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번개를 보면서도 삶이 한순간인 걸 모르다니.' 문학관 휴관일인 월요일마다 아트센터 달에서 진행하는 인문학 수업에 마쓰오 바쇼(松尾 芭蕉)의 하이쿠(俳句, 3행, 5·7·5음절로 된 짧은 시) 몇 편을 준비하며 오사카를 떠올린다.
히메지문학관 탐방, 쇼쇼인(正倉院) 유물 전시,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쾌락의 정원 전시, 겐지모노가타리박물관 재개관 전시, 교토 도시샤대학 윤동주, 정지용 시비 참배 등 팬데믹 전 나는 틈만 나면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오사카를 드나들었다.
왜 괌이나 도쿄가 아니고 오사카를 그렇게 드나들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네팔이나 티벳 등 오지를 오가며 글을 쓰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어떤 소설가의 말이 또 떠오른다. 대구에서 슬리퍼를 끌고 집을 나와서도 갈 수 있는 곳이 오사카 아니오, 하하하.
그러고 보니 그렇다. 곳곳에 임대 패찰이 붙은 채 텅 비어가는 대구 도심이 안타깝고 문득 군중에 떠밀리듯 걷는 도시의 복잡이 그리울 때 나는 오사카로 떠났던 듯하다. 물론 여럿이 함께 할 때도 많았지만 대부분 혼자 주택가 인근 호텔을 예약해 대구가 엄청나게 그리워질 때까지 오사카, 나라, 교토, 우지, 히메지, 구라사키 등 곳곳을 돌아다녔던 것이다.
◆오사카국립국제미술관
오사카에 도착하면 나는 늘 오사카국립국제미술관부터 들른다. 미술관은 대나무를 형상화했다는 거대한 철제 설치작품과 타원형 유리지붕 4층 건물 시립과학관 지하에 있다. 처음엔 다소 생경스럽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유리지붕을 통과한 햇빛이 알렉산더 칼더의 대형 빨간 모빌(움직이는 날개, 1962)에 내려앉고 역시 거대한 호안 미로의 세라믹 작품(무구의 웃음, 1969)도 환히 비추는 로비와 회랑이 있다.
원래 1970년 오사카만국박람회장을 미술관으로 사용하다가 2004년 이곳 나카노시마로 이전했다고. 지하 3개층 전시실 모두 항온, 항습이 완벽하다는 '완전 지하형 미술관'이다. 일본 최대 규모로 1945년 이후 국내외 현대미술 작품 약 7,800점을 소장하고 있다. 나는 브뤼헬의 바벨탑, 프랑스 신인상파, 클림트와 실레 등을 몇 번 드나들며 봤다.
사실 전시된 그림들 대부분 여러 미술관에서 본 것들이었지만 보스의 '쾌락의 정원'을 여기서 처음 봤을 땐 정말 숨이 턱 막혔다. 관람객 일행에 섞여 쪽걸음을 걸으며 떠밀리듯 그림 앞에 서서 '대여 보험료만 해도 엄청날 텐데.'를 속물스럽게 중얼댔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곳까지 와 그림을 보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나 일본이란 나라에 대한 일말의 질투였을 것이다.
오사카는 일본에서 외국인 관광객이 가장 많이 방문한 도시다. 게다가 국립국제미술관 바로 옆에 오사카시 출연 재단과 민간이 공동 운영하는 현대미술작품을 대거 소장한 나카노시마미술관이 2022년 개관되었다. 그 미술관은 벌써 레스토랑 운영으로 흑자를 내고, 현재 마네 기획전시로 대성황이라는데 오사카가 또 도쿄를 뛰어넘었다며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고 한다. 지방 문화예술행정자치가 이것인가 싶어 한없이 부럽기만 하다.
◆가미가타 우키요에관(上方浮世絵館)
에도(江戶)시대 중기인 1794년 5월, 일본 우키요에(浮世繪) 화단에 혜성처럼 나타나 10개월 동안 145점의 걸작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화가 도슈샤이 샤라쿠가 있다. 마침 연풍 현감으로 가 있던 김홍도의 그 무렵 기록이 전무한 것을 가설로 작가 이영희가 '또 한 사람의 샤라쿠'를 썼다. 정조의 어명으로 일본의 생활상을 그려 온 스파이로 김홍도가 파견되었을 거란 주장이었다.
그 근거로 작가는 그림에 담긴 한시가 일본어가 아니라 이두식 해석으로만 가능하다는 것과 김홍도의 호 단원(檀園)도 이두로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또 손가락 표현에 서툰 거스트만 증후군을 앓던 김홍도의 특징이 그의 그림에도 남아있고 붓끝이 꺾여 올라가는 필체도 흡사하다고 작가는 주장한다. 물론 일본 측의 주장은 다르다. 미스테리한 그 샤라쿠가 사이토 주로베에라 불리던 당시 배우라는데 일본들의 역사 왜곡이 어디 한두 번이어야 믿지. 당대에는 철저히 외면받던 그의 작품이 지금은 걸작으로 평가된다니 나는 자꾸 김홍도라 믿고 싶어진다.
