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선점하려는 주요국들의 경쟁이 치열하다. 열기가 가장 뜨거운 곳은 21세기 경제·군사 인프라의 핵심이자 국가 전략 자산인 반도체이다. 중국이 반도체 자립을 목표로 2015년부터 2025년까지 1천432억달러(1조위안·약 187조원)를 쏟아붓자, 미국은 2년 전 527억달러(약 71조원) 지원을 골자로 한 반도체법으로 응수했다.
그러자 일본과 유럽연합(EU), 인도, 네덜란드, 대만까지 자국 내 반도체 산업 육성에 나서면서 사상 초유의 반도체 세계대전이 펼쳐지고 있다. 7개국 정부가 집행할 보조금과 저리 대출금을 합하면 3천억달러(약 405조원)에 육박한다. 2021년부터 각국 기업이 미국 내 반도체 공장 신·증설을 위해 약속한 투자금만 3천506억달러(약 473조원)가 넘는다.
반도체는 우리나라 수출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성장 엔진이자 생명줄이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에서 30년 넘게 세계 1위이다. 그동안 반도체 공급을 한국에 의존해 온 미국·일본이 설계와 소재·장비, 첨단 제품 생산까지 반도체 전(全) 부문 공급망을 자국에 구축하는 일은 5, 6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다. 영원할 줄 알았던 한국의 반도체 패권(覇權)이 미국·일본·중국·유럽 등 사방에서 공격받는 형국이다.
한국 경제의 근간인 반도체 산업이 흔들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반도체 경기가 부진했던 지난해가 생생한 예고편이다. 작년도 한국의 성장률(1.4%)은 경제 규모가 2.5배 차이 나는 일본(1.9%)은 물론 15배 정도 큰 미국(2.5%)보다 낮은 수준으로 주저앉았다. 올 들어 시가총액 기준으로 대만 증시가 21년 만에 최대 격차로 한국 증시를 능가한 원동력도 대만의 반도체 경쟁력에 있다.
대만은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기업인 TSMC를 필두로 설계부터 파운드리, 서버 제조까지 AI 반도체 공급 생태계를 완비한 반면,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에 편중돼 있다. 지금 짓기 시작한 각국의 반도체 공장이 3~5년 후 본격 가동하면, 한국에 미칠 후폭풍은 더 커질 수 있다. 반도체가 곧 최고의 안보 자산인 시대에서 각국의 '탈(脫)코리아'는 한국의 전략적 가치 자체를 소멸시킬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런 위기 돌파를 위해 최근 "반도체 경쟁은 전시 상황에 맞먹는 국가 총력전"이라며 "2027년까지 9조4천억원을 투자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10조원 남짓한 자금으로 반도체 패권을 지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기업과 정부, 학계가 협력해 자금과 인재를 적시에 투입해 초격차 기술과 생태계 조성에 박차를 가하는 것은 기본 중 기본일 뿐이다.
더 중요한 일은 국제적 역학 관계의 산물이라는 반도체 산업의 속성을 감안한 높고 큰 차원의 접근이다. 1950년대 미국에서 태동한 반도체 산업은 1970년대부터 일본이 시장을 주도했으나, 1980년대 미국이 일본 반도체를 견제하면서 생긴 틈을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낚아챘고 이후 한국이 주도권을 잡아 2010년대까지 독주할 수 있었다. 반도체 산업 특유의 지정학적 흐름을 타야 한다는 말이다. 이미 수년 전부터 미국·일본·대만 간 반도체 3국 동맹이 공고해지는 가운데, 한국만 홀로 소외되는 양상이다.
그런 측면에서 미·중 전략 경쟁과 AI 시대 도래라는 큰 판의 변화를 정확하게 읽고 미국과의 전방위 밀착으로 안보·경제적 실익을 챙기는 일본의 행보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일본은 '안보도 미국, 경제도 미국'이란 안미경미 전략으로 반도체 굴기에 속도를 내면서 30년 만의 국가 대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 반도체와 경제가 살려면 역설적으로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몸값, 즉 전략적 가치를 높여야 한다. 가난한 대한민국을 일으키고 키워준 세계 자유 민주 진영에 책임 있는 주권 국가로서 적극 기여하고 참여해야 한다. 미국의 아·태 동맹국 중 남중국해 '항행의 자유 작전'에 10년째 불참하는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다. 자국 이익만 챙기는 나라에 미래 먹거리와 기회는 없다. 4·10 총선에서 뽑힌 정치인과 리더들부터 눈을 떠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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