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과 인성의 상징인 서예. 최근 유럽 등에서 K-컬처로 각광받는 움직임이 있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관심이 멀어지는 양상이어서 아쉬움을 드러내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한 때 자녀 교육의 이상적인 모델로 불리던 서예는 이제 서예가들의 고군분투로 맥을 이어가는 게 현실이다. 최근부터 대한민국의 대표적 서예단체인 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이하 국서련)를 이끌고 있는 경부 송종관 이사장은 "서예라는 장르는 국민 정서와 정체성에도 매우 관련이 깊다"라며 "정서와 정체성이 무너지면 인성이 무너지고, 인성이 무너지면 국가도 무너지기 쉽다. 때문에 서예가들은 열렬한 애국자이기도 하다"고 사명감을 강조했다. 총선을 앞두고 정치 현실과 관련해선 "어른으로써 참으로 창피하다. 정치인은 특히 도덕성과 인품을 갖추어 만백성의 표본이 되어야 한다고 배웠다"라며 인성부터 갖추라고 질타했다.
-국제서법예술연합 이사장에 취임했다. 성품으로 보아 내키지 않았을듯한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나?
▶사실 더 이상 사회의 직책을 맡을 마음이 없었다. 그냥 시간이 나면 책이나 읽고, 글씨 공부나 더하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 이사장님이신 초정 권창륜 선생이 작고하시는 바람에 새 이사장을 선택해야만 하는 기로에 놓이게 됐다. 이때 동료로부터 '침잠된 국서련을 경부가 맡아 굳건하게 재건해 달라'는 간절한 부탁을 받았다. 그렇지만 맡을 사람이 있겠지 하고 사양을 했다. 그러나 동료의 부탁이 너무 간절했다. 결국 이사장 선거에 참여했는 데 95% 넘게 찬성하시더라. 어쩔 수 없이 국서련의 내일을 위해 총력을 기우리는 일을 떠안게 됐다.
-어떤 단체인가?
▶국제 서예가들의 모임이다. 1977년 3월 18일 여초 김응현 선생을 비롯한 당시의 저명한 한국서예가들이 국제서도연맹이라는 명칭으로 시작됐다. 그 후 1989년 12월 12일 법인 설립허가를 받았고 이를 기념해 국제서법예술연합전을 12월 8일부터 22일까지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한국을 비롯해 싱가폴과 중국·대만·홍콩·일본 등 320명의 작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했다. 이 때 저도 함께 뛰어들기 시작했다. 1990년 1월에 현재의 명칭으로 개명해 재발족을 했다. 이때 초대 이사장으로 김응현 선생이 취임했고, 1998년 2대 이사장으로 김서봉 선생이, 2002년 3대 이사장으로 권창륜 선생이 취임하셔서 2023년 까지 거의 21년여 동안 맡아 오시다 작고하셨다. 이제 제가 이 중책을 맡게 됐다.
-다른 근황을 들려달라. 최근 대구에 갔다는 보도가 있었다.
▶주요 활동목적은 국제적 서예교류를 통해 서법예술을 더욱 발전시켜보자는데 그 의의가 있다. 처음 7개국이던 게 이제 30개국 가까이 늘어 각국을 격년으로 순회하며 회원전을 10여회 했다. 다만, 안타깝게도 코로나19로 중국은 답보 상태에 있다. 그러나 국서련은 그동안 꾸준히 발전해 전국에 대경(대구경북)을 포함 6개 지부가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본부와 지부는 각각의 나름대로 국내외적으로 부단한 창작활동에 참여해오면서 후배양성과 서예발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주요 사업은 후배 양성 차원의 휘호대회나 회원들의 발전을 위한 회원전, 소규모의 국제전을 각 지회와 협조해 끊임없이 개최하고 있다. 이런 행사의 일환으로 지난 3월 대구에 다녀왔다. 대구경북지회장이신 김시현 선생의 개인전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김 선생은 권시환 선생의 뒤를 이은 지회장으로 훌륭한 철학 사상과 창작 정신을 실천적으로 보여주는 작가 아닌가. 게다가 그는 병마와 수년간 싸워 이기신 분이다. 그래서 이번 그의 작품전 이름을 '又生展(우생전)'이라 했다고 한다. 다시 세상에 태어나 새로운 서예 작품을 선보인다는 의미로 알고 있다. 그래서 제가 김 선생께 더욱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살아 좋은 작품을 하시라는 의미를 담아 초서로 생기발랄하게 '又生長壽(우생장수)'라 서명을 하고 왔다. 하하.
-서예관을 듣고 싶다.
