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6월 16일 대구-하양 간 국도. 배고픈 보릿고개도 어느새 9부 능선. 보리베기가 한창인 6월 중순, 도로에 난데없이 보릿단이 좍 깔렸습니다. 달리는 차량으로 손쉽게 타작하는 이른바 '차바퀴 보리타작'. 이곳을 비롯해 영천, 성서, 화원, 칠곡 등 국도마다 타작하는 농민들로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마른 보릿단은 미끄럽기 그지없어 운전자들에겐 살얼음판. 짐 실은 트럭은 엉금엉금, 사람을 태운 버스는 지각 도착이 일쑤였습니다. 이 때문에 사고도 잦아 경찰이 뜨면 보릿단도 팽개치고 줄행랑을 쳤습니다. 도리깨질에 비하면 일도 아니어서 농민들은 차바퀴의 유혹을 쉬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시작은 억수 같이 비가 내린 3년 전 일이었습니다.
1963년, 삼남지방에 구질구질한 봄비가 그칠 줄 모르더니 끝내 장마로 이어졌습니다. 5월 27일, 봄 강우로 경산 들판엔 쓰러진 보리가 이미 3~5할. 6월 16일부터 시작된 장마에 태풍 '샤리'마저 북상해 25일까지 대구엔 270mm가 넘는 비가 내려 베어 놓은 보릿단이 물에 둥둥 떠다녔습니다.
쉴 새 없는 장대비에 손을 못써 거름 취급 받는 보릿단…. 그래도 건져야 한다고 탁류가 휩쓰는 동촌에선 배를 저어 보릿단을 날랐습니다. "올해 보리농사는 헛농사." 60년 만의 대흉년으로 91만 농민(전 농민의 35%)들이 보리농사를 망쳐 살길이 막막해졌습니다.
도처에서 보리에 수염 같은 싹이 나고 썩어가던 6월 25일, 영천읍(시)과 금호면(읍)에선 군·관·민·학생들이 밤낮없이 도리깨질을 해댔습니다. 영천 탄약사령부가 지원한 조명 발전기로 불을 켜고 철야로 건져낸 보리는 1천500석(1석=10말). 타작한 보리는 아스팔트 도로에 널어 말렸습니다. 비가 오면 걷고 그치면 또 널고…. 국도 십리(4km)길이 보리로 덮혔습니다.
30일 밤, 박경원 경북지사가 영천 타작 현장을 새벽까지 지켜보고는 급히 시장·군수들을 도청으로 불러들였습니다. "도내 전 포장 도로를 이용해 마지막 순간까지 한 톨의 보리라도 건져야 한다!" 7월 1일부터 '거도적 보리건지기운동'이 시작됐습니다.
물에 잠긴 보리도 뜨끈한 아스팔트에선 하루면 충분. 날이 개자 각지에서 철야로 타작이 시작되고 도로마다 보리가 한없이 깔렸습니다. 영천의 기적, 신박한 '국도 아스팔트 건조' 덕에 헛농사라며 낙심했던 1963년 경북도 보리농사는 그래도 평년의 반타작, 76만석은 족히 건질 수 있게 됐습니다.(매일신문 1963년 6월,1966년 6~7월)
이때부터 도로에서 보리 말리기가 시작돼 농민들도 차츰 꾀가 늘었습니다. 바싹 마른 보릿단 위로 차바퀴가 구르자 절로 되는 탈곡…. 힘든 도리깨질을 왜 했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교통량이 늘고 미끄러운 보릿단에 사고도 많아 차바퀴 보리타작은 점차 자취를 감췄습니다.
1966년 경북도 보리수확 예상량은 무려 평년 대비 210%. 조기 파종 등 보리 증산운동에 하늘까지 도와줘 단군 이래 대풍이라 했는데 날벼락이 쳤습니다. 가마당 정부 매입가가 생산비(1천493원)에 턱도 없는 1천5원. 3년 전엔 흉년으로, 이번엔 서글픈 풍년으로 농심은 또 탈탈 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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