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나를 따르라 한들, 누가 따르겠나

김교영 논설위원
김교영 논설위원

옛날 가난한 노부부가 있었다. 부부는 재산 1호인 말(馬)을 필요한 물건과 바꾸기로 했다. 할아버지가 말을 끌고 장에 갔다. 그는 먼저 말을 암소와 교환했다. 이어 암소를 양으로, 거위로, 암탉으로, 썩은 사과로 바꿨다. 누가 봐도 밑지는 거래다. 그의 생각은 달랐다. 새로운 게 보이면, 그게 아내에게 더 좋은 것으로 여겼다. 귀가 중 만난 영국 신사는 할아버지의 상황을 알고, 비웃었다. 할머니에게 혼이 날 것이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반박했다. 신사는 할아버지 말대로 되면, 금화 한 자루를 주겠노라 했다. 집에 온 할아버지는 '썩은 사과의 사연'을 아내에게 들려줬다. 할머니의 반응은 "참 잘했어요"였다. 비록 손해를 봤지만, 남편의 진심을 알기 때문이다.

안데르센 동화 '썩은 사과'의 줄거리다. '신뢰'의 중요성을 해피엔딩(happy ending)으로 일깨운다. 반면 이솝 우화 '양치기 소년'은 신뢰 잃은 말의 새드엔딩(sad ending)이다. 불신의 비극(悲劇)을 다룬 셰익스피어의 명작도 있다. 바로 '오셀로'다. 베니스의 장군 오셀로는 용기와 덕을 갖춘 인물이다. 그런 오셀로에게 파멸이 닥친다. 그가 부하의 농간에 빠져, 아내의 불륜을 의심한다. 결국 아내를 죽인다. 오셀로는 뒤늦게 자신이 속은 것을 알고, 목숨을 버린다.

세상이 불신과 거짓으로 혼탁스럽다. 술 마셨다더니 안 마셨다고 한다. 검사실 앞방 창고라더니 영상녹화실이란다.(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의 '검찰청 술자리 회유' 의혹 진술 번복) 국민을 농락하는 말 바꿈이다. '청담동 술자리' '서울시장 생태탕' 의혹도 그랬다. 죄지은 정치인들이 수사와 판결을 부정한다.(물론 검찰·법원이 불신의 빌미를 주기도 했다.) 내 탓은 없고, 네 탓만 있다. 우리가 하면 '민생 정치', 너희가 하면 '포퓰리즘'이란다. 일련의 부조리극이다.

22대 총선은 타락한 정치의 민낯을 드러냈다. 정치인들은 염치를 몰랐다. 윤리와 도덕의 기준이 무너졌다. 아노미(anomie)가 따로 없다. 1심, 2심에서 유죄 판결 받은 사람들이 '의원님'이 됐다. 편법 대출 의혹을 받는 사람, 성 상납 막말 발언의 주인공이 '금배지'를 달았다. 이런 사람들이 '검찰 독재' '정치 탄압' 운운한다. 예수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신비(神祕)를 보였다. 이들은 '불법'을 '탄압'으로 만드는 신기(神技)를 가졌다. 진실과 거짓이 뒤범벅된 세상이다. 나를 믿고 따르라 한들, 누가 믿고 따르겠나.

국회 신뢰는 바닥이다. '2023 한국의 사회지표'를 보면, 국회 신뢰도는 24.7%로 국가기관 중 꼴찌다. 야바위 정치인이 활개 친다. 공정보다 꼼수, 준법보다 편법, 포용보다 차별이 난무한다. 이 광포한 쓰나미에 신뢰의 댐은 허물어진다. 낯선 사람을 믿는 한국인은 10명 중 2명뿐이란 통계도 있다. 험한 사회가 만든 방어 기제다. '스탠퍼드 소셜 이노베이션 리뷰'(미국 스탠퍼드대 발행)의 분석은 새길 만하다. 이 매체는 사회적 신뢰 추락의 요인으로 ▷공공·민간의 부패 ▷악의적인 공개 수사 ▷필수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는 정부의 무능 ▷법치의 붕괴 ▷경제적 불평등 증가 ▷개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시스템 등을 꼽았다.

신뢰는 사회적 자본이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신뢰 자본'의 차이다. 신뢰 기반이 없는 나라는 사회적 비용의 증가로 선진국 문턱에서 좌절한다." 세계적 석학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저서 '트러스트'(Trust)에서 신뢰의 중요성을 강조한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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