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미술에서는 다양한 것들이 미술품으로 변모한다. 마르셀 뒤샹이 남성용 소변기를 '샘'이라고 명명한 이후, 결과물인 미술품보다 예술가의 아이디어, 즉 생각이 더 중요해지는 개념미술이 등장했다. 그 이후로 무엇이든 미술이 될 수 있다는 관점이 널리 퍼졌다. 그중에서도 이전에는 미술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던 글, 즉 텍스트가 미술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온 카와라(On Kawara)는 날짜와 시간에 초점을 맞춘 작업으로 유명하다. 그는 날짜만을 캔버스에 적어 넣거나 자신의 기상 시간을 엽서에 적어 보내는 작업을 통해 시간의 흐름과 인간 존재의 일상성을 탐구했다.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은 네온을 사용한 텍스트로 감정적이고 직설적인 메시지를 전달해 관람객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로렌스 와이너(Lawrence Weiner)는 물질적 형식 없이 텍스트 자체로 작품을 구성하며, 이는 작품이 설치된 공간과 관람자의 해석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미국의 미술가 제니 홀저(Jenny Holzer)는 텍스트를 주된 매체로 삼아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를 위해 그녀는 공공 공간, 디지털 화면, 건축 구조물 등 다양한 장소에 작품을 설치한다. 홀저의 작품에서 텍스트는 단순한 정보 전달의 수단을 넘어 사회적, 정치적, 철학적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강력한 도구다. 시각적 이미지만으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구체적이고 명확한 메시지를 텍스트를 통해 전달할 수 있기에 홀저는 수많은 매체 중 텍스트를 선택했다. 그녀는 간결하고 강렬한 문구를 통해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가며,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낸다.
또한 텍스트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보편적인 매체이다. 텍스트를 통해 작가는 사회적, 정치적 문제를 더욱 명확하게 제시하고, 관람객들이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예를 들어 그녀의 'Truisms' 시리즈는 사회적 통념이나 정치적 논쟁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문장들로 구성돼있다.
홀저는 텍스트를 다양한 형식과 매체에 적용한다. 포스터, LED 전광판, 프로젝션, 디지털 화면 등 다양한 방법으로 텍스트를 배치해 새로운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는 그녀의 작품이 시대와 기술의 변화에 따라 진화할 수 있게 한다. 더불어 홀저의 텍스트 작업은 관람객들이 자기 생각과 감정을 투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둬, 일상 속에서 예술을 접할 수 있게 한다.
누군가는 추상미술을 보며 무엇을 그린 것인지 몰라 미술을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며 그 뜻이 명확한 텍스트가 포함된 미술이 오히려 더 어려울 수도 있다.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야 하는 것과 잘 보이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미술이다. 텍스트와 미술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제니 홀저의 작품세계는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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