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정치권에서 20년 전 사라진 과거 정치 문화로 여겨진 '지구당 부활' 문제가 큰 화두로 떠올랐다.
포문은 '추미애 국회의장 탈락'으로 강성 지지층 비판을 산 더불어민주당이 불만 잠재우기 차원에서 먼저 열었다. 당 지도부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 경쟁이 치열한 여권에서 더 큰 찬반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거대 양당이 지구당 부활에 뜻을 일치한다면 22대 국회 초반 법안이 처리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 하지만 '금권 선거' 문제를 다시 불러올 수 있는 데다 민생 현안이 산적한 상황 속 정치권이 정치 공학에 빠져 정쟁을 벌인다는 거센 민심의 비판을 살 수 있다.
지구당 부활은 결국 거대 양당 조직의 기득권을 강화하고 청년 등 정치 신인의 진입 장벽을 높여 정치 퇴행을 낳을 것이란 목소리도 크다.
◆거대 양당 '지구당 부활' 한목소리
여야는 22대 국회가 문을 열자마자 원외 인사들의 정치 활동 공간을 확보하고 '풀뿌리 민주주의'를 강화한다는 등 명분으로 지구당 부활을 외치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달 23일 부산에서 열린 민주당 당원 콘퍼런스 행사에서 지구당 부활을 언급하며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김영배 민주당 의원은 22대 국회 1호 법안으로 지구당 부활 근거가 담긴 정당법 일부개정법률안 등 3개 법안을 지난달 30일 대표 발의하며 보조를 맞췄다.
국민의힘에서도 맞장구를 치고 있다. 김 의원이 관련 법안을 대표발의한 같은 날 윤상현 의원도 지구당 운영 내용이 담은 정당법 일부개정법률안 등 관련 법안을 대표발의했다. 윤 의원은 "보수 가치를 재정립하고 수도권과 같은 험지에서 정당 기반을 강화해 주민과 소통하려면 지역 정치 활성화를 위한 인프라가 필요하다"며 지구당 부활의 명분을 밝힌 바 있다.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 역시 지난 총선 참패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취약한 지역 조직을 거론하며 지구당 부활론에 힘을 싣고 있다. 한 전 위원장은 최근 총선 출마 인사들을 만난 자리에서 "지난 선거를 치르며 원외 당협위원회를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며 지구당 부활 필요성을 언급했다.
거대 야당은 물론 주요 여당 당권 주자로 거론되는 한 전 위원장이 한 목소리를 내자 지구당 부활은 단숨에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가 됐다. 한 전 위원장은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에 "'차떼기'가 만연했던 20년 전에는 지구당 폐지가 정치 개혁이었지만 지금은 지구당을 부활하는 것이 정치 개혁"이라며 논쟁을 가속화했다.
여기에 나경원·안철수 등 주요 여당 당권 주자들도 일제히 지구당 부활에 동조했고, 이해 당사자인 원외 조직위원장들도 지구당 부활을 요구하는 성명을 냈다.
◆'지구당 부활은 정치 퇴행'
여야가 지구당 부활에 한 목소리를 내며 현실 가능성이 급작스럽게 높아지자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거세지고 있다. 지구당은 이미 대한민국 정치 역사의 오점으로 기록돼 부활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구당은 지역위원장을 중심으로 사무실을 두고 후원금을 받을 수 있는 중앙당 하부 조직이다. 2002년 대선 당시 '차떼기'로 불린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사건을 계기로, 정당법과 정치자금법이 개정돼 폐지됐다. 당시 개정안이 일명 '오세훈법'이었다.
당사자인 오세훈 서울시장은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에 "과거 지구당은 지역 토호의 온상이었다. 지구당 위원장에게 정치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이 지방의원을 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고 그들은 지역 이권에 개입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선거와 공천권을 매개로 지역 토호와 지구당 위원장, 당 대표 사이에 형성되는 정치권의 검은 먹이사슬을 끊어내고자 하는 것이 오세훈법 개혁의 요체였다"고 상기시켰다.
그는 "지구당은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극 제왕적 당 대표를 강화할 뿐"이라며 "지구당을 만들면 당 대표가 당을 장악하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그게 국민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고 또 한국 정치 발전에는 무슨 도움이 되겠나"라고 직격했다.
