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화요초대석] 반도체 산업 지원에 파격이 필요하다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장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장

4년 5개월 만에 서울에서 한중일 정상회담이 열렸다. 한미일 동맹 강화로 한일 관계는 개선되었지만, 한중 관계 개선은 아직 글쎄다. 무대에 오른 배우는 개인 사정으로 표정을 바꾸지 않는다. 아프다고 해도 상대방인 관객은 아픈데 쉬지 웬 민폐냐는 시각으로 보기 때문이다. 외교도 마찬가지다. 국제관계에서 힘없는 약자는 언제나 동네북이고, 돈 없는 거지는 어디서도 환영을 받지 못한다. 외교에서는 강자의 논리와 돈의 논리가 확실하게 작용한다.

대중 관계에서 중국은 한국이 아프다고 해서 연고를 발라주고 반창고를 붙여 주는 나라가 아니다. 돈 있고 기술 있고 실력 있으면 대접하고 돈, 기술, 실력이 없으면 토사구팽하는 나라가 중국이다. 사드 규제로 수출이 힘들고, 유커들이 안 와서 힘들고, 한한령을 왜 안 풀어 주냐는 얘기는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 촛불로 정권도 바꾸는 나라의 콘텐츠를 중국이 수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돈이 말을 하면 외교가 입을 닫는다. 미국의 대중국 디커플링 전략에 유럽이 어깃장을 놓았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유럽은 경제가 어려워지자 먼저 첨단산업을 제외한 나머지 산업에서는 중국과 협력하자는 디리스킹 전략을 내걸었다. 선거를 앞두고 경제 하강이 두려운 미국 정부도 못 이기는 척 디리스킹 전략을 받아들이고 국무장관부터 줄줄이 중국으로 보내 중국과의 경제협력을 모색 중이다

경제난에 시달리는 프랑스의 에어버스를 사주고, 독일에 대규모 투자를 해주자 독일과 프랑스는 미국의 대중국 디커플링 요구를 무시하고 중국과 경제협력을 한다. 유럽의 맹주 독일과 프랑스가 중국 문제에 입과 귀를 닫았다. 중국과 무역 전쟁을 했던 쿼드 동맹 호주도 미국으로부터 잠수함 기술을 전수받고 입 싹 닦고 중국과 다시 친구 하고 있다.

미중 기술 전쟁의 종착역은 AI 전쟁이지만 하드웨어로 보면 AI의 인프라인 첨단 반도체 전쟁이다. 미국도 첨단 반도체에서 기술만 있지 공장이 없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제조업 국산화는 후진국이나 하는 것이지만 지금 미국은 40년 전 집 나간 반도체를 자국 내로 내재화하고 국산화하려고 법 만들고 보조금 주고 세금을 깎아 주는 등 안간힘을 쓰고 있다

미중의 반도체 기술 전쟁은 4차 산업혁명의 명운이 걸렸고 세계 패권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손'을 최고의 선으로 하는 자유시장경제의 종주국 미국은 경제 안보라는 이름으로 대놓고 정부가 보조금을 주고 지원한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사라졌고 정부의 천문학적 보조금과 시장 개입 그리고 장비, 기술, 제품의 동맹을 통한 대중 봉쇄도 한다. 자유 경쟁의 논리는 싹 무시하고 있고, 이를 어기면 정치외교적 압박도 하고 있는 실정이다.

룰(Rule)은 힘 있는 자가 만드는 것이다. 급해지다 보니 보조금은 시장경제 질서를 어지럽히는 나쁜 것이라고 중국을 제재했던 미국이 경제 안보라는 명분으로 이를 홀랑 뒤집었다. 전형적인 미국의 '내로남불'이지만 힘 있는 자의 룰의 변경일 뿐이다.

일본도 경제 안보라는 이름으로 반도체 산업에 정부의 '보이는 손'이 강하게 들어가고 있다. 여기에 중국과 유럽, 인도까지 첨단 반도체에 정부의 '보이는 손'이 대놓고 들어가고 있다. 전 세계가 반도체 산업에서 전쟁 중인데 지금 반도체 산업은 민간 기업의 기술과 경영 전략의 경쟁이 아니라 정부의 정책과 자금의 국가 대항전이다.

미국은 반도체 기술은 있지만 공장이 없고 중국은 공장은 있지만 기술이 없는데 한국은 다행히 반도체 기술과 공장이 다 있다. 지금 우리도 유일한 경쟁력인 반도체 산업 지원을 머뭇거리면 안 된다. 한국의 대중 관계, 대미 관계의 수명은 한국의 반도체 산업 수명과 같이 간다. 한국이 반도체에서 경쟁력이 사라지는 순간 한국은 미중 모두에게서 무시당하는 신세가 된다.

첨단산업에서는 뒷북치면 죽는다. 여소 야대 정국으로 야당 눈치 보는 한국은 미국, 중국, 유럽, 일본과 달리 반도체 산업에 대한 지원에 파격이 없다. 여야가 치열하게 싸워야 할 분야가 있고 함께 뭉쳐야 할 분야가 있다. 반도체에서 남들보다 적게 투자하고 이길 수 없다. 한중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일본과 중국의 파격적인 반도체 지원 정책을 한국도 제대로 벤치마킹하고 빨리 실행에 옮겨야 반도체가 살고 한국 외교도 당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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