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경훈 칼럼] 우리의 장미꽃은 다시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나

정경훈 논설주간
정경훈 논설주간

나치 독일 항복 후 승전국 미국의 최우선 과제는 '탈나치화'였다. 그러자면 나치에 동조한 모든 독일인들을 공적 생활에서 추방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미국을 당황케 했다. 그 실상을 미 군정청장 루시어스 클레이는 이렇게 전한다. "우리 행정의 주된 난제는 상당히 유능한 독일인 중 어떤 식으로든 나치 정권에 참여하지 않았거나 연루되지 않은 자를 찾는 일이었다.… 자격을 갖춘 사람들은… 공직자인 경우가 많았는데…그중 상당수는 나치당 활동에서 단순 가담자 수준을 뛰어넘었다."('포스트 워 1945~2005' 제1권, 토니 주트) 나치 가담과 동조는 범독일적 현상이었던 것이다.

그 원인을 기술하려면 책 몇 권으로도 모자라겠지만 그중 하나를 꼽자면 '도덕적 자폭'이다. 히틀러는 집권 전부터 "유대인은 병균, 제거해야 할 존재"라고 했다. 집권 후 유대인을 어떻게 '처리'할지 예고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독일 국민은 히틀러에게 권력을 안겼다. 그리고 히틀러는 예고대로, 유대인 '훈증(燻蒸) 살균'을 실천에 옮겼지만 독일인들은 모른 체했다. "수백만 명의 독일인들은 유대인에게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수많은 독일인들이 밤마다 덜컹거리며 지나가는 열차나 화차를 보고 들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았다. 어떤 사람들은 '저 빌어먹을 유대놈들은 밤잠마저 설치게 한다'고 투덜댔다."('모던 타임스Ⅱ', 폴 존슨)

사설이 길었다. 이런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지난 총선에서 드러난 우리 사회의 도덕적 무정부 상태의 징후 때문이다. 조국혁신당의 약진은 이를 압축해 보여 준다. 조국혁신당은 24.25%의 득표율로 12명의 비례대표 당선자를 냈다. 이 중 5명이 전과자 또는 피의자·피고인이다. 한 여론조사는 이들이 배지를 달 수 있게 된 이유를 보여 준다. 조국혁신당을 찍었다는 이들의 80.2%가 '조국 대표의 윤리의식이 약하다는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윤리의식의 마비 말고는 달리 해석할 도리가 없다.

더불어민주당의 압승도 마찬가지다. 아니 윤리의식 마비가 광범위해 보인다는 점에서 더 심각하다. 당 대표는 정치범도 양심범도 아니다. 민간사업자에게 천문학적 이익을 안긴 대장동·백현동 비리 의혹을 포함해 7개 사건, 10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잡범이다. 국민은 그의 '사당'(私黨)에 압도적 다수 의석을 안겼다. 이를 두고 민주당은 '국민의 위대한 승리'라고 규정했다. 과연 그럴까? 중우(衆愚)의 어리석은 선택은 아닐까? 이런 '승리'로 대표의 어떤 재판도 1심 선고가 다음 대선 전에는 나오기 어려울 가능성은 더 커졌다는 관측이 나온다. 잡범이 2번이나 대통령을 넘보는 도덕적 아노미가 '뉴노멀'이 된다는 얘기다.

그런 아노미는 이미 그 흉한 몰골을 드러냈다. 김활란 이화여대 초대 총장이 이대생을 미군 장교에게 성 상납시켰다는 김준혁 당선인의 주장을 '사실'로 만들려고 자신의 이모를 매춘부로 몬 것이 그렇다. 이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는 이모도 매춘부로 만드는 패륜이 그쪽의 도덕임을 현시(顯示)한다.

야당의 압승 제1 원인으로 좌파 언론부터 여당과 보수 언론까지 윤석열 대통령의 '불통'과 '독선'을 꼽는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보기 나름이다. 덴마크 심리학자 에드가 루빈이 고안한 '루빈의 꽃병'이란 그림이 있다. 보기에 따라 꽃병일 수도, 마주 보는 두 사람의 옆얼굴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불통'은 '신념', '독선'은 '의지'일 수도 있다. 설사 그런 관점 이동을 인정할 수 없다 해도 '불통'과 '독선'이 야권 인사들의 도덕적 파탄에 눈을 질끈 감고 표를 몰아줄 만큼 더 큰 잘못인지는 의문이다.

1951년 영국 더 타임스는 한국의 혼란한 정치 상황을 전하며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 비꼬았다. 그런 모욕을 딛고 우리는 장미꽃을 피워 냈고 그렇게 자부해 왔다. 그러나 박근혜 탄핵, 실정(失政)과 비정(秕政)으로 점철됐던 문재인 정권 5년, 그럼에도 민주당의 21대 총선 압승, 대통령 거부권으로 간신히 버텨왔던 윤석열 정권 2년, 민주당이 압승하고 조국혁신당이 약진한 22대 총선은 이런 물음을 던진다. '우리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피워낸 게 맞나? 장미를 쓰레기통으로 다시 던져 버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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