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이성(理性)적일까, 감정(感情)적일까. 인류가 이룬 업적들은 이성적 사고의 산물로 받아들여졌다. 기쁨, 성취감, 희열 등 긍정적 감정뿐 아니라 슬픔, 두려움, 좌절감, 분노 등 부정적 감정 모두 적절히 통제해야 하고, 이를 잘 조절하는 사람이 성공적 인생을 산다고 배웠다. 감정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고 뇌의 어느 부분에서 특정한 감정이 발현되고 조율되는지는 20세기 중후반에야 조금씩 밝혀지기 시작했다.
이론물리학을 전공한 레오나르도 믈로디노프의 저서 '감정의 뇌과학'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다. 사귀던 여성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한 남성은 연인을 설득하거나 선물 공세를 하는 대신 모성애를 자극하고 싶었다. 한 친구에겐 총으로 자신을 쏴 달라고 부탁하고, 다른 친구에겐 폭력배에게 습격받았다고 연인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 결과는 예상과 전혀 달랐다. 남성은 폭력배 습격 허위 신고로 기소됐고, 친구들도 거짓말 범죄 가담과 총기 사용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물론 연인은 병원에 오지도 않았다. 검찰도 변호사도 "지금껏 본 가장 어리석은 중죄"라고 평했다. 남성은 냉철하고 차분하게 계획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극단적인 감정의 선택을 했을 뿐이다. 이성적 판단 따위는 없었다.
서울 강남역 한복판에서 '수능 만점 명문대 의대생'이 연인을 흉기로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해 언론에 보도된 남성에 의한 여성 살해 사건만 최소 138건이고, 같은 기간 데이트 폭력 피의자만 약 1만4천 명에 이른다. '수능 만점'과 '의대생' 수식어 때문에 사건이 부각됐을 뿐 비슷한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는 말이다.
시민들은 '사전에 범행을 계획했다'는 내용에 더 충격을 받았다. 감정이 절제된 상태에서 이성적 판단을 통한 잔혹한 범행을 계획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랬을까. '수능 만점'이 감정 절제 능력도 평가할 수 있을까. 사실 감정의 개입 없이 이성적 판단만 가능한 경우는 오히려 극히 드물다. '감정 교육'은 배운 적도 없고, 감정 통제는 철저히 개인의 역량에 맡겼다. 범죄자를 옹호하고픈 마음은 전혀 없다. 다만 감정을 제대로 바라보고, 효과적으로 다스리는 방법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결국 우리 행동은 감정의 결과물 아닌가. 사람마다 발현의 강도가 다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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