홍준표 대구시장도 지구당 부활 반대 대열에 합류했다. 홍 시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지금 벌어지는 지구당 부활 논쟁은 반(反)개혁일뿐 아니라 여야의 정략적 접근에서 나온 말"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결국 정치 부패의 제도적인 틀을 다시 마련하자는 것"이라며 "민주당은 개딸정치를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고 우리당은 전당대회 원외위원장 표심을 노린 얄팍한 술책에 불과하다"고 맹비난했다.
국민의힘 당 대표를 지낸 김기현 의원도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에 "지난 20여년간 군중 동원, 금권 선거 행태는 줄었다지만 그동안 고비용 저효율의 한국 정치가 얼마나 개선됐는지 따져보지도 않고 그저 전당대회를 앞두고 단순히 득표만을 위해 선심성으로 남발해서 풀 문제가 아니다"라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지구당, 정치 진입 장벽만 높인다
쏟아지는 비판에도 거대 양당이 지구당 부활 카드를 꺼내든 것은 현행 당원협의회(국민의힘)나 지역위원회(민주당) 형태가 정당법상 공식 조직이 아닌 탓에 한계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중앙당으로부터 제대로 된 지원을 받을 수 없으니 현수막 게시, 후원금 모금, 당원 관리에 이르기까지 활동에 제약이 적잖다. 특히 금배지를 달지 못한 원외 인사들은 재정·인력이 취약할 수밖에 없어 지구당 부활이 절실하다.
이 때문에 전당대회를 앞둔 거대 양당이 원외 인사 등 당내 표심을 자극하기 위해 지구당 부활 카드를 꺼내 들었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은 최근 당내 회의 후 백브리핑에서 지구당 부활과 관련해 "논의 과정을 보면 대부분 거대 정당 경우 자당 내 낙선자들의 민원 수요에 가깝게 나타나고 있고, 보통 전당대회 등을 앞두고 이런 주장이 거세졌다가 그 뒤로는 정치 개혁에 역행한다는 인식 때문에 논의가 한 발도 앞으로 못 나가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했다.
지구당 부활이 정치 진입 장벽을 높여 정치 신인의 진입을 더욱 어렵게 할 것이란 점도 지적했다. 이 의원은 "결국 지역 후보와의 유착 문제, 당협위원장 또는 지구당 위원장 본인이 다른 사람 진입을 막는 장벽을 치는 모습, 이런 것들이 나올 수 있다"고 비판했다.
유승민 전 의원도 2일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원외 위원장에게만 지구당과 후원금 모금을 허용하면 위원장이 아닌 정치 지망생들에게 불공정한 진입장벽이 또 생기는 것"이라고 지구당 부활론 비판에 가세했다.
그는 "원외 당협위원장을 위해 지구당을 부활하고 이들이 정치후원금을 받아 그 돈으로 사무실과 직원을 두고 정치활동을 하도록 해주면 당협위원장이 아닌 정치인들은 무슨 수로 정치활동을 하는가"라며 "그건 또 다른 진입장벽"이라고 지적했다.
금권 정치의 폐단을 불러올 수 있는 지구당 부활보다 근본적인 정치 개혁을 꾀해야 한다는 주문도 쏟아진다.
김기현 의원은 "지난 총선에서 의원정수 축소, 출판기념회 금지, 재판 기간 중 세비 반납 등 정치개혁안을 내세우며 '지금 합니다'라고 읍소해 놓고서 이제 와서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와 하등 상관없는 지구당 부활을 얘기하는 것은 이율배반이 아닐 수 없다"고 자신의 페이스북에 썼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도 최근 기자들에게 "지구당 부활이 현재 정치 개혁의 제1과제인지 도저히 동의 못 한다"며 "의회 민주주의 선진화를 위해 할 일이 많다"고 말했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국민들은 먹고사는 문제로 고통받고 있는데 국회는 역대 최악이란 오명을 썼던 21대 국회가 끝나자마자 자신의 정치적 이해득실만 따져 지구당 부활을 외치고 있다. 국민들이 얼마나 공감할지 의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미 실패했고 부작용이 뻔한 제도 도입에 힘을 쓸 게 아니라 불체포 특권 포기 등 그간 국민이 요구했던 정치개혁을 실천하는 게 우선"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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