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식객 이춘호의 미각기행] <12> 따로국밥의 뒤안길

사골육수 깊은 맛, 대파·무 시원한 맛, 고추기름 매운 맛
보신탕 활성화된 대구경북…개 대신 소·닭 넣고 끓이기도
여러 조리법 대구식 소고깃국…선지·무 넣은 '국일 따로국밥'
양지머리·마늘 양념 '육개장'…우거지 사용한 '선지해장국'
주요 식재료 '수구레' 국밥도

국일식당의 따로국밥
국일식당의 따로국밥

대구의 따로국밥과 맥을 같이 하는 대구육개장은 한국 소고깃국의 신기원을 이루고 그 종류가 너무 다양하다. 이런 인프라를 가진 곳은 단연 대구밖에 없다. 그 중 따로국밥의 원조인 국일식당의 주방 모습. 가마솥과 대파와 선지가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대구의 따로국밥과 맥을 같이 하는 대구육개장은 한국 소고깃국의 신기원을 이루고 그 종류가 너무 다양하다. 이런 인프라를 가진 곳은 단연 대구밖에 없다. 그 중 따로국밥의 원조인 국일식당의 주방 모습. 가마솥과 대파와 선지가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한국의 길은 오랫동안 좁다란 황톳빛이었다. 무명 보자기의 결이 어른거린다. 가난의 울림이 보릿고개 때 허기를 쥐어짠다. 그렇게 민초들은 다들 가난함을 필연이라 여기며 묵묵히 살아갔다. 가난표, 그 빛을 먹음직스럽게 품은 물건이 있다. '뚝배기'라 불리는 질그릇이다. 옹기토가 주재료이다. 그 그릇에 담기는 국밥. 옆에 놓인 고봉밥의 양은 현재 공기밥보다 족히 두 배는 많다. 고기 힘으로 버틴 게 아니라 '밥심'으로 명을 이었던 시절이었다.

◆외식의 여명기

보부상, 그리고 과거 보러 가는 유생, 연희단을 이끈 남사당패, 박물장수 등이 한국 외식의 여명기를 열었다. 한국의 외식은 주막과 장터국밥에서 비롯됐다. 별다른 메뉴가 있을 리 없다. 여러 음식은 길흉사 때 총출동했다. 하지만 일상에서는 묻지마 '장국밥'이었다. 국에 밥을 만 '탕반'(湯飯)이다. 된장‧시래기‧우거지‧선지 정도가 들어간 '풀국'이다. 일부 한양 양반들은 국을 배달시켜 먹었다. 행주산성 근처에 가면 국을 끓여 새벽같이 반가로 배송해주는 '갱촌'(羹村)이 있다. 여기서 끓인 게 '효종갱(曉鐘羹)'이다. 한말의 '속풀이 해장국' 스타일이다. 그 연장이 서울 종로의 '청진옥'이다.

서울의 탕반도 상놈과 양반처럼 계급이 있다. 무교탕반은 양반, 일반인은 마장동에서 발생한 '가리국밥' 스타일이다. 무교탕반은 밥에 국을 말지 않은 스타일이다. 가리국밥은 함경도 상인들한테서 생겨나 서울로 퍼져든다. 가리국밥 식사법은 독특하다. 처음에는 국물부터 마신다. 다음 건더기, 마지막에는 콩나물 국물에 지렁 등을 조금 넣고 비벼 먹는다. '안동 헛제삿밥' 같다. 마지막에는 고추장이 가미된다. 그럼 익산의 '황등비빔밥' 스타일로 넘어간다. 평양 '온반'(溫飯)도 북한식 탕반의 연장이다.

참고로 얘기하자면 양반은 국에 밥을 만 걸 꺼린다. 국밥을 천시한 것이다. 서민들의 탕반은 밥을 만 형태, 양반은 국 따로 밥 따로였다. 언뜻 대구 따로국밥이 중첩된다. 아무튼 5일마다 열리는 재래시장에 가면 기름기를 만날 수 있다. 사골육수가 일품인 소머리국밥, 곰탕, 돼지국밥 등이다.

