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이 중국 포위전략을 본격화하면서 동아시아에서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물밑에서는 각국의 국익과 생존을 위한 치열한 외교전이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외교전에서 소외되면 그 나라는 망국 혹은 쇠망의 길을 걷게 된다. 비슷한 상황이 20세기 초에 벌어졌을 때 대한제국은 열강 외교전의 희생양이 되어 일본에 병합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21세기 격전의 화두가 중국 포위전략이었다면, 20세기 초의 화두는 영국이 한 세기 내내 벌어왔던 러시아 포위전략(영·러 그레이트 게임)을 종료하고 모든 역량을 신흥강국 독일 포위전략으로 전환하면서 비롯되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는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함대에 대패하여 태평양함대와 발트함대를 상실했다. 그 결과 영국의 해양 패권에 도전할 수 있는 동력을 상실했다. 이 와중에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베를린-바그다드 철도(3B 정책) 부설, 건함 경쟁, 격렬한 해외 팽창 등 공세적인 세계정책으로 영국의 해양 패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독일의 도전에 직면한 영국은 전 세계에 분산 배치한 자국 해군력을 본토 주변으로 재배치하여 유럽에서 독일의 공세에 대응해야 했다. 이를 위해 동맹국 일본의 협조와 숙적 러시아·프랑스를 끌어들여 견고한 독일 포위망 형성을 위한 외교 공작에 나섰다.
영국은 러일전쟁 막바지인 1905년 8월 12일, 일본과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했다. 이 조약의 핵심 내용은 러시아가 인도를 침공할 경우 일본은 영국 편에 참전하는 조건으로 영국은 일본의 대한제국 보호권을 인정한 것이다. 이 조약을 계기로 일본은 그해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을 체결,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탈취하여 보호국으로 삼는 데 성공했다.
◆불일 협정이 외교 혁명 촉발
영국으로부터 큰 선물을 받았으니 일본도 영국의 요구를 들어줄 필요가 있었다. 이 무렵 프랑스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동아시아의 강자로 떠오른 일본이 자국 세력권인 인도차이나반도를 침공하지나 않을까 우려했다. 이 와중에 일본은 영국의 부추김을 받고 프랑스와 비밀 접촉에 나서 1907년 불일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협정의 핵심 내용은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반도 지배, 일본은 대한제국 지배를 묵인하는 상호 유쾌한 거래였다.
불일 협정을 신호탄으로 러시아와 일본, 영국과 러시아가 연쇄적으로 외교 접촉을 개시하면서 1907년 외교 혁명이 폭발하게 된다. 불일 협정 이후 일본은 러일전쟁 후 관계가 불편해진 러시아와 접촉을 시작했다.
러일전쟁은 전투에서는 일본이 승리했지만, 외교전에선 러시아가 승리했다. 러시아는 패전에도 불구하고 승전국 일본에 배상금을 한 푼도 내지 않았고, 전쟁의 핵심 목표였던 대한제국의 독립 문제도 러시아의 뜻을 관철했다. 즉,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권'은 수용했지만, 대한제국의 독립을 인정했고, 또 대한제국의 주권을 변경하려면 대한제국과 러시아의 동의 받아야 한다고 못 박는 데 성공했다.
포츠머스강화조약에서 미봉된 대한제국 '보호권' 문제로 인해 러일 간에 외교 갈등이 일어나자 러일 양국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07년 3월부터 비밀협상에 나섰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병합을 러시아가 인정하라고 요구했고, 러시아는 대한제국을 쉽게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핵심 쟁점이 합의되지 못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일본을 한 방 먹여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고종을 이용하기로 했다.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여 만국 평화회의장에서 일본의 침략 야욕을 폭로하라고 부추긴 것이다. 그런데 고종의 밀사가 헤이그에 도착하기 전날, 러일 양국은 극적으로 핵심 쟁점 사안에 타협하게 된다. 덕분에 대한제국 밀사는 만국 평화회의장에 입장도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했다.
◆4국 협조체제 탄생
1907년 7월 30일 체결된 제1차 러일협약은 하얼빈-지린(吉林)을 분계선으로 만주를 분할하여 일본은 대한제국, 러시아는 외몽골을 특수이익 지역으로 나눠 갖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러시아는 외몽골을 차지하는 대가로 일본의 대한제국 병합을 묵인한 것이다.
일본을 중심으로 프랑스·러시아가 손잡는 데 성공하자 이번에는 영국이 러시아와 접촉했다. 영국은 19세기 내내 전 지구적 차원에서 치고받는 열전(그레이트 게임)을 벌였던 앙숙 러시아와 1907년 8월 31일 영러 협상을 체결한다. 핵심 내용은 페르시아 북부는 러시아, 남부는 영국 세력권으로 정했고,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세력권으로 인정, 티베트는 영토 보전에 합의했다.
영국은 러시아와 협상을 통해 자신들의 사활적 이익이 걸려 있는 인도 보호를 위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그 대가로 영국은 러시아의 발칸반도 진출을 묵인함으로써 양국은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한배를 타게 된다.
1907년 외교 혁명의 핵심 본질은 영일동맹과 러불동맹의 결합이었다. 이로써 오랜 기간 적대관계였던 영국·러시아·프랑스가 동일 진영으로 뭉쳐 삼국협상(Triple Entente)이 출범한다. 여기에 일본을 끌어들여 독일 포위망을 형성하는 4국 협조체제의 출범이 제1차 세계대전의 거시 구조적 기원이다.
독일은 4국 협조체제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미국·청나라와 접촉한다. 독일 주도로 삼국간섭이 일어나면 대한제국 병합이란 대어를 놓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일본은 미국과 독일을 갈라놓기 위해 미국과 접촉한다. 그 결과물이 1908년 11월 30일 체결된 루트-다카히라 협정(태평양 방면에 관한 미일 교환공문)이다.
이 협정의 핵심은 미국의 하와이 왕국 병합, 필리핀에 대한 관리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한 일본의 대한제국 병합과 남만주 지배권 승인이었다. 미국마저 일본의 대한제국 병합에 찬성한 것이다.
대한제국 지도부는 긴박하게 움직이는 열강 간 이합집산, 변화무쌍한 국제정세를 파악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그 결과 고종은 러시아에 의지하여 왕권 유지를 시도했다. 헤이그 밀사 파견, 의병 봉기마저 실패하자 고종은 러시아에 정치적 망명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미 일본과 모든 거래를 끝낸 러시아가 고종의 망명을 수용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 결과 1907년부터 대한제국 관리권이 일본에 넘어갔고, 그 마지막 귀결점은 1910년 일본에의 병합이었다. 1907년 열강의 외교 혁명이 대한제국의 운명을 결정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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