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재목의 철학이야기] ‘다시 시작이다’의 의미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이제 다시 시작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을 말이리라. 지난날의 언짢음과 허물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 출발을 하고 싶을 때가 왜 없을까. 목욕한 뒤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고픈 심정처럼, 실패를 딛고 일어서거나 새 사업의 첫발을 내딛거나, 시작은 항상 지난 시간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시작(始作)'이란 '처음으로 일어나다/하다'는 뜻이다. 동양의 주요 고전인 『논어』나 『장자』 같은 데에 나오는 오래된 개념이다. '시(始)' 자는 '개시' '창시'라는 말에 끼이듯이 새로 열리고 비롯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작(作)' 자는 '작심'(作心: 마음을 단단히 먹음)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행동을 수반한 의식의 변화를 말한다. 이렇듯 이전과 다른 어떤 질적인 차이를 보이는 것이 '시'와 '작'의 의미이다.

시작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먼저 '천지창조'처럼 기원적・절대적인 의미이다. 다음으로 '하루의 시작'처럼 일상적・상대적인 의미이다. 대개 전자는 서양의 기독교적 관점에서, 후자는 동양적 관점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기독교에서는 모든 것이 신(God)에서 기원한다고 본다. 따라서 신에서 시작한 것 외에 또 다른 새로운 출발이란 허용될 수 없다. 신이 창조한 세계 이후에 특별한 또 다른 시작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당연히 지상의 모든 것들은 신의 섭리 안에서 일시적, 가변적, 세속적인 것으로서 반복되는 사태일 뿐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만일 있다면 오류나 실수 같은 것이리라.

이에 반해 절대적 유일신이란 관념이 희박한 동양에서는 모든 것이 스스로 혹은 저절로 생성, 변화, 소멸의 순환을 겪는 일상이라 본다. 새로 시작하는 일이든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는 일이든, 궁극적으로는 시작도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 속의 분절화일 뿐이다. 대나무의 마디처럼 무한 시간 속에 봄과 가을이 있고, 삶과 죽음이 존재한다. "끝도 시작도 없이…"

언제 어디서나 시작되는 일들은 이전과는 다른 차이를 보이며 지속하는 것!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흥미진진한 것들도 웅크리고 있다. 어떤 일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새로운 길이 트인다는 '궁즉통'(窮卽通)의 희망 같은 것이다. 비록 대박이 아닐지라도 좋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듯, 애환의 교차 속에 삶은 마냥 지루하지만은 않다.

『대학』이란 책에서는 "사물[物]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사건[事]에는 마침과 시작이 있다"고 했다. 모든 물건에는 '근본과 말단'이라는 것, 즉 뿌리나 지엽, 본질과 현상이 있다는데 일단 수긍한다. 그런데 인간의 행위로 펼쳐지는 사건에는 시작과 마침이라 하지 않고 하필 '마침과 시작'이 있다고 했을까? 생각해 보면 마침과 시작이란 어법이 맞다.

왜냐하면 일이 새로 시작되려면 하던 일이 끝나야 하기 때문이다. 봄이 오려면 겨울이 끝나야 하고, 저녁이 오려면 낮이 끝나야 한다. 하기사 일벌레가 된 농사꾼들이 흔히 내뱉는 "죽어야 끝나지…"라는 말도 있다. 매년 순환되는 농사일에 끝이 없는데, 언제 끝나냐고? 사실 어떤 한 가지 일에 매몰돼 있다면 사실 그 일이 언제 끝날지를 모른다. 그것을 끝내지 않고서 다른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을까. 없다. 마침이 먼저이고, 시작은 그다음이다.

어릴 적 내가 산비탈 밭을 매던 할머니 곁에서 자주 들었던 노랫말이 있다. "청천 하늘에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에 수심도 많다∼" 생각해 보면 의미심장하다. '수심'이 '잔별'이라니! 누구나 품고 살아갈 흔하디흔한 번민을 저 하늘에 반짝대는 잔별로 변환시켜 일상의 험한 주름을 넘어서던 탁월한 큰 은유를 만난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라는 외침의 또 다른 일상적 표현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거대한 이야기보다 이런 소확행(소소하나 확실한 행복)의 자투리 언어에서 삶을 따숩게 살아가는 맛, 새로운 시작의 멋스런 다짐을 발견한다.

인간은 무한의 시간 속에서 자신이 선호하는 시간을 분절화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려 한다. 생일이 그렇고 결혼기념일이 그렇다. 모든 기념은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는' 원점이다. 결국 그것은 추상적 이야기를 자기화, 신체화하는 일이다.

대개 삶의 공부는 흐르는 시간을 자기 몸의 살과 관절의 감각으로 바꾸어 살아내는 훈련이다. 『논어』 첫 구절에선 "배우고 '때맞춰' 이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했다. '가끔'도 '아무 때'도 아니다. '딱 좋은 때'에 맞춰 배운 것을 익히라고 했다. 배운 것을 실습할 때(타이밍)를 찾아 반복함으로써 공부가 자기 몸에 딱 달라붙도록 하라는 말이다.

그러는 가운데 수많은 끝과 시작이 점멸하리라. 문제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초심을 잃고, 마음의 매듭을 놓치기 쉽다는 점에 있다. 처음 먹었던 마음의 첫 마디를 느슨해진 때에 맞춰 거듭 확인하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 했다. 시작보다 그것을 지켜내고 마무리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꽃자리처럼 너저분 흐트러진 마음자리를 알아차리고, 꽃 피우려던 그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려는' 다짐이 어쩌면 인생의 가장 기본 공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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