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12일은 20대 총선 투표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이날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직접 주재, 국회를 향해 호통을 쳤다. 총선 국면 내내 주장한 '국회 심판론'이었다. 그는 "정부가 역점을 두고 추진했던 노동 개혁 법안 등이 국회에 번번이 가로막히는 현실을 보면서 국민과 기업들은 가슴이 미어질 것"이라면서 국회, 아니 야당을 맹공했다.
박 대통령이 마이크를 직접 쥐었지만 여당 새누리당은 122석을 얻는 데 그치면서 더불어민주당(123석)·국민의당(38석) 등 야권에 크게 밀렸다. 국회 심판론은 먹히지 않았고 정권 심판론이 가동됐다. 2012년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19대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고 대통령 취임 이후 치러진 4번의 국회의원 재·보선에서 전승을 기록했던 선거의 여왕 박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여왕은 체면을 구겼다.
2016년 총선을 소환한 것은 이번 총선에서도 참패한 국민의힘의 고질병 '과거 망각증'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민의힘은 여당이고 대통령이라는 강력한 구심점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8년 전 야권은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분열, 야권 표심은 혼란을 겪고 있었다. 지금 야당도 사법 리스크를 가진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방탄 공천이라는 비난에 시달리면서까지 이른바 친명(親明) 공천을 하면서 탈당에다 분당까지 일어났다. 여당으로서는 조건이 결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8년 전이나 지금이나 표심은 최고 권력자를 파고들었다. 박 대통령이 표를 잃은 것은 불통·독선이라는 지적 때문이었고 윤석열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인은 머리를 숙이는 게 숙명인데 두 사람은 이를 잠시 잊어버렸다. 대통령과 여당이 민심을 읽지 못하자 8년 전이나 지금이나 보수 핵심 지지층조차 실망했고 대구경북의 전국 최하위권 투표율이 말해 주듯 투표장에 입장하지 않는 퇴장 유권자가 보수 지지층에서 쏟아져 나왔다.
시행착오가 많았지만 우리 민주주의가 성숙해 가면서 정치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눈높이는 무한 상승 중이다. 8년 전이나 지금이나 국민들은 대통령의 헌신적인 봉사 의지를 잘 안다. 하지만 그 표현 방식이 억압적이고, 고압적이고, 일방적이라면 대통령의 진의는 왜곡되고 국민들은 주권자에게 덤벼드는 것으로 오인할 수 있다. 지금 여당의 전·현직 대통령은 이러한 국민의 뜻,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주권자가 표를 통해 투사하는 '국민의 힘'을 놓쳐 버렸다. 민주주의는 지배자가 아닌 통치자가 존재할 뿐이며 특히 공고화 단계의 민주주의는 통치 집단의 기본 덕목으로 겸손과 절제까지 주문하고 있다. 이 흐름을 지금의 여당이 또 잊어버린 채 망각의 강에서 허우적거리면 선거 패배 전문 정당이 될 뿐이다.
빈곤한 기억력을 탓하고 여권의 구심점인 대통령 흉보는 데 몰두하면서 여권이 패배감에만 사로잡혀 있을 필요는 없다. 윤 대통령도 16일 더 낮은 모습을 다짐하며 심기일전의 자세를 보였다. 민주주의는 피치자와 통치자가 선거 경쟁을 통해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는 가역적 체제다. 2016년 총선·2017년 대선·2018년 지선·2020년 총선 등 전국 단위 선거에서 4번 연속 참패하면서 절망의 늪에 빠졌던 국민의힘이었다. 그랬다가 절치부심 끝에 2021년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에 이어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를 연거푸 승리로 일궈 냈던 영광의 기억조차 설마 새까맣게 잊어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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