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서인들은 1623년(광해군 15) 임금 광해군을 내쫓는 계해정변을 일으켰다. 인목대비를 폐모시킨 패륜과 명(明)과 후금 사이의 중립외교가 명에 대한 불충(不忠)이라며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었다. 실제로는 광해군과 집권당 북인(北人)을 내쫓고 정권을 잡으려는 것이었다. 서인들은 광해군이 후금을 정벌하러 갔던 강홍립을 일부러 후금에 투항시켰다고 주장했다. 서인 영수 송시열은 효종 즉위년(1669) 임금에게 올린 〈기축봉사(己丑封事)〉에서 "광해가 무도하게도 강홍립과 김경서에게 모든 군사를 오랑캐에게 투항하게 했다"고 비판했다. 이것이 계해정변의 주요 명분이었다.
◆누루하치 여진족을 통일하다
만주족은 거주지에 따라서 크게 해서(海西)·야인(野人)·건주(建州)여진의 셋으로 분류한다. 만주족은 분열되어 있을 때는 이이제이(以夷制夷)에 따른 명의 지배를 받았지만 민족영웅 누루하치(努爾哈齊:1559~1626)가 나타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백두산 일대 건주 여진 출신의 누루하치는 1588년 경 건주 여진을 통일했고, 4년 후인 1592년(선조 25)에는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군사를 보내 도와주겠다고 자청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광해군 8년(1616) 누루하치는 황제 자리에 올라 금(金)을 재건하고 연호를 천명(天命)이라고 선포했다. 2년 후인 광해군 10년(1618) 4월에는 "명나라가 내 조부와 부친을 죽였다", "명나라가 우리 민족을 탄압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7대한(七大恨)'을 선언하면서 요녕성 무순(撫順)을 함락시켰다. 공포에 휩싸인 명나라의 경략(經略) 왕가수(汪可受)는 그해 윤4월 27일 조선에 서신을 보내 수만 군사를 파견해서 함께 싸우자고 요청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군사를 보낼 생각이 없었다. 광해군은 5월 1일 군사를 보내는 대신 "급히 수천 군병을 뽑아 의주(義州) 등지에 대기시켜 놓자"고 신하들에게 제안했다.
◆도원수 강홍립
그런데 명의 군사 파견 요청에 이귀·김류·김자점·최명길 등의 서인들은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적극 파병을 주창한 당파는 집권 대북(大北)이었다. 북인 영수 이이첨은 "중국에 난리가 났을 때 제후가 들어가 구원하는 것이 바로 《춘추(春秋)》의 대의요 변방을 지키는 직분"이라면서 파병을 주장했다. 대북까지 파병을 주창하자 광해군은 파병군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비변사에서 도원수로 천거한 인물이 의정부 좌참찬 강홍립(姜弘立:1560~1627)이었다. 강홍립은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사양했지만 광해군은 "내 뜻은 이미 다 유시(諭示)했으니 사면해 달라고 청원하지 말라"고 물리쳤다. 강홍립은 선조 30년(1597) 알성문과에 급제한 문관이면서도 선조 39년에는 어전통사(御前通事)를 수행할 정도로 중국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선발되었다. 강홍립이 출전을 꺼린 이유는 조선의 전쟁이 아니라 명과 후금 사이의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북상한 조선군
명은 당초 4만 군사를 요구하다가 명의 요동경략(遼東經略) 양호(楊鎬)의 양해로 1만3천여 명 파병으로 조정했다. 강홍립은 광해군 11년(1619) 2월 21일 포수(砲手) 3천500, 사수(射手) 3천500, 살수(殺手) 1천 명 등으로 구성된 1만3천여 조선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조선군은 압록강 북쪽 대미동(大尾洞)에서 명군과 만났는데, 《광해군일기》는 "그곳은 바로 중국과 조선의 경계다"고 말하고 있다. 광해군 때도 압록강이 조선과 명의 국경이 아니라 그 북쪽 대미동이 국경이었다.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강홍립은 2월 26일 "큰 눈보라 속을 행군하느라 각 영(營) 병사들이 가진 군장과 의복이 모두 젖었습니다"로 시작되는 장계를 보내면서 명군의 상태를 부정적으로 기술했다. 명군 도독 유정(劉綎)과 요동경략 양호 사이의 반목이 심각하다는 보고였다. 강홍립은 "명군 진영에 가 보니 기계가 허술하고 대포와 대기(大器)도 없었으며, 오직 우리 군사들을 믿고 있을 뿐"이라고 보고했다.
◆굶주린 채 전투
조선군의 가장 큰 문제는 군량 보급이었다. 강홍립은 2월 27일 "가지고 온 군량은 이미 다 떨어져가는 데 군량과 건초가 아직 후송되지 않고 있으니, 앞으로의 일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고 보고했다. 압록강을 도강할 때 군사들이 각각 10일치 양식을 가지고 출발했는데 군량이 지원되지 않고 있었다. 《광해군일기》의 사관은 "평안감사 박엽(朴燁)이 군량길을 끊어서 강홍립 등이 큰 곤경에 빠진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남의 전쟁에 나간 터에 군량마저 제때 보급되지 않고 있으니 사기가 높을 수 없었다.
