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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주석궁 폭격 작전' 생생…'공군의 전설' 이재우 장군 [뉴스캐비닛]

이재우 동국대 석좌교수…1969년 도입 당시 인수조종사
韓 공군력 증강시킨 '팬텀'…"압도적 전력에 北 대결 포기"

1969년 미국에서 팬텀기를 처음으로 한국에 몰고 온 1호 조종사 이재우 동국대 석좌교수(예비역 공군 소장). 매일신문 유튜브 〈이동재의 뉴스캐비닛〉
1969년 미국에서 팬텀기를 처음으로 한국에 몰고 온 1호 조종사 이재우 동국대 석좌교수(예비역 공군 소장). 매일신문 유튜브 〈이동재의 뉴스캐비닛〉

- 방송: 매일신문 유튜브 〈이동재의 뉴스캐비닛〉 (평일 07:30~08:30)

- 진행: 이동재 매일신문 객원편집위원

- 대담: 이재우 동국대 석좌교수(예비역 공군 소장)


▷이동재 객원편집위원(이하 이동재): 1969년 8월 29일 대구 공군기지에 커다란 태극기를 그려넣은 F-4D 팬텀기 6대가 착륙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 있는 사열대 앞을 저공 비행해서 활주로에 내렸는데요. 당시 극빈국이었던 우리나라는 미국과 영국, 이란에 이어서 당대 최첨단 전투기였던 팬텀기를 세계 4번째로 보유한 국가가 됐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고강도 훈련을 받은 뒤 팬텀기를 몰고 최초로 태평양을 건넜던 공군의 전설을 모셨습니다. 90살 현역 예비역 공군 소장이신 이재우 동국대 석좌 교수님을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 역시 공군 장교 출신으로서 공군의 전설을 뵙게 돼서 대단히 영광입니다.

▶이재우 동국대 석좌교수(이하 이재우): 저 역시 영광입니다.

▷이동재: 제가 그런 의미에서 경례 한번 하고 시작하겠습니다. 필승! 제가 정말 오늘 같은 날을 기다렸습니다. 언론계에 있으면서 가장 정말 영광스러운 날 중 하나입니다. 아까 장군님하고 악수를 했는데요. 악력이 대단하세요. 올해 연세가 90세 맞으세요?

▶이재우: 예. 그렇습니다.

▷김새봄 칼럼니스트(이하 김새봄): 믿기지 않네요. 너무 정정하셔가지고. 숫자가 믿기지 않습니다.

▷이동재: 저희가 장군님을 모신 게, 이번 6월이 호국보훈의 달 아닙니까? 근데 지난 6월 7일에 우리나라에 55년간 영공을 책임을 졌던 팬텀기가 드디어 퇴역을 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이제 팬텀기를 최초로 우리나라에 타고 오셨고, 조종을 하신 조종사세요. 그래서 저희가 공군의 전설을 한번 모시고 오늘 대화를 좀 나눠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장군님 일단 어떻게 공군사관학교에 입대하게 되셨는지 그 얘기부터 먼저 좀 듣고 싶어요. 어떻게 파일럿이 되셨는지.

▶이재우: 저는 사관학교에 입교할 당시가 6.25 전쟁 중이었습니다. 가정적으로 6.25에 피해를 많이 입고 군인이 돼서 제가 가지고 있던 모든 한을 좀 풀고 싶은 마음이 늘 마음속에 있었는데 그런 거에 연속으로 사관학교에 입교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사관학교에 일단 들어가서는 비행기를 타고 그래야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생각을 하고 아주 전력을 다해서 조종사가 됐죠.

▷이동재: 대단하십니다. 진짜 당시에 그리고 우리나라 팬텀기를 도입할 때 얘기도 좀 해볼게요. 1968년이었잖아요. 당시에 우리나라에 팬텀기를 어떻게 해서 들여오게 됐습니까? 우리나라의 북한과의 분쟁 상황이 영향을 끼쳤다 그렇게 얘기하는 것 같던데요.

▶이재우: 네. 그때까지만 해도 팬텀기와 같은 그런 최신 기를 공군에서 가질 수 있다는 건 예상도 못하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국가의 안보 상황이 그때 아주 매우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청와대 김신조 그룹의 청와대 기습 사건입니다. 이루어지지 못한 그러한 기습 사건. 그다음에 원산 앞바다에서 미군들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그다음에 미군들 정보 정찰기에 격추 사건 이런 것들이 동시에 겹치다 보니까 그때 안보 상황이 매우 심각했습니다.

