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심백강의 한국고대사] 동양고전으로 다시 찾는 발해조선의 역사(24)

고조선 멸망시킨 한무제?…비열한 수법 써야 했던 '실패의 전쟁'
중국 한족 최고의 영웅 한무제 유철
전국 죄수 총동원 병력 18만명 집결…고조선 우거왕에게 복종하라고 권유
거절당하자 비왕 장 살해 외교 만행…분노한 고조선도 눈치 안 보고 보복

1992년 남순강화에 나선 등소평
1992년 남순강화에 나선 등소평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기치를 내걸고 자본주의 시장경제 논리를 과감하게 받아들여 가난한 중국을 부강한 중국으로 만든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는 등소평이다.

등소평은 1992년 88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근 한달 동안 심천深圳, 주해珠海, 상해上海 등지를 시찰하며 연도에서 개혁개방의 중요성을 역설했는데 이것을 남순강화南巡講話라 한다.

여기서 등소평은 검은 고양이가 됐든 흰 고양이가 됐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30년 전에 등소평이 대담하게 개혁개방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중국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경제발전의 혜택을 누리는 곳은 주로 중국 장강長江 남쪽이고 내륙으로 들어가면 문명과는 거리가 먼 지역도 많다.

현재 중국에서 문명의 첨단을 걷고 있는 장강 유역의 강소, 절강, 복건은 본래 동이족이 살던 땅이다.

황하중류를 중심으로 출발한 한족 정권은 한무제 유철劉徹(서기전 156~서기전 87) 이전에는 만리장성 안쪽을 모두 지배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는 장강 유역마저도 제대로 손아귀에 넣지 못했다.

그러다가 서기전 111년 한무제는 장강 남쪽의 남월과 동월을 침략하여 한나라에 복속시켰다. 남월은 오늘날의 복건성이고 동월은 오늘날의 절강성 지역이다.

본래 동이족의 땅이었던 복건성, 절강성 일대는 2000년 전 한무제의 침략을 받아 한왕조의 영토로 편입되게 되었는데 오늘날 이 지역이 중국의 경제발전을 선두에서 견인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무제 유철은 한족 역사를 새로 쓴 최고의 위대한 영웅이다.

고조선을 침공한 한무제 유철
고조선을 침공한 한무제 유철

◆한무제 유철의 발해조선 침략

남쪽의 남월과 동월을 침략하여 절강성, 복건성 일대까지 한나라의 강역을 넓힌 한무제 유철은 다시 동북쪽의 발해유역에 있던 고조선을 침략하여 정복하려는 야심을 품게 된다.

서기전 110년 한무제는 전국의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동원하여 고조선을 공격할 준비를 한다. 18만명에 이르는 막대한 병력을 북쪽 변방과 동쪽 바닷가로 집결시켰다. 그리고 서기전 109년 가을 섭하涉何를 고조선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우거왕을 저들에게 복종하도록 회유했다.

고조선의 우거왕이 이를 거절하자 한나라의 사신 섭하는 돌아가는 길에 조, 한 국경선인 패수 즉 오늘날의 하북성 북경 동쪽의 조백하에 이르러 자신을 전송하기 위해 따라갔던 고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살해하고 강을 건너서 도망치는 외교상에 어긋나는 비열한 행위를 자행했다.

고조선에 대한 노골적인 만행에 분노한 고조선 왕은 그에 대한 보복적 조치로서 요동군동부도위를 습격하고 섭하를 잡아 살해하였다. 이것은 당시 고조선의 국력이 중국의 눈치나 보는 약소국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이다.

전쟁 준비를 끝낸 한무제는 고조선 정벌의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사신을 보내 일부러 분쟁을 야기시켰는데 고조선이 이를 좌시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응하자 한무제는 그것을 구실로 삼아 서기전 109년 바다와 육지 양면으로 고조선 침략에 나섰다.

한무제는 서기전 109년 가을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수군의 총사령관으로 삼아 발해 쪽에서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에 있던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공격하도록 했다. 양복을 해군 총사령관에 임명한 것은 그가 서기전 111년 남월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전공을 세우는 등 해전의 전투경험이 풍부했으므로 그에게 해군의 총지휘를 맡긴 것이다.

한편 육군의 총사령관은 좌장군 순체荀彘를 발탁했다. 그는 북방의 흉노와의 전쟁에서 공로를 세운 야전 경험이 풍부한 장수였다. 순체로 하여금 육로를 이용하여 패수 즉 지금의 북경 동쪽의 조백하를 건너서 양복의 해군과 함께 고조선의 왕검성 현재의 하북성 노룡현을 공격하게 하였다.

순체의 육군은 당시 하북성에 있던 요동군에서 출발하여 고조선 서쪽을 침공했고 양복의 해군은 발해 쪽에서 출발하여 고조선 동쪽을 공격했다. 한무제는 수륙 양군의 합동작전에 의해 고조선의 수도는 쉽게 함락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전황은 정반대로 전개되었다. 첫 전투에서 한나라의 수륙 양군이 모두 대패를 한 것이다.