▶서예관이라고까지 하기는 좀 부끄럽네. 그렇지만 작가로서 지향점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몇 년 전부터 저의 마음을 정리해 봤다. 곧 '솔직한 마음으로 圓融無礙(원융무애)'한 작품성을 표현해 보고자 한 거다. 이 마음은 제가 우연하게 바닷가에 작은 미술관을 짓고 오가는 사람들과 교감하며 아침마다 보는 바다에서 많은 영감을 얻게 된데서 비롯됐다. 바다는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면서 항상 그 자리에 있고, 좋은 것 싫은 것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포용하지만 가끔은 거칠게 화를 내기도 한다. 여기서 '率直淡白(솔직담백)과 圓融無礙'의 의미를 더욱 이해해 보고자 했다. 그래서 저의 서예관도 이를 마음에 기준삼아 정진해 보고자 한 세월이 이제 꽤 된 듯하다. 하지만 아직 이렇게 말씀드리기에는 부끄럽다. 목표를 향해 더욱 정진하겠다.
-왜 한국은 서예, 중국은 서법, 일본은 서도라고 하나?
▶똑 같은 서예를 중국은 書法(서법), 일본은 書道(서도), 한국은 書藝(서예)라고 부른다. 이는 별다른 의미를 부여해서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각국이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 하였을 뿐이지 결국은 법·도·예가 하나라고 한다. 즉 서예는 기능적인 부분이 많이 작용하지만 이를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다. 올바른 마음을 본으로 삼아 수양정진하자는 의미가 들어 있다고 본다. 그렇게 보면 글자만 다를 뿐이지 내용은 한 가지 '人性修養(인성수양)'이다. 그래서 다른 예술, 즉 그림이나 음악과 달리 '人品(인품)'을 중시하기에 서예에서도 '書品(서품)'이라 부르지 않나. 제 아무리 예술성이 강조되는 시대라 하더라도 인품 없이는 서품을 논할 수 없기 때문에 일반 예술과는 차별화 되어야 한다고 저는 믿는다. 특히 요즘 서예를 즐기시는 분들은 이를 더욱 마음에 새겼으면 한다. 무분별하게 예술이라는 미명아래 붓만 휘두른다고 서품이 되는 게 아니다. 특히 중요한 점은 우리나라는 우리자신의 글자가 있다는 거다. 물론 한자도 포함된다. 한자를 무턱대고 외래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한자가 없으면 한글도 없다. 한자를 알아야 한글을 연구하고 고전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 또한 한글 서예를 좋아한다. 한글 서예를 더 알기 위해 한문 서예를 전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아가 한글에 한자로 주를 달고 한문에 한글로 주를 다는 걸 환영한다. 다만, 이들의 서체나 결구·장법이 잘 어울리도록 해야 한다. 이 중에 특히 우리는 중심적인 글자는 한글로 쓰고 주를 한문으로 쓰는 작품 구성을 권하고 싶다. 저도 가끔 이런 작품을 한다. 그렇게 하면 해외, 특히 중국 계통의 나라에 가서 전시를 할 경우 내용 설명이 필요 없다. 제가 일차적으로 실험을 해 봤다. 중국인들은 한글을 모르니까 내용이 무어냐고 물으면 한자로 쓴 게 한글의 내용이라 하니 쉽게 설명이 되더라. 안 그래도 세계적으로 우수한 글자로 한글이 인정받고 있지만 이렇게 작품 구성을 해서 우리 한글을 세계에 알리면 금상첨화가 될 거다.
-서예가로서 일상은?
▶한 마디로 이제 밥 굶는 일은 면했다. 그렇다면 못 다한 서예공부를 실컷 하고 싶다. 그래서 지금은 아침운동을 마치고 나면 바닷가를 가볍게 산책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이때에 그날 바다의 마음을 생각해 보곤 한다. 바다는 똑 같은 바다지만 바다의 마음 또한 매일 같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은 한결같은 것은 바다라는 거다. 이를 관찰하면서 이 바다의 마음을 붓으로 어떻게 종이에 옮길 것인지 상상해 본다. 서실에 들어가 이 마음이 식기 전에 붓을 시험해 본다. 어떤 날은 신나게 잘 되는 것도 같고, 어떤 날은 내가 이렇게도 재주가 없나 탓해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정진해 온 날 들이 아까워 놓지도 못한다. 그렇게 희망과 절망이 교차 되는 순간 무엇인가를 깨우치게 된다. 아, 이것이 도인들이 깨우친다는 의미구나. 깨우친다는 의미를 이제야 이해할 듯하다. 그래서 다시보고 또 보고, 연습에 연습을 하다보면 또 하나 깨우쳐 진다. 결국 정진을 열심히 하면 얻어진다는 결론을 얻었다. 나 같은 둔재도 뭔가 깨우쳐 알게 되고 붓 끝에 앎이 전달된다는 사실을! 그래요. 요즘은 이 알아간다는 게 너무나 즐겁다. 그런데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 너무 늦게 깨우쳤나! 아니지 지금이라도 참 다행이다. 무언가 알았다는 사실이. 분명 서예 속에는 인생이 있고, 철학이 있고, 깨우침이 있다고 여겨진다. 그래서인지 이제야 점점 어른들의 철학서가 손에 자주 잡힌다.
-계획이 있다면.