▷이동재: 예

▶이재우: 그러한 상황에서 언제 전쟁이 발발될지도 모르는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미국 측하고 한국 측이 이제 합의가 됐던 한 부분 중에 하나가 전력을 증강시켜야 되겠다. 그래야 앞으로 생기는 도발에 대해서도 막을 수가 있겠다 이런 식으로 전략이 세워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요구하기를 공군 전력으로 팬텀을 달라. 근데 그 당시에 미 측에서 1억불의 군사 원조를 해준다고 제의를 했다고 하는데 육군은 탱크를 더 사야 되겠다. 해군은 배를 더 증강시켜야 되겠다. 이제 공군은 이제 그중에 하나가 팬텀을 달라 이런 식으로 각 군에서 전력 증강하는데 야단들이었다고 하죠. 근데 대통령께서 최종 결심이 이번에는 공군 전력을 강화시켜야 되겠다 그래서 팬텀으로 결정됐던 것 같습니다.

1969년 미국에서 팬텀기를 처음으로 한국에 몰고 온 1호 조종사 이재우 동국대 석좌교수(예비역 공군 소장). 매일신문 유튜브 〈이동재의 뉴스캐비닛〉
1969년 미국에서 팬텀기를 처음으로 한국에 몰고 온 1호 조종사 이재우 동국대 석좌교수(예비역 공군 소장). 매일신문 유튜브 〈이동재의 뉴스캐비닛〉

▷이동재: 당시에 또 미국이 우리나라에 팬텀기를 판매를 하지 않으려고 했었잖아요. 지금으로 치면 팬텀기는 F22 정도 되는 완전 최첨단 전투기였으니까요.

▶이재우: 그렇습니다. 그 당시에 전 세계적으로 최신의 비행기 첨단 최신의 비행기가 팬텀이었으니까요. 그거를 갑작스럽게 한국 공군에다가 준다는 거는 엄청난 전력 증강이라고 볼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미 측에서는 좀 주저했을 겁니다.

▷이동재: 그런데 당시에 박정희 대통령이 "어떻게 해서든지 팬텀을 갖고 와라" 또 이렇게 말씀을 했다 이런 얘기가 있어요.

▶이재우: 네. 팬텀이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북측하고 우리 공군력이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말하기에는 좀 애매했던 그런 전력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안보 상황을 하루아침에 모든 걸 극복하고 안정시킬 수 있는 그런 전력이, 차별화된 레벨업된 전력이 있어야 된다는 게 아마 대통령께서 결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팬텀을 들어오게 되면 그때는 확실하게 공군력에 관한 하는 아주 업그레이드가 돼서 굉장한 전력의 차이가 나죠. 사실상으로 그것이 그 뒤에 도입한 이후에 역사적인 사실로 다 입증이 됐으니까요.

▷이동재: 북한이 단 한 번도 공중 침투 도발을 한 적이 없는 거죠. 그때부터?

▶이재우: 도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항공기의 성능 자체가 북측에서 가지고 있는 비행기에 비교도 안 될 만큼 이쪽이 우수하고. 그리고 기동력이라든지 이런 전투 역사로 봐서 이거는 비교가 안 되는 그런 성능을 가진 전력이기 때문에 그 뒤에 참아도 자신 있게 아주 기쁘게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팬텀이 들어온 이후에 대북 전력 또는 적의 억제 면에서 모든 작전에서 다 성공했어요. 한 번도 실수를 했던 그런 경우가 없이 작전이 이루어질 때마다 다 성공했어요. 그러니까 북측에서는 아예 이렇게 대결하려고 하는 그 자체를 포기했던 것 같아요. 그 정도의 전력이었습니다.

▷이동재: 제가 잠시 후에도 설명을 드리겠지만 저희 이재우 장군님께서 팬텀을 가지고 온 것뿐만 아니라 역사의 현장에 또 계속 이름을 남기셨어요. 제가 그 말씀도 좀 이따가 또 말씀드리겠습니다. 근데 저희는 장군님이 미국에서 팬텀을 가지고 오기까지의 과정이 좀 궁금해요. 미국으로 어떻게 파견을 가신 건지 그다음에 어떻게 훈련 과정을 거친 후에 또 한국으로 오게 되셨는지 그 말씀 좀 여쭙고 싶습니다.