선지를 사용하지 않는 옛집 육개장
선지를 사용하지 않는 옛집 육개장

◆보신탕과 육개장

장국밥은 '한국표 국밥'으로 각 고을마다 스타일이 모두 다르다. 그 다른 스타일이 지금의 'K-푸드 신드롬'을 일으켰다. 한국 국밥의 원형은 지금은 금기의 음식이 된 '보신탕'이다. 일명 '개장'. 가장 활성화된 곳은 대구경북이다. 만주권으로 이주한 경상도 출신 조선족은 지금도 손님 대접 음식 1순위로 이걸 낸다. 거기와 북한에서는 보신탕을 '단고기'라 한다. 이 보신탕이 국내에서는 씨가 말라버렸다. 반려견이 가족이 된 세상이 도래한 탓이다. 법안이 발효됐고 해당 식당들은 자구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고 정부에서도 보상 수순을 밟을 것이다. 경주의 한양식당, 71년 역사의 원대동 '대원명가'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 간다.

금기의 음식이 한식의 시원을 형성했다. 보신탕 재료가 개에서 소로 바뀌면 '육개장', 닭으로 바뀌면 '닭개장'이 된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토박이들은 육개장을 '대구탕'(代狗湯)이라 했다. '개 대신 소를 사용해 끓인 육개장'이란 의미다.

예전 운동회 길흉사 때 동네 할매 등이 끓여주던 방식의 시골잔치국밥 스타일을 간직한 온천골 국밥
예전 운동회 길흉사 때 동네 할매 등이 끓여주던 방식의 시골잔치국밥 스타일을 간직한 온천골 국밥

◆대구탕반의 전통

따로국밥의 전통은 '대구탕반'이 갖고 있다. 다행히 관련 기록이 있다. 1929년 발간된 종합잡지 '별건곤'이 12월호 특집으로 '천하명식 팔도명식물예찬'이란 코너를 마련했다. 이때 전주 모주, 신선로, 평양냉면, 서울 설렁탕 등이 소개됐다.

달성인이란 필자가 '대구의 자랑, 대구탕반'이란 글을 적었다. 대구탕반은 일명 '대구식 육개장'이었다. 따로국밥 이전에 형성됐던 대구식 소고깃국인 셈.

대구의 첫 탕반촌은 1601년 깃을 튼 대구읍성 정문 영남제일관 앞이었다. 광복 직후 이런 저런 식당이 줄을 잇는다.

대구 따로국밥 시발점인 국일식당의 창업주인 서동술‧김이순 노부부.
대구 따로국밥 시발점인 국일식당의 창업주인 서동술‧김이순 노부부.

광복 직후 대구 대표 3대 해장국집이 있다. 청도관‧청도집‧국일관(현재 국일따로국밥). 음식 스타일이 달랐다. 청도관은 '전통 대구식육개장', 청도집은 '선지우거지해장국', 국일관은 소피가 들어간 '선지사골육개장식'이었다.

청도관은 중앙파출소 서편 약전골목 초입, 청도집은 처음엔 만경관 동편, 나중에 교동따로 맞은편 심이비인후과 자리, 마지막에는 옛 상서여상 맞은편에서 최후를 맞는다. 김천 출신의 여주인 김출임이 운영하던 청도집은 아침에 마련한 200인분을 다 팔면 문을 닫았다.

이어 현재 서문시장 동산모자점 자리에 '대구탕집', 대구백화점 남문 근처에 '한국식당', 동산파출소 옆 시장북로 입구에 '동산관'과 '시장관', 달성공원 인근 미싱골목에는 '옛집 육개장', 한일극장 근처에는 '벙글벙글' 등이 생겨난다.

소의 부드러운 등피 아래층 연육을 갖고 끓인 소구레국밥
소의 부드러운 등피 아래층 연육을 갖고 끓인 소구레국밥

대구 인근에도 국밥으로 유명한 식당이 산재해 있다. 하양시장 내 문패 없는 할매 소머리국밥집, 의성 중앙시장 내 남선옥, 청도 풍각시장 내 소국밥집 등이 유명세를 날린다. 풍각 국밥은 김달마로부터 며느리 김소쌍분, 이어 그의 남편 강용달에게로 가업이 전승된다. 이 집에는 수구레가 들어간다. 수구레란 재료가 요즘 대구권에서 별미로 사랑받는다. 수구레는 소의 겉껍질과 속껍질 사이 연육이다. 현재 현풍 100년 도깨비시장과 고령 대가야시장이 메카로 불린다. 하지만 수구레 연조는 경남 창녕이 더 오래다. 삼오식당과 이방식당이 유명하다.

선지해장국 스타일의 대덕식당 소핏국
선지해장국 스타일의 대덕식당 소핏국

청도집은 육개장 전문은 아니고 굳이 비교하자면 대덕식당의 선지해장국 스타일이라 보면 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형성됐던 육개장 문화는 6.25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따로국밥으로 분화되고 거기에 대구식 육개장집들이 산재하게 되었다. 이 모든 식당의 소고깃국의 통칭은 뭘까? 대구육개장, 따로국밥 중 하나인데 절충점이 쉬 찾아지지 않는다.