▶삶이 힘들어 개인 연구발표회 한지가 꽤 오래 됐다. 아직 힘 있을 때 더 연구해 가까운 시일 내 전시회를 해보겠다. 그리고 맡은 임무를 하늘에서 주신 기회라 여겨 국서련이 후배들에게 신나는 서예연구 단체가 되도록 노력해 보고자 한다.
-후학에게 하고 싶은 말은?
▶사실 요즘은 후학이 가외(後學可畏)라고 했듯이 젊은 서학도들이 공부로 말하면 더욱 열심히 하는 것 같다. 일단 받아들이는 감수성이 제가 어릴 때 와는 다르다. 교재나 정보가 과거 보다 얻기 쉬워서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생각이 더 명석한 듯 하다. 그러다 보니 지나친 현실주의에 빠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분명하게 말하면 서법예술은 일반 다른 예술과 다른 점이 마음이라고 말씀 드렸다. 즉, 기능과 마음의 조화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서예 정진에 임했으면 한다. 아무리 세월이 변해도 이 서법 정신만은 변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곧 서예가는 서예가이어야 한다. 성공하기에 먼 길이지만 깨우치고 나면 잘 견뎌왔다는 자부심이 생길 거다. 게을리 해서도 안 되지만 급하게 서두른다고 빨리 깨우쳐 지는 게 아니더라. 부단히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다 보면 깨우쳐 진다. 이 점은 보여 줄 수도, 손에 쥐어 줄 수도 없다. 오로지 본인 스스로의 책임이다. 단 한 가지 즐거움이 있다면 인생을 한번 걸어 봐도 헛된 길이 안 될 거라고 말하고 싶다. 어렵다고 포기하지 말고 정진해 줬으면 한다. 꼭 보답이 있을 거다. 제가 인생이 꼭 돈 만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세상이 어지럽다. 선거도 곧 있다. 무슨 글로 경종을 울리고 싶나?
▶오늘의 정치 현실은 어른으로써 참으로 창피하기 그지없다. 정치인은 특히 도덕성과 인품을 갖추어 만백성의 표본이 되어야 한다고 배웠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서 벌을 내린다고 고전에 쓰여 있다. 이 고전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어떻게 징역형을 받은 사람이 정당을 만들어 정치를 한다고 나서나? 어떻게 그 많은 의혹에 휩싸인 사람이 나서서 백성을 훈계 하나? 참으로 암담한 오늘의 한국 현실 정치이다. '정치인들이여! 제발 사람이면 사람이 지니어야 할 인성을 가집시다'라고 외치고 싶다. 인생을 짐승으로 살 것인가. 인간으로 살 것인가. 제발 인간이 인간다운 아름다운 본성을 찾자.
-매일신문 서예대전과의 인연도 궁금하다.
▶그러고 보니 매일신문과는 인연이 꽤 오래 됐다. 20여 년 전 매일신문 서예대전 심사를 맡았었는데, 지난해 또 심사를 했다. 어려운 현실을 뒤로 하고 한국 서예의 발전을 위해 꾸준히 서예대전을 개최하시는 매일신문 관계자 여러분에게 이 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더욱 발전하도록 서예대전에 많은 힘 실어 주시기 바란다.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렵지만 언론에서 서예에 대한 관심을 더 많이 주셨으면 한다. 서예라는 장르는 국민 정서와 정체성과도 매우 관련이 깊다. 국가나 국가를 이끌어 가는 언론에서는 인기 예술 장르와 달리 재미가 없어 사업이 잘 안 되더라도 서예는 꼭 살려야 한다. 국민 정서와 정체성은 국가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경제, 경제하지만 정서와 정체성이 무너지면 인성이 무너지고, 인성이 무너지면 국가도 무너지기 쉽다. 때문에 서예가들은 열렬한 애국자이기도 하다.
◆국제서법예술연합과 송종관
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는 여초 김응현‧김서봉‧초정 권창륜 선생 등 한국 서단의 대가가 이끌어왔다. 직전 이사장인 초정 권창륜 선생은 광복 후 한국 서단의 1.5세대 서예가였다. 한마디로 명불허전이었다. 여초 선생 등이 떠나면서 한국 서예 1세대가 마감됐고, 이후 초정은 1.5세대로서 한국 서단에 새로운 원로로 자리매김한다. 운현궁 현판과 청와대 춘추문‧인수문 현판 글씨도 그가 썼다. 이제 경부 송종관 선생이 그 역할을 맡게 됐다.
경부는 30대 초반 서울로 올라와 본격적으로 서예가의 길을 걷는다. 스승이 당대 최고인 일중 김충현 선생과 초정 선생이다. 지천명에 대학 서예과에 진학했고, 한양대에서 논문 '조맹부의 송설체와 한국 서예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학구파이자 이론가다.
제1회 서화아트페어 최우수작가상을 수상했고,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부문 심사위원장‧2015년 부산서예비엔날레 총감독 등을 역임했다. 동방대학원대학교 문화예술콘텐츠연구소 책임학술연구원과 학술지 '무심연묵' 발행인이라는 직함에서 보듯 학문적 성취를 이뤘다. 처가인 삼척에 송종관미술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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