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후 3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비장한 목소리로 경북대생 2천여 명이 교문을 나섰습니다. '동포여 궐기하자 잃은 주권 찾기 위해'. 플래카드 아래로 김주열 군 모의 유해가 선두에 섰습니다. 혁명의 그날, 대구는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대구공고를 지나자 맞닥뜨린 무장 경찰. 평화행진 합의로 길을 튼 데모대는 동인로타리를 지나 대구역에서 중앙통(로)으로 기수를 틀었습니다. "정부는 마산 사건 책임져라." "민족 체면을 망치지 말라." 양복에 넥타이 핀까지, 대열은 진중했고 함성은 의연했습니다.
까까머리 꼬마부터 중년 시민까지 뒤를 따라 거리는 금세 거대한 물결을 이뤘습니다. 반월당, 남문시장을 돌아 다시 중앙통으로. 오후 4시 45분, 집결지 도청광장(경상감영공원)에 빼곡히 앉아 농성이 시작됐습니다. '…애국가, 교가, 구호 등을 높이 부르며 오임근 도지사의 ********…(檢閱畢).'(매일신문 1960년 4월 20일 자)
갑자기 신문 기사가 문드러졌습니다. 납 활자가 깍인 자국이 선명했습니다. 검열필(檢閱畢), 계엄군의 보도 검열로 지면마다 군데군데 휑하니 글자가 지워졌습니다. 입틀막에 사초(史草)가, 역사가 사라졌습니다.
그랬습니다. 농성하던 그 시각, 서울엔 총탄이 핑핑 날았습니다. 전날 고려대생 테러에 대학·고교생 수만 명이 뛰쳐나왔습니다. 최루탄, 물대포, 투석전에 공포탄이 난무하더니 급기야 경찰의 무차별 총격으로 사망자, 부상자가 속출했습니다. 부산, 광주까지 악화되자 이날 오후 5개 도시에 비상계엄령이 떨어졌습니다.
경대생이 해산한 중앙통엔 또 청구대(영남대 전신)생이 나섰습니다. 오후 7시 10분, 야간부 남녀 1천500여 명이 어둠과 비와 계엄으로 불안에 잠긴 밤거리를 하염없이 돌았습니다. 해산을 종용하는 헌병·경찰의 총부리, 최루탄, 몽둥이에 끌려가고 도망치고…. 오후 11시 20분, 6명의 연행 학생이 풀려나고서야 대구는 한숨을 돌렸습니다.
이튿날 오전 10시. 대구대(영남대 전신)생 500여 명이 대명동 교문을 나서 중앙통으로 진출하다 20여 명이 잡혀갔습니다. 경북대 의대생 200여 명도 동인로타리로 진출하다 원정 온 경찰에 이리저리 흩어졌습니다. 이날 중앙통은 종일 수많은 군중들로 어수선했습니다. "큰 길로 나오지 말고 들어가라!" 경찰 백차 마이크가 사라지자 흩어졌던 군중들이 다시 떼를 지었습니다.(동 신문 4월 21일 자)
"사망 115명(서울 97명·부산 11명·광주 7명), 부상 774명." 21일 계엄사령부 발표에 나라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19일 하루 만에 이 많은 사상자가…. 22일 이승만 대통령은 "동족 상살(相殺)의 참혹한 광경에 통곡하는 바이다" 며 눈물을 훔쳤습니다.
23일 재야인사 68명이 '정·부통령 하야, 3·15선거 무효, 재선거'를 촉구했습니다. 국무위원(10명) 전원 사퇴(21일), 장면 부통령 사임(23일), 이기붕 부통령 당선 사퇴(23일), 이 대통령 자유당 총재직 사임(24일). 그러나 민심은 요지부동. 백약이 무효했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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