결과 한국은 평화를 담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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