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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철학이야기] 덕(悳), “마음 바로 쓰라”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여기로 몰려드는데,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릴케의 『말테의 수기』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가 감지했던 20세기 초 대도시 파리의 모습은 빈곤과 침체로 절망스러웠던 것 같다.

현재 이 땅에서 느끼는 심정도 별반 다를 바 없다고 본다. 꼬부라진 마음을 펴지 못하고 하루하루 가슴에 분노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 마음속은 시뻘겋게 불타는 집이다. 모두 살려고 바둥대는데, 오히려 함께 죽으려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북한이 보낸 오물 풍선이 남한 땅 여기저기에 떨어지고, 누구는 이혼소송으로 1조 이상을 물어야 할 판이고, 누구는 감옥에 가지 않으려 온갖 탄핵 카드로 안간힘이고…. 한 마디로 아수라고 난리 부루스다. 이 말부터 해두고 싶다. "중생아 제발, 마음 좀 바로 쓰거라!"

"마음 바로 쓰라"는 말에는 참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마음을 그릇되게 먹거나 마음을 삐뚤게 내지 말라는 뜻이다. '마음 바로 먹고, 바로 내는' 게 어려워진 세상이라 이런 말들이 더 어렵게 들린다. '마음을 먹다'는 것은 마음을 품거나 정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마음을 내다'는 것은 속에 들어있는 마음을 밖으로 드러낸다는 뜻이다.

마음 바로 쓰라는 말을 담은 글자가 있다. '덕(德)' 자이다. 이 옛 글자는 '곧을 직(直)' 자에 '마음 심(心)' 자를 합친 글자[悳]였다. 글자대로 읽으면 '곧은 마음' 혹은 '마음을 곧게 내다'가 된다.

그러나 올곧은 마음으로 덕 있게 살아가는 사람 주변은 썰렁하기 마련이다. 폭포수가 거침없이 직하하듯, 뒤돌아보지 않고 곧은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기어코 외로운 길을 걷는 일이기 때문이다. "덕 있는 자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고는 하나, 사실 이 말은 애써 위로하는 것처럼 들린다.

덕 있는 자의 길은 힘겹다. 그래서 예전에는 곧은 마음을 잘 찾아가라고 '진덕(進德)'이니 '입덕(入德)'이니 하는 말을 썼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곧음[直] 때문이며. 속이고 사는 데도 화를 면하고 있는 것은 요행일 뿐"이라고 했다. 이 땅의 '입벌구(입만 열면 구라)'들이 찾는 길은 곧음이 아니라 감옥 문이어야 한다.

역동 우탁은 도끼 상소로 유명하다.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와 통간하자 백의 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목숨을 걸고 간언했다. 받아들일 수 없다면 도끼로 머리를 쳐 달라, 죽어도 좋으니 그것만은 안 된다는 뜻의 상소였다. 이런 정신은 한 마디로 '곧음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무런 치장 없는, 그야말로 "발가벗은 맨몸의 힘"(naked strength) 말이다.

테니슨은 '참나무'라는 시에서 말했다. "네 일생을 살라,/젊은이 늙은이여,/저 참나무 같이, (…) 모든 그의 잎은/끝내 떨어졌다,/보라, 그는 우뚝 섰다,/줄기와 가지뿐,/발가벗은 힘을." 다 벗어던지고 우뚝 선 참나무에서 테니슨이 발견한 "발가벗은 힘"은 올곧음의 힘과 통한다. 이런 글을 읽으면 어딘지 위로받고 보상받는 듯해 감사하다.

조주 스님을 찾아오던 한 스님이 노파에게 물었다. "오대산으로 가는 길이 어느 쪽입니까?" 노파가 말했다. "똑바로 가시오." 스님이 서너 발자국을 옮기자 노파가 말했다. "참 멀쩡한 스님이 또 저렇게 가시다니." 자신의 마음에서 바로 찾으면 될 것을 왜 하필 큰스님을 찾아 둘러 다니냐는 비아냥이다.

우리 내면에는 햇살이 곧게 내리쬐는 빗살무늬가 있다. 내면의 태양이자 눈동자인 '밝은 덕'이다. 천지로부터 증여받은 선물이다. 이것을 밝혀 등불 삼아 본성의 양심대로 바른길을 곧장 가라고 한다. 잘 보라. '덕'과 '곧을 직' 자에는 모두 '눈동자(目)'가 들어있다. 해와 달이 바깥세상을 밝히듯이, 우리 몸에는 두 눈이 가야 할 길을 밝힌다. 결국 공부란 두리번두리번 내면의 덕을 찾는 과정이다. 이 덕이 개개인을 행복으로 이끌고, 공공적 지성을 열어간다.

『징비록』을 쓴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혼란상을 목도하고 "이러고도 우리가 오늘날 있는 것은 하늘이 도운 까닭이다"라고 했다. 그는 두 아들에게 부친 편지에서, 일찍이 퇴계가 손자에게 준 시를 인용한다. "소년 시절 산사의 즐거움 가장 아끼나니, 푸른 창 깊은 곳에 등불 하나 밝았구나. 평생에 허다한 그 모든 사업들이, 이 등불 하나에서 발원하여 나온다네."

세상의 부모들이 자식 공부시키는 뜻도 각자 "푸른 창 깊은 곳에 등불 하나 밝혀" 멋진 삶과 세상을 만들어 가보라는 것 아닌가. 교육, 교육 하지만, 사실 "마음 바로 쓰는" 인간이 만드는 일보다 더 큰 사업이 있을까.

다만 곧음이라는 것이 낡고 딱딱한 신념이 되어선 안 된다. 삶의 생동감은 순간순간의 소멸에서 나온다. 소멸하지 않으면 새로운 생성이란 없듯, 바르고 곧은 것일수록 수없이 에두를 때가 있다. 큰 곧음[大直]은 늘 빙 둘러서 가르치기에 굽은 듯하다[若屈]고 했다. 울퉁불퉁한 세월이 꾸부정한 우리네 인생을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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