종사관 이민환(李民寏)은 《책중일록(柵中日錄)》에서 조선군은 3월 2일 심하에서 처음으로 만난 후금군 600여 명을 격퇴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승리한 조선군은 승전의 기쁨 대신 양식을 찾아 헤매야 했다. 여진족 부락에서 약간의 곡식을 찾아 죽을 끓여 허기를 속인 조선군이 후금의 주력부대와 맞닥뜨린 것은 3월 4일이었다. 공명심에 눈이 먼 명의 총병(摠兵) 두송(杜松)이 하루 일찍 출발했다가 복병을 만나 전멸했고, 강홍립과 함께 진군하던 도독 유정의 선봉부대까지 전멸했다. 조선군은 화포를 쏘아 후금의 기병을 격퇴시켰으나 갑자기 서북풍이 거세게 불면서 화약을 잴 수 없을 때, 철기군이 휘몰아쳐 패전하고 말았다. 선천부사 김응하(金應河)는 좌영을 이끌고 맞서다가 전사했다.
◆광해군의 밀지는 존재했는가?
계해정변을 일으킨 서인들은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밀지〉를 주어 의도적으로 항복시켰다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왕이 비밀리에 회령부(會寧府)의 상인 호족(胡族:여진족)에게 이 일을 통보하게 하였는데…마침내 강홍립을 불러들이게 하였다. 강홍립의 투항은 대개 미리 예정된 계획이었다(《광해군일기(중초본)》, 11년 4월 2일)"
광해군이 한 여진족 상인에게 조선군이 항복할 것이라는 정보를 몰래 전했다는 허황된 주장으로 서인들의 창작에 불과했다. 이민환은 《책중일록》에서 후금에서 먼저 통역관을 찾았고 강홍립이 통역관 황연해(黃連海)를 보냈다고 전하고 있다. 후금은 "우리는 당인(唐人:중국인)과는 원한이 있어서 서로 전쟁하지만 너희 나라와는 본래 원한이 없는데 왜 와서 치는가?"라고 물었다. 조선 통역관이 "우리는 원한이 없지만 이렇게 온 것은 부득이한 것이다"라고 답하자 사정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강홍립의 밀서
3월 4일 밤, 조선군은 항복과 결사항전 중 무엇을 택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포위망을 뚫자는 견해도 있었지만 응하는 군사는 없었다. 춥고 배고픈 조선군은 전의를 상실했고, 강홍립과 김경서는 전력 보존을 위해 항복을 결정했고 3월 5일 흥경(興京)으로 가서 국왕 누르하치를 만났다. 강홍립·김경서는 흥경에 억류되었고, 일부 장수들은 조선으로 송환되었다. 기나긴 8년 동안의 억류생활이 시작되었다.
식량 조달 임무를 방기한 평안감사 박엽은 투항 소식이 전해지자 강홍립의 가족들을 구금했다. 광해군은, "이들은 항복한 것에 비교할 것이 아니니 그 가족은 속히 석방하여 서울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박엽은 군량 수송 태만의 과오를 합리화하기 위해 전사한 김응하를 높이고, 강홍립·김경서가 일부러 투항한 것처럼 보고해 강홍립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게 했다. 억류된 강홍립은 비밀 장계를 종이 노끈 등에 보냈는데, '화친을 맺어 병화를 늦추자는 뜻'을 담은 내용들이었다. 이런 밀서 덕분에 광해군은 후금에 대한 생생한 정보를 입수하고 명과 후금 사이에 등거리 외교를 수행했다. 조선을 전란에 휩싸이지 않게 하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계해정변과 정묘호란
그러나 광해군 15년(1623)의 서인들의 계해정변이란 쿠데타로 광해군을 쫓아내자 상황이 급변했다. 인조와 서인정권은 명나라를 추종하고 후금을 배척하는 향명배금(向明背金) 정책으로 선회하자 후금은 인조 5년(1627) 1월 압록강을 건너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조선은 장만(張晩)을 도체찰사로 삼아 막게 했으나 역부족이어서 후금군은 안주와 평양을 거쳐 황주까지 남하했다. 인조는 부랴부랴 강화도로,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신했으나 평산까지 남하했던 후금군은 더 이상 내려오지 않았다. 강홍립이 후금군을 설득해 남하를 막고 화의하게 했던 것이다. 인조와 서인정권에게 강홍립이 오히려 구세주였다. 부원수를 지낸 정충신(鄭忠信)이 "영감께서 화의를 담당해서 혀로써 수만의 후금군을 물리쳤으니 한 나라의 크고 작은 생령(生靈) 중 누가 그 덕에 감사하지 않겠습니까?"라는 편지를 보냈을 정도다. 두 나라는 형제의 의를 맺는 화약을 맺었고, 강홍립도 오랜 억류생활을 끝내고 석방되었다.
고국에 정착하자 긴장이 풀렸던 탓인지, 강홍립은 그해(인조 5년:1627) 7월 예순 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인조가 그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장례물품도 지급하게 했지만 승정원을 비롯한 여러 부서에서 반대해 좌절되었다. 강홍립의 관작을 회복시키면 쿠데타 명분이 송두리째 부인되므로 반대했던 것이다. 강홍립의 신산스런 삶에서 아무 교훈을 얻지 못한 서인들은 친명반청 정책을 바꾸지 않았고 이는 인조 14년(1636)에 병자호란으로 되돌아왔다. 강홍립 세상을 떠났으므로 중재자도 없었다. 인조는 청 태종 앞에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의 예를 행하며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도 서인들은 광해군의 〈밀지〉로 강홍립이 항복했다는 거짓 선전을 유포시키면서 계해정변이란 쿠데타를 합리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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