◆소고깃국 명가

현재 대구의 소고깃국은 크게 세 개 문파가 있다. 따로국밥식, 대구육개장식, 그리고 선지해장국식이다. 당연히 같은 조리법을 갖지 않는다. 6·25전쟁 때 피란지 대구에서 태어난 국일 따로국밥(1946~)은 사골육수·선지·대파·무만으로 구성된다. 장터국밥·육개장·선지해장국의 통합스타일이다. 하지만 선지와 사골육수에 의존하지 않는 대구육개장은 일제강점기 서울로 수출된다. 서울에서는 '대구탕'(大邱湯)으로 불린다. 이건 서울식 육개장과 다른 레시피를 갖고 있다. 서울에서는 사태살을 결대로 찢고 거기에 당면, 유부, 심지어 고사리에 계란까지 푼다. 대구에서는 사태 대신 양지머리를 깍두기만큼 뭉텅뭉텅 썰고 무와 대파만 사용하고 고추기름과 마늘 양념을 많이 사용한다. 서울의 소고깃국은 일반 육개장과 달리 기제사 때 먹는 탕국과 흡사하다.

대구탕의 전통은 일본으로도 흘러 들어 갔다. 일본 고베에서 전통 대구탕 전문점을 경영하는 일본교포를 2012년쯤 대구에서 만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당시 75세의 이종수 씨. 그는 고베시 나가타에 대구탕집 '마루야카 쥬엔(苑)'을 오픈한다. 메뉴판에는 가타카나로 대구탕을 'テクタン'(데쿠탄)이라고 병기해 놓았다. 그의 대구탕에는 양지머리와 같은 정육이 들어가지 않고, 소꼬리를 식재료로 사용하는 게 특징이다.

국맛을 좌우하는 대파. 그 집산지는 고령군 다사면 호촌2리 파밭, 여기서 출하된 게 다끼파였는데 70년대초 경지정리과정에 대규모 파밭이 사라졌고 지금 그 일부만 살아남았다.
국맛을 좌우하는 대파. 그 집산지는 고령군 다사면 호촌2리 파밭, 여기서 출하된 게 다끼파였는데 70년대초 경지정리과정에 대규모 파밭이 사라졌고 지금 그 일부만 살아남았다.

◆다끼파의 추억

선지해장국식은 대덕식당이 전통을 갖고 있다. 무와 파 대신 우거지를 사용하고 나머지는 따로국밥 레시피와 비슷하다. 그리고 영남대 기숙사 근처에 있는 '온천골가마솥장터국밥'과 성암골가마솥국밥은 독특한 위상을 갖고 있다. 따로국밥과 대구육개장의 연결고리에 해당된다. 그 국에 밥을 말아놓으면 대구식 장국밥이 된다.

요즘 남구 대명9동에 있는 탐라 해장국, 그리고 수성구 두산동 수성하와이 옆 미풍해장국이 제주도 은희네해장국을 벤치마킹해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 현풍할매곰탕, 그리고 수구레국밥, 대덕식당의 선지해장국과 따로국밥을 하나로 절충한 스타일 같다. 가장 많이 진화된 형태라고나 할까. 아참, 안동 신시장 내에 있는 '옥야식당'도 기억해두자. 여기는 육개장이라 하지 않고 '선지국밥'이라 한다.

그리고 40년 이상 대파만 팔아온 대구 출신 '파 아저씨', 손성현 씨도 기억해두자. 대백 주자창 동편에서 지금은 원대동으로 건너왔다. 따로국밥 맛의 원천은 대파, 주산지는 고령군 다산면 호촌2리. 일명 다끼파. 일본 최고 종자회사인 다끼이가 일제강점기 대파 종자를 퍼트렸는데 이때부터 토박이들은 그 파를 다끼파라 했다. 매년 동절기 화원유원지 백사장에서 대파를 위한 파시가 열렸지만 70년대초 경지 정리 과정에 파밭이 거의 사라져버렸다.

40년 이상 국밥 주요 재료인 대파를 다듬어 공급해주고 있는 손성헌 씨
40년 이상 국밥 주요 재료인 대파를 다듬어 공급해주고 있는 손성헌 씨

자부심을 갖자. 이렇게 다양한 소고깃국 벨트를 가진 곳은 단연 대구밖에 없다. 따로국밥과 대구육개장의 스펙트럼을 하나로 묶는 '푸드인문학프로젝트'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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