▶이재우: 미 측에서 한국에다가 최신의 비행기를 안 주려고 했던 그 주저했던 것이 사실이었던 것 같고요. 그러다 보니까 그때 얘기가 한국 공군에다가 팬텀을 줘도 정비 면에서 무장 면에서 그리고 조종사들의 비행 기량 면에서 '이건 정말 타지 못하는 그런 첨단 비행기다' 하고 안 주려고 했던 거를 한국 측에서 그런 소리 하지 말고 하여튼 절대적으로 내놓으라고 요구를 했던 거니까 훈련 받으러 가는 조종사들이 웬만한 조종사가 가서는 안 되죠. 그러니까 선발할 때 대단한 여러 과정을 거쳐서 엄선을 했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어학 실력도 좀 있어야 되고 비행 사고도 오랫동안 한 번도 없었던 사람 그런 사람을 선발해서 미국 훈련을 갔습니다. 미국 가서 훈련을 받는 동안에 미국 교관들이 볼 때도 한국 공군의 수준을 그렇게 높이 안 봤습니다. 처음에 훈련시킬 때는 그래서 공중에서 이제 가장 기초적인 훈련에서부터 최고의 기량의 훈련까지를 고급 훈련까지를 시키는 과정에서 한국 조종사들을 교육을 시켜보니까 공중에서 사격 훈련한다든지 공중전 연습을 한다든지 할 때 훈련을 시켜보니까 생각보다 더 수준이 높은 거에요. 그래서 조종사들이 내려와서 그 후담입니다만 교관들끼리 그랬대요. 내가 태우는 한국 공군 조종사가 그놈은 상당히 수준이 높더라 비행기를 잘하더라 그랬더니 옆에 있는 아니 나하고 탄 형도 상당히 잘하는데 이래가지고 교관들끼리 이번에 훈련받으러 온 사람들 아주 상당히 기량이 높다 이래가지고 그 평가를 한 이후에는 우리가 대우를 받으면서 훈련을 했어요. 그래서 공중에서 이제 마지막 훈련 다 끝나고 나서 최종 공중전 연습을 하는데 그때는 미군 교관 조종사 한 사람에다가 한국 공군 조종사 한 사람의 1대 1로 공중전 연습을 하는 겁니다. 결과가 나와야 되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그 결과가 50%였어요. 미국 교관 조종사가 물론 학생을 이기는 것이 50%였지만. 한국 조종사가 교관들을 이긴 게 50%에요.

1969년 8월 29일 공군 대구기지에서 열린 팬텀기 인수식 당시 모습. 팬텀기 최초 인수 조종사 6명은 미국 본토를 출발해 공중 급유를 받으며 한반도로 날아왔다. 이재우 교수 제공.
1969년 8월 29일 공군 대구기지에서 열린 팬텀기 인수식 당시 모습. 팬텀기 최초 인수 조종사 6명은 미국 본토를 출발해 공중 급유를 받으며 한반도로 날아왔다. 이재우 교수 제공.

▷이동재: 우수했네요.

▶이재우: 대단히 아주 높은 그런 평가를 받으면서 대우받으면서 훈련받고 왔습니다.

▷이동재: 당시에 이제 6분이 파견이 되고 미군 공군기지에서 훈련을 받고 그다음에 한국으로 돌아오신 건데 처음에 일단 팬텀 조종간을 잡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이거 정말 좋다?

▶이재우: 비행기가 상당히 타기가 어렵다는 얘기를 미측에서 하도 강조를 해서 시동을 걸고 비행기 제일 처음에 뜰 때 그때까지 사실 마음속으로는 의심도 가고 정말 이렇게 어려운 비행기인가 의심도 가고 또 그게 자꾸 머릿속에 떠오르고 그래서 긴장도 했고 그런 상태였는데 제 경우에는 팬텀이라는 비행기를 제일 처음에 시동을 딱 걸고 활주로에 나가니까 비행기가 뭐 엄청나게 육중하고 그 출력을 넣으니까 출력이 아주 그냥 대단히 이제까지 타던 모든 비행기보다도 훨씬 출력이 아주 강하고. 그런 걸 느꼈어요. 그래서 참 아주 좋은 비행기다 하는 그런 호기심도 잔뜩 일어나고 그래서 활주로에 갖다 대고 그러면서 이륙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음속으로 이 비행기가 정말 안전하게 뜰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출력을 확 넣었는데 생각보다도 짧은 거리에서 확 비행기가 그냥 쉽게 뜨더라고요.

