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위대한 용기, 위대한 보살핌

안나여 저게 코츠뷰의 불빛이다
우에무라 나오미 지음 / 한빛비즈 펴냄

영화평론가 백정우

1976년 5월 7일. 그는 종착지 14킬로미터를 앞두고 마지막 텐트를 친다.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갈수도 있는 거리였지만, 코츠뷰의 불빛을 본 순간 마음이 바뀐 것. 그날 일기에는 "오늘밤은 지나온 시간들을 회상하며 텐트 안에서 밤새도록 저 불빛을 바라보고 싶었다."(318쪽)고 적혀있다.

먹고 달리고 잠들고 또 먹고 앞만 보고 달리는 이야기. 내가 두 번이나 절판된 책을 다시 잡은 이유는 어느 때보다 힘과 용기가 필요했고, 그렇다면 이만한 책도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년 6개월 동안 12,000Km의 북극횡단에 도전한 우에무라 나오미의 '안나여 저게 코츠뷰의 불빛이다'는 마지막 장을 덮기 전에 어떤 말로도 코멘트 할 수 없는(해서는 안 되는) 책이다. 나오미의 속도는 한없이 더디고 위태로운데 반해, 나의 책 읽는 속도는 어느 때보다 빨랐다. 그래서 미안했다.

영하 40도인 눈과 얼음의 땅. 나오미가 고통스런 사투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달릴 수 있었던 건 이누이트의 환대와 보살핌 덕분이었다. 그러니까 썰매를 끈 건 혹독한 추위와 맞서며 상처 입은 발로 앞을 향해 달린 나오미와 썰매 개들이었지만, 장비와 옷과 식량을 기꺼이 내어주며 이들이 치지지 않도록 독려한 이누이트의 선의와 친절이 아니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책 속에 "따뜻하게 맞아주었다"라는 말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건 이 때문이다. '안나여 저게 코츠뷰의 불빛이다'가 한 남자의 위대한 도전의 기록인 동시에 환대와 온정의 힘으로 만든 발자국인 까닭이다.

1974년 12월 20일 그린란드 야콥스하운을 떠난 이래 매일 밤 동상 걸린 손으로 개 발바닥에 신겨 줄 버선을 20켤레 넘게 꿰매던 사내. "모험이든 탐험이든 살아서 돌아오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169쪽)고 다짐한 나오미는 6개월 동안 6000킬로미터를 달려와 케임브리지베이에 도착한다. 그리고는 "실로 반 년 만에 내일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깊은 잠을 잤다."(189쪽)고 기록한다. 내일 걱정이 필요 없는 깊은 잠이란 어떤 것일까. 삶과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모든 것을 쏟아 부은 탐험가가, 중간기착지에서 배불리 먹고 식량도 충분히 챙겨 다시 떠날 힘을 보강한 사람만이 누리는 기쁨이자 작은 안식일 터. 그러나 북극해 횡단이 그리 호락호락할 리 없다.

영화평론가 백정우

개가 도망치거나 죽거나 식량과 장비를 잃어버리는 절체절명의 고비를 무수히 넘긴 사내는 막바지에 이르러 실존의 괴로움에 몸을 떤다. 썰매 개에게 총을 겨눌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 것. "신은 이제 그런 생명을 앗아가는 나를 구원하지 않으리라"(235쪽)며 북받쳐 오르는 죄책감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위대한 성취 뒤엔 더 위대한 희생이 따르는 법이라지만,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생환하겠다던 나오미는, 끝내 살아남았다.

1976년 5월 8일, 마침내! 우에무라 나오미는 12,000킬로미터 대장정에 마침표를 찍는다. 아홉 마리의 썰매 개를 앞세우고 알라스카 코츠뷰에 도착한 것이다. 나오미는 그린란드 출발부터 함께 달려온 대장 개, 안나를 안아 올리며 말한다. "끝났다 안나. 너에게는 이제 길고 긴 휴식이 있을 뿐이야."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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