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뜻밖이었다. 영화평론가에게 책에 관한 칼럼을 쓰라고 요청이 올 줄은 몰랐다. 책을 사고 읽는 데 열심이었고, 몇 권의 졸저를 내놓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나는 책에 무지한 사람이었다. 못 쓸 일도 없지만, 본업으로도 생계를 책임 못 지는 주제에 다른 영역까지 기웃대는 게 좋은 선택인지 미심쩍었다. 어쨌든 시작했다. 영화도 영화평론도 모두 문학에 기대고 있다는 자기변명을 확신 삼아서였다.
변명의 배경은 이랬다. 영화는 창작과 비평이 가진 무기가 서로 달라 비평가가 창작자를 이길 수 없는 데 반해, 책은 무기가 같으니 해 볼 만하다고 여긴 것. 말하자면 영화감독에게 카메라(영상)가 무기라면 영화평론가는 펜(글)이 무기이다.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 반면 문학은 창작자도 평론가도 모두 펜으로 이야기한다. 동등한 조건이라 해볼 만한 승부라는 것이다. 책 좋아하는 사람의 솔직한 느낌을 적으면 된다고 믿었고, 주위 눈치 보지 않는 성격에 비추어 그리 어려운 일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내가 놓친 게 있었다.

영화는 2시간, 길어봐야 3시간 안에 완주 가능하지만, 책은 분량과 내용에 따라 최소한 하루에서 일주일 이상 걸린다는 사실. 즉 텍스트를 이해하는 건 고사하고 수용하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속독해도 되는 책이 있는 반면, 천천히 곱씹어가며 푹 빠져들어야 하는 책도 있고, 지나치게 빠져 허우적대는 사이 시간만 잡아먹는 책도 있었다(어느 쪽이든 끝까지 가야 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또 하나는 고전의 경우 몇몇 대형출판사가 독점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누구나 알만한 클래식은 3~4곳에서 대부분 발간되었다. 업계 특성상 불가피한 일임에도 혹여 매체 칼럼이 특정 출판사 책에 치우치는 건 아닐까, 하는 자기검열에 시간을 허비할 때도 있었다. 에두르지 않고 말하자면, 지난주는 '위대한 개츠비'였고, 당초 이번 주는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 차례였다. 둘 다 문학동네에서 펴낸 책이다. 중간에 이 글을 넣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도 인생 참 피곤하게 산다.
어쩌다 책 칼럼을 맡고서 생긴 가장 큰 변화는 일상의 비중이 영화에서 책으로 옮겨간 것이다. 내 방에는 책상이 두 개가 있는데, 위아래 책상에 3종류의 책이 놓여 있다. 읽은 책, 읽는 책, 그리고 읽을 책. 늘 십여 권의 책에 포위된 형국이다.
지난 화요일 밤에 이번 주 마감을 쳤고, 수요일엔 다음 초고를 끝냈으며 오늘은 그 다음 주에 쓸 책의 메모를 마치게 될 것이다. 어쨌거나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는 건 의심이요 줄어드는 건 확신이다. 지금, 내가 맞게 쓰는 건가 싶은 의심은 기고가 끝날 때까지 이어질 것인즉. 그래도 잘 해내고 싶고, 잘 쓰고 싶고, 내가 쓴 글을 보고 누군가 그 책을 읽고 싶어 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터다.
나는 기계적인 반복 작업의 효율과 기능성과 품질을 신뢰하고 신봉한다.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장인들이 만든 영화를 높이 평가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관성적으로 쓰다 보면 제대로 잘 쓸 날이 내게도 올까. 마음을 다잡고서 고개를 돌리니 읽다가 덮은 책이 보인다. 케 세라 세라(Que sera sera·어떻게든 되겠지).
영화평론가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경선 일정 완주한 이철우 경북도지사, '국가 지도자급' 존재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