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2일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탄생일이자 국제 간호사의 날이다. 나이팅게일은 선하고 따뜻한 '백의의 천사'로 각인돼 있지만 또 다른 수식어는 '등불을 든 여인'이다. 크림전쟁 당시 밤마다 등불을 켜고 부상병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돌아다니며 열악한 보건위생 환경을 개선하고, 부상병을 위한 식량과 약품 보급 문제 해결을 위해 직접 등불과 망치를 들고 영국의 보건의료 개혁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학창 시절엔 간호사를 꿈꾸지 않았다. 간호대에 입학하고도 타고난 문과생이었던 난 교과 과정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간호사는 내 길이 아니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고민 많던 20살 대학생은 캐나다의 병원 탐방 프로그램에 10여 개국 친구들과 함께 참여하며 '병원'이라는 곳에 처음으로 관심이 생기게 됐다. 이후 한국에서 첫 병원 실습을 앞두고 나이팅게일 선서식을 하게 되었고, 새 실습복을 받아 들고 병원에서 실제로 환자들을 만난다는 설렘으로 나의 본격적인 간호사 인생이 시작되었다.
나이팅게일 선서문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겠습니다.' 새내기 간호사 시절 이 구절이 내 어깨에 무거운 책임감을 얹어 줬고, 그래서였을까, 매 순간이 그저 두렵고 무서웠다. 대학병원 특성상 중증도가 높은 급성기 환자들을 간호했고 모든 것이 서툴러 나로 인해 환자가 잘못되면 어떡하나 늘 전전긍긍했다. 담당했던 환자의 첫 임종을 맞이했을 때는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환자와 보호자를 간호하는 일이 내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이란 생각에 옷을 벗을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의료진을 믿고 이 순간을 맡긴 환자를 두고 갈등과 고민만 할 수는 없었다. 내 환자에게 해가 되지 않고 이로운 일을 하기 위해 대학생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고, 가족을 잃은 보호자의 등을 토닥여주며 비로소 '등불을 든 여인'의 진정한 모습을 이해했다. 전쟁터처럼 치열한 현장에서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헌신하겠다'는 나이팅게일 선서의 한 구절처럼 내 손길을 필요로 하는 환자들을 지켜내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 그렇게 간호사의 길로 들어선 나는 어느덧 대학병원의 10년 차 간호사가 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선생님은 누가 봐도 간호사처럼 생기셨어요." 처음 선택은 내 의지가 아니었으나, 간호직은 나의 운명이고 천직이다. 이 운명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정해졌을지 모른다. 나는 현재 근무하고 있는 병원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도 나를 낳을 당시 같은 병원 간호사로 근무하고 계셨다. 간호대학생 시절, 신규 간호사 시절, 적응에 힘들어하며 수시로 울던 내가 포기할 법한데도 버텨 내어 어느덧 병원으로 인해 웃기도 하는 10년 차가 된 지금의 나를 어머니는 대견해하시며 "너는 배 속에서부터 태교를 해서 천생 간호사다!"라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하시곤 한다.
워런 버핏은 "오늘 누군가 그늘에 앉아 쉴 수 있는 이유는 오래전에 누군가가 나무를 심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우연에서 필연으로 간호사의 길을 걸어온 지 10년째. 걸어온 길에 심어진 나의 푸르름이 누군가의 아픔과 불안을 해소하는 청량함이기를 바라며 오늘도 나는 나무를 심고 있다. 이 나무들이 언젠가 뿌리 깊은 큰 나무가 되어 필요한 이들에게 그늘 한 평을 내어 줄 수 있다면, 간호사로서의 내 삶에서 더 바랄 것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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