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라언덕] 각자도사(各自圖死)

허현정 디지털국 기자
허현정 디지털국 기자

가족 중 아픈 사람이 생기면 온 집안이 걱정에 휩싸인다. 병원을 어떻게 알아봐야 할지, 치료 경과가 좋지 않으면 다음 단계에선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회복할 때까지 생계는 누가 책임지고, 어린 자녀는 어떻게 돌봐야 할지만 머릿속에 차 있다. 동시에 다른 일들에는 비교적 초연해진다. 건강했다면 관심을 뒀을 문제들이 아픈 상태에선 사치스러운 생각이 된다.

지금 대다수 환자도 마찬가지다. 정부와 의사 중 누가 더 맞는 말을 하는지 따진다거나, 한쪽 편을 들 여력이 없다. 지금 중병을 앓는 환자들은 각자도생(生)을 넘어 각자도사(死)의 사지로 내몰리고 있다. 정부든 의료계든 기댈 곳이 없다. 오히려 지금 환자들에겐 같은 병을 앓는 환우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만이 속 시원한 상담 창구다. '신규 환자는 당분간 받지 않는다'는 대학병원에 좌절한 환자에게 지금 예약 가능한 병원이 어디인지 서로 알려 준다. 수술이 연기된 후 아직도 일정이 잡히지 않았다며 절망하는 환우들을 애써 다독인다.

의정 갈등 초반 환자들은 주로 의료 현장을 떠난 의사들에게 실망감을 표출했다. 의료계에서 이따금 나온 원색적인 발언은 환자들의 분노를 더욱 끓게 했다. 휴진에 참여하지 않는 의사를 비난하는 모습은 환자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로 비쳤다. 정부와 협상을 이어 가도 모자란 시점에 보인 의료계 내분 역시 하루하루가 급한 환자들에게 실망감만 줬다.

정부의 태도도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 방치된 환자들에게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넉 달 동안 이어진 강 대 강 대치가 한 발짝도 진전되지 않았다. 정부가 매번 내놓는 말은 "엄정 대처" "원칙 대응"과 같은 알맹이 없는 말뿐이다. 사태 초반 "전세기를 내서라도 환자를 치료하겠다"며 의료 공백을 수습하려고 한 정부 의지는 어디로 갔는지 의문이다.

지금 휴진을 선언한 의대 교수들이 의료 일선으로 복귀하더라도 문제는 남아 있다. 전공의들이 온전히 복귀할 가능성이 요원하다는 점이다. 교수들의 피로는 갈수록 쌓여 갈 것이다. 병원에서 이탈하려는 교수들도 점차 늘 수밖에 없다. 살얼음판 같은 지금 상황이 한동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환자와 그 가족의 불안도 지속할 것이다.

정부가 애초 목표했던 의대 증원 절차가 사실상 끝이 났다. 지난달 전국 의대들이 내년도 의대 증원분을 반영한 신입생 모집 요강 공개를 마쳤다. 이제 정부는 환자들의 불안감을 끝낼 현실적인 방안을 찾아야 할 때다.

의정 갈등을 겪을 때마다 전공의들의 장시간 노동으로 지탱했던 대형 병원들의 민낯이 드러난다. 수련 중인 의사들이 의료 현장을 떠나면 중증 환자들이 아우성치고 대학병원이 흔들린다. 젊은 의사들의 몇 개월 공백에 얼마 안 가 대학병원들이 연달아 도산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환자들은 전공의가 돌아와야 파국이 끝난다고 말한다. 결국, 사태 해결의 중요한 열쇠는 전공의들인 셈이다. 그렇다면, 정부는 젊은 의사들의 마음을 돌릴 만한 보상은 충분히 제시했는지 돌아봐야 한다. 의술을 연마할수록, 환자를 살리는 수술을 할수록 미래에 더 큰 보상으로 돌아온다는 확신이 들 방안을 선보였는지 살펴봐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가장 중요한 건 환자다. 정부가 추진하는 의료 개혁의 최대 수혜자 역시 환자여야 한다. 이 과정에서 환자만 죽어나는 개혁은 훗날 성공하더라도 반쪽짜리 성공이란 평가를 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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