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그립습니다] 자식에겐 언제나 다정다감…아버지 애창곡은 '애국가'

임창아 시인의 아버지 故 임용표 씨

50년전 제주도 감귤밭에서 찍은 아버지 고(故) 임용표 씨. 임창아 씨 제공
50년전 제주도 감귤밭에서 찍은 아버지 고(故) 임용표 씨. 임창아 씨 제공

높고 외롭고 쓸쓸한 이 세상 모든 아버지들은 하늘나라에 산다. 좀 이르거나 좀 늦더라도, 그리하여 아버지들은 자식들의 가슴에 영원히 산다.

보물섬 남해, 태풍이었고 폭풍이었던 그해 여름, 우리 집 전 재산이었던 배 두 척, 산산이 부서진 고깃배가 궤도를 이탈하였다. 그리하여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사라져가던, 아버지로서의 삶이란 이탈한 궤도에 진입하는 것이었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도 문득 뚜렷해지는 것이 있다. 미닫이문과 대청마루가 있는 의원이었고, 수족을 쓰지 못해 누워만 계셨던 아버지, 꿈같고 생시 같은 아버지에 대한 아픈 첫 기억이다.

부자는 망해도 삼년은 간다 했는데, 쌀밥 구경은 아버지 밥그릇에서나 듬성듬성 보일 정도였다. 언제나 밥을 남기셨던 이유를 그땐 몰랐다. 그냥 습관인 줄 알았다. 어린 딸들에게 먹이고 싶어서였다는 것을 자식을 낳고서야 알았다.

아버지는 훈육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늘 그것이 불만이었다. 사자처럼 용맹하고 호랑이처럼 무서웠다면 지금 이 글을 쓸 수 있었을까? 그런 아버지가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에게 몽둥이를 들었다. 담배 심부름을 하라고 했는데 밖이 무서워 모른 척하고 있었다. 불현 듯 날아오는 몽둥이에 딱 한 대 맞았지만, 걸음을 걸을 수가 없어 기다시피 심부름을 다녀왔다. (시골이었고 옛날이어서 그때는 초등학생도 담배나 술을 살 수 있었다)

얼마나 서럽고 원망스러웠던지. 자신도 모르게 몽둥이를 든 아버지의 마음은 또 어땠을까? 미안하고 안쓰러워 왕복 십리를 걸어 귤 한 봉지를 사 오셨다. 당시만 하더라도 귤은 동네가게에서 파는 품목이 아니어서 면소재지에 가야 살 수 있었다. 내 생애 그렇게 슬프고 아프고 기쁜 귤은 처음이었다.

70년전 결혼 사진. 아버지 고(故) 임용표 씨, 어머니 고(故) 김옥만 씨. 임창아 씨 제공
70년전 결혼 사진. 아버지 고(故) 임용표 씨, 어머니 고(故) 김옥만 씨. 임창아 씨 제공

어쩌다 사석에서 노래 부르게 될 때 나는 '봄날은 간다'와 '애국가'를 부른다. 그런데 얼마 전 내 노래(애국가)의 근원이 아버지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빠인지 언니인지 결혼식 날, 예식장을 다녀오던 대절 버스 안, 하객들은 하나같이 혼주니까 노래 한 곡 뽑으라고 부추겼다고 한다.

아버진 노래도 못하고 아는 노래도 없다고 손사래 쳤는데, 동네 분들은 하나같이 그런 법이 어디 있냐며 극구 밀어붙여 딱 한 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른 노래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였다고 한다. 그런 사실을 사십여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왜 애국가가 그렇게 슬픈 지. 나도 모르게 내 입술을 맴도는 지, 오랫동안 맞지 않던 퍼즐이 딱 맞는 느낌이었다. '봄날은 간다' 역시 실은 엄마의 십팔번이었다. 그러니까 내 십팔번은 엄마와 아버지의 유전인 셈이다. 노래도 유전된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얼마 전, 울산 대왕암에 놀러 갔을 때, 한 아저씨가 '아이스케끼' 통을 놓고, 아이스케끼! 를 외쳤다. 문득 어린 시절 아버지가 소환되었다. 어린 딸들의 일손이 필요할 때는 꼭 아이스케끼를 사 주곤 했다. 고사리 손을 빌린 미안함과 아이들과 함께하고 싶은 두 마음이 작용했던 것 같다.

자식들에겐 다정다감했고 이웃에겐 양보와 배려가 몸에 베인 아버진 57세 간경화로 돌아가셨다. 밤꽃향기가 지천을 흔드는 장례식 무렵, 남해 들판은 마늘 뽑기를 끝내고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하지만 우리 논만 때를 놓친 마늘대가 말라 가고 있었다. 장례가 끝나고 상주옷을 벗지도 못한 채 식구들 모두 논에 뛰어 들어 마늘을 뽑았다. 흰 소복을 입은 얼굴로 땀과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지금도 마늘 논만 보면 그 때 기억이 밀려온다.

밤꽃향기 번져오는 오월이 되면 '아, 아버지 제삿날이 다 되었구나' 생각한다.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 왔는지 이탈한 궤도를 진입하기 위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자식들을 뱅뱅 돌았을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너무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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