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많은 사람들이 대체 왜? 필름을 보고도 믿기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 "그래도 엄연한 사실!" 낡은 필름이 계속 말을 걸어왔습니다. 필시 사연이 있을텐데 언제, 무엇 때문에 이토록 운집했는지 알 수 없으니 속이 탔습니다.
필름 속 단서는 대구 앞산 용두바위가 보이는 신천, 장대 높이 내 건 '남산 5구동 근로구호 공사장' 글씨, 옷 차림새는 1960년대. 이렇게 좁히고는 무작정 신문을 훓었습니다. 수년 치를 뒤지고도 제자리. 근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눈이 확 뜨였습니다.
1962년 6월 13일 오전 신천 중동교 부근 근로구호 공사장. 공사 3일째인 이날은 전날 보다 수천 명이 더 늘어 2만2천78명. 강바닥이 사람들로 하얗게 들어찼습니다. 명목은 호안공사였지만 실은 실업자 구호사업. 전년도 큰 물난리로 흉년이 들자 이번 보릿고개가 너무 혹독해 노임으로 당일 쌀을 지급한다니 저렇게 쏟아졌습니다.
이렇게 몰린 또 다른 원인은 3일 전 전격 실시된 통화개혁. '환'을 '원'으로, 10대 1로 평가절하되면서 신권이 없어 식량을 못 구한 시민들까지 가세했습니다. 인파에 놀란 강원채 대구시장은 하루 250여 명씩 2개월 간 1만6천명을 취역시키려던 당초 계획을 바꿔 무제한 일하도록 했습니다.
거의 절반은 부녀자. 10대부터 60대 노인까지, 젖먹이를 업은 부인, 신사숙녀 차림의 젊은 남녀…. 한 세대에서 3, 4명이 나온 곳도 수두룩했습니다. 남편을 잃고 어린 자식 다섯에 일곱 식구를 떠안아 딸과 같이 나온 이정희(53) 씨. 결혼 예물이 적다고 구박하는 시어머니와 불화 끝에 양잿물을 마시고도 죽지 못해 미음을 끓일 쌀을 구하러 왔다는 어느 여인 …. 구호공사는 이들에게 마지막 '지푸라기'였습니다.
작업은 강바닥에서 사리(자갈)를 날라 제방을 쌓는 일. 장비라곤 삽과 괭이, 바구니와 들것이 전부. 모두 맨몸으로 힘을 써야 해서 만삭으로 작업하던 김이남(31·대봉동 5구) 씨는 그만 강바닥에서 불쑥 아기를 분만했습니다. 안타까운 사정에 당국은 쌀 한 가마니로 산모를 긴급 구호했습니다. 엄마 따라 왔다가 손을 놓친 미아도 16명이나 돼 아이를 찾아가라는 순회 방송이 종일 귓전을 울렸습니다.
오후 5시, 일은 끝났지만 워낙 혼잡해 개인별 작업량은 측정 불가. 당국은 군 트럭에 싣고 온 노임곡 930가마니를 풀어 똑같이 쌀 2kg(약 47원)씩 지급했습니다. 3일간 연 취역자는 무려 3만5천여 명. 노임곡이 바닥나 공사가 중단됐습니다. 사흘 뒤, 이번엔 세대 당 1명씩 1천8백80명으로 다시 시작했지만 현장에는 영세민 500여 명이 몰려와 쌀이 떨어졌다며 눈물지었습니다. (매일신문 1962년 6월 13·14·16·17일 자)
그때는 먹고 산다는 게 저토록 힘겨웠습니다. 언 62년. 벌거숭이 앞산 자락, 초가삼간, 판자집도 다 옛말. 산천도 신천도 참 많이 변했습니다. 그날, 쌀이 없다고 주린 배로 엄마 따라 자갈을 모으던 저 아이들은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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