오사카 도톤보리(道頓堀) 골목 안쪽에는 세계에서 유일한 우키요에미술관이 있다. 가미가타 우키요에관이다. 귀엽고 거대한 흰 고양이 타일이 외벽에 붙어 있어 젊은 외국관광객들이 그 앞에서 사진 찍기에 여념 없다. 1층은 아트 샵이고 2층에 올라가면 횟집마다 거의 어김없이 걸린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가나와해변의 높은 파도' '개풍쾌청 붉은 후지산', 기타가와 우타마로의 '간사이 시대의 세 미녀' 도슈샤이 샤라쿠의 '배우 오타니 오니지'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도카이도의 53경치' 등 50여 점의 간사이와 에도 다색목판화가 전시되어 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로 수출된 도자기 포장지로 사용된 이 판화들이 고흐, 마네, 드가, 카사트, 보나르, 부에야루, 로트렉, 세잔, 고갱 등 신인상파 화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드뷔시가 호쿠사이의 그림에 영감을 받아 교향시 '바다'를 작곡하고 1905년에 출판된 총보의 표지로 '가나와해변의 높은 파도'를 쓰기도 했다. 도자기보다 포장지였던 우키요에 판화가 훨씬 더 높은 값에 거래되기도 했고 고흐의 '우체부 탕기'나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에 모사된 우키요에를 보면 일본인들의 신인상파 광풍도 이해된다.
◆호젠지(法善寺), 쇼치쿠자(松竹座)
오사카를 떠올리면 마라톤을 하는 글리코씨와 신사이바시 등의 상가, 음식점, 유흥가를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도심 곳곳엔 숨어있는 명소가 많다. 우키요에관을 끼고 골목 하나를 지나가면 묘지가 있고 그 맞은편에 고찰(古刹) 호젠지(法善寺)가 있다. 주불은 아미타여래이며 우지에서 개창한 정토종 사찰인데 약 400년 전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라 한다. 상업도시 오사카답게 여기 향을 올리고 기도를 하면 부자가 된다는 속설이 있다.
글리코씨 전광판 뒤쪽 난바역 가는 골목엔 가부키(歌舞伎) 극장 쇼치쿠자(松竹座)가 있다. 가부키는 17세기부터 시작된 일본의 전통 연극으로 에도시대 대표적 유흥거리였다. 우리에게 비속어로 여겨지는 '쌈마이(삼류)'라든가 '18번(애창곡)' 등은 가부키에서 유래되었다. 몇 년 전 엄청난 호기심으로 쇼치쿠자에서 공연을 관람한 적이 있는데 입장료가 무척 비쌌다는 것과 벽에 커다랗게 붙어 있던 샤라쿠의 '배우 오타니 오니지' 그리고 자꾸 내게 무언가를 묻던 노인들 기억만 가뭇하다.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1975년 한국과 중국 도자기 약 1,000점을 소유한 아타카(安宅)산업에 경영위기가 왔다. 최대 채권자였던 스미토모은행은 일본문화청의 '해외로 유출해서는 안 된다는 이례적인 요망'을 받아들여 도자기들을 모두 오사카시에 기증해 1982년 11월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이 건립되었다. 개관 후 기증이 이어졌고, 초대 일본 오사카총영사였던 이병창(李秉昌, 1915~2005) 박사도 한국 도자기 301점을 기증했다.
도자미술관에 갈 때마다 입구의 신라 부처 입상과 정말 아름다운 우리 도자기에 붙은 '기증 이병창'이란 패찰을 보며 얄궂은 감정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최근 그의 딸이 한 인터뷰를 보고는 누그러졌다. '파친코, 야키니쿠, 냉면… 아버지는 한국이 일본에서 그런 이미지로 굳어지는 걸 원하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한국 도자기를 일평생 사 모으셨습니다.' 멋진 복수다. 고국에 기증 의사를 밝혔으나 국보급만 보내라는 것과 그나마 기증품마저 보여주지 않는 것에 몹시 서운해했으나 끝내 그가 국적을 바꾸지 않았다는 말도 뭉클하다.
팬데믹 2년 동안 리모델링을 한 일본동양도자미술관이 재개관 특별전으로 이병창 박사가 기증한 도자기 가운데 73점을 전시한다고 한다. 올 가을에 오사카를 가볼 수 있으면 꼭 들러 잠시나마 그때 가졌던 그 얄궂은 감정을 고인에게 진심을 다해 사과드려야겠다. '여행길에 병드니 황량한 들녘 저 편을 꿈은 헤매는도다' 태어난 고향 탓에 닌자 스파이로 오해받았다던 마쓰오 바쇼가 1694년 유랑길 오사카에서 죽기 나흘 전에 지은 하이쿠다.
시인 박미영
댓글 많은 뉴스
윤석열 '탄핵소추안' 초안 공개…조국 "尹 정권 조기 종식"
尹 회견때 무슨 사과인지 묻는 기자에 대통령실 "무례하다"
"촉법인데 어쩌라고"…초등생 폭행하고 담배로 지진 중학생들
"삼성 입사했는데 샤오미된 꼴"…동덕여대 재학생 인터뷰 갑론을박
스타벅스도 없어졌다…추락하는 구미 구도심 상권 해결방안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