해군 총사령관 양복은 병졸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혼자 산속으로 도망쳐 10여 일간 숨어 지내다가 겨우 살아남은 패잔병들을 다시 긁어모으는 상황이었으니 이는 당시의 전황이 어떠했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중국 지도. 발해만 부근에 보이는 노룡현이 한무제 당시 발해조선의 수도가 있던 지역이다.
중국 지도. 발해만 부근에 보이는 노룡현이 한무제 당시 발해조선의 수도가 있던 지역이다.

◆전쟁 중 평화협상 실패한 심복 두 명이나 처형시킨 한무제

전쟁이 예상과 달리 한나라의 패색이 짙어지는 쪽으로 기울자 당황한 한무제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자신의 심복 위산衛山을 보내 고조선의 우거왕과 평화협상을 벌이도록 했다.

그러나 양측의 팽팽한 줄다리기로 협상은 결렬되었고 위산이 돌아와서 그 사실을 보고했다. 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전쟁을 마무리하려는 시도가 좌절되자 화가 난 한무제는 협상 결렬의 책임을 물어 위산을 처형했다.

양측에서 평화협상이 진행되는 와중에 패전한 한나라의 군대는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고 평화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공격 자세로 전환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육군대장 순체와 해군대장 양복 사이에 알력이 생겼다. 따라서 수륙 양군의 합동작전을 통해 조선을 함락시키려는 시도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한편 한무제는 위산이 평화회담에 실패하고 또 순체와 양복은 둘 사이의 알력으로 인해 전쟁이 아무런 진전도 없이 세월만 흐르게 되자 이번에는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守를 전권특사로 파견하여 대책을 강구토록 했다.

공손수는 현장에 가서 해군장군 양복을 체포하여 가두고 양복의 수군을 순체의 육군에 포함시켜 순체가 총지휘하도록 조치한 다음 이를 한무제에게 보고했다. 한무제는 보고를 받자마자 공손수를 또한 사형에 처하였다.

천하의 한무제가 전쟁 도중에 자신의 심복을 평화협상 진행을 위해 조선에 급파하고 또 자신이 파견한 특사를 두 사람이나 책임을 물어 처형시킨 것을 본다면 한과 조선의 전쟁이 얼마나 한나라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는지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전쟁 참전한 육군, 해군 총사령관 극형

한무제는 조선전쟁 후 전쟁에 참전한 육군, 해군 총사령관을 극형으로 다스렸다. 한무제는 전쟁 도중에 평화협상을 성공시키지 못한 책임을 물어 두 명의 특사를 처형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끝난 뒤에는 육군 총사령관으로 전쟁을 이끌었던 좌장군 순체는 기시형棄市刑에 처하고 해군 총사령관 누선장군 양복은 평민으로 강등시켰다.

기시형은 고대사회에서 집행하던 사형 중의 하나인데 여러 사람이 모인 저자거리에서 공개적으로 형을 집행했다. 극악무도한 죄인에 대해서 이 형벌을 시행했는데 좌장군 순체와 누선장군 양복에 대해 포상을 하기는커녕 순체는 기시형이란 극형에 처하고 양복은 평민으로 강등시키는 처벌을 한 것은 한무제의 조선침략은 승리한 전쟁이 아니라 실패한 전쟁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한무제 유철의 발해조선 침략은 실패한 전쟁

조선열전이 수록되어 있는 사마천 사기
조선열전이 수록되어 있는 사마천 사기

이상은 사마천이 쓴 '사기' 조선열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당시 조, 한 전쟁을 재구성해본 것이다.

그런데 사마천의 조선열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조선 전쟁에 참여한 중국측 장군들은 처형이나 처벌을 받은 반면 논공행상에서 오히려 조선의 재상이나 장군들이 제후로 봉해지는 영광을 안았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나라가 군대를 통한 조선과의 정면 승부에서 실패하자 몰래 간첩을 들여보내 조선조정 내부를 이간시킴으로써 야비한 방법으로 승리를 쟁취했다는 반증이라고 본다.

"조선의 이계상尼谿相 참參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살해하고 와서 항복했다"는 사마천 '사기'의 기록에서, 위기에 몰린 한무제는 정정당당한 승리가 아니라 내부교란을 이용한 비열한 방법을 통해 승리를 거둔 사실이 행간에서 묻어난다.

'사기' 조선열전에 의하면 한무제의 조선 침략은 실패한 전쟁으로서 조선은 이 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완전히 망한 것이 아니었고 한무제가 설치한 한사군은 고조선의 서쪽 강역 즉 현재의 하북성 서남쪽 일부에 국한된 것이었다. 이는 마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그 일부 지역을 러시아에 편입시킨 것과 같았다.

이때 한무제가 대동강 유역에 있던 고조선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반도에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반도사관이다. 고조선을 멸망시켰다는 것도 한반도에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것도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shimbg2001@daum.net)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