▷이동재: 힘이 그렇게 좋은 거네요.

▶이재우: 아주 출력도 좋고. 그 이유가 보통 때 출격할 때는 폭탄을 12발을 달고서 뜨는 그런 비행기인데 폭탄을 안 달고 뜨니까 그 비행기가 너무 가벼운 거죠. 그러니까 너무 쉽게 떴는데 비행기 뜨자마자 공중에서 제가 조종간을 가지고 좌우로 흔들면서 이렇게 해봤더니 아주 비행기가 그렇게 스무스하고 아주 그냥 기동도 좋고 그래서 속으로 정말 마음에 드는 비행기다 하고 최신의 비행기라는 걸 그때 아주 실감을 했죠.

▷이동재: 역시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 사람들한테 "이거 팬텀기 안 팔 거면 청와대 들어올 생각도 말라" 이렇게 했다는데 그만큼 좋은 비행기네요.

▶이재우: 그만큼 진짜로 좋은 비행기였습니다.

▷김새봄 칼럼니스트(이하 김새봄): 또 미국에서 그렇게 어렵게 공수. 우리가 가져온 팬텀 비행기를 몰고 오실 때 그 순간순간이 굉장히 기억이 선명하실 것 같아요.

▶이재우: 네. 비행 훈련을 다 마치고 나서 이제는 여객기를 타고 편한 마음으로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야 되겠다 이런 마음 자세를 가지고 있는데 갑자기 한국에서 메시지가 왔는데 빨리 훈련이 끝났으면 있는 방법 최대의 방법으로 빨리 한국으로 돌아와라 하는 게 지시였습니다. 그런데 빨리 돌아오라고 그게 뭐 돌아올 방법이 없는 거지요. 우리가 볼 때는. 그런데 미측에서 이제 한국의 요구이니까 상당히 검토를 했던가 봐요. 그 대답이 참 어렵기는 어려운데 방법이 하나 있긴 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그 방법이 뭐냐 그 방법으로 빨리 와라 그러니까 공중 급유하면서 가면 하루라도 간다 이렇게 답이 청와대로 간 거예요. 청와대에서 공중 급유해가지고 그러면 빠른 시간 내에 빨리 귀국해라 그래서 그때부터 공중 급유를 한 번도 받아본 일도 없고 경험도 없는데. 미군들 교관들이 이렇게 하는 거다 하는 얘기가 극적으로 훈련을 받아가면서 그래가지고 공중 급유를 받아가지고 한국까지 돌아왔죠.

▷김새봄: 이게 조금 저는 개인적으로 또 군필자시지만 저는 미필이니까 그 궁금증 중에 공중 급유라는 게 그냥 공중에서 정말 날아가면서 급유를 해준다는 의미인가요?

▶이재우: 네 그래요.

1969년 8월 29일 공군 대구기지에서 열린 팬텀기 인수식 당시 모습. 팬텀기 최초 인수 조종사 6명은 미국 본토를 출발해 공중 급유를 받으며 한반도로 날아왔다. 이재우 교수 제공.
1969년 8월 29일 공군 대구기지에서 열린 팬텀기 인수식 당시 모습. 팬텀기 최초 인수 조종사 6명은 미국 본토를 출발해 공중 급유를 받으며 한반도로 날아왔다. 이재우 교수 제공.

▷김새봄: 비행기가 그 초고속으로 날아가면서 그걸 급유를 한다고요?

▶이재우: 그렇습니다. 연료를 가지고 있는 여객기 같은 큰 비행기가 연료 가지고 있는 비행기가 일정 지역에서 돌고 대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전투기들이 연료가 떨어질 만큼 가는 위치에서 대기하고 있으니까 그 연료기한테 전투기가 접근을 해요. 접근을 해서 그 연료를 이렇게 급유해줄 수 있는 그 위치까지 들어가서 딱 유지하죠. 자세를. 그러면 그 급유기에서 파이프를 가지고 전투기에다가 연결을 시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파이프가 이렇게 이렇게 움직이는 상태에서 전투기의 이 위에 등 부분까지 와서는 이 사격을 하는 것처럼 파이프에다가 팍 쏘게 되면 그 순간에 파이프에 있는 조그마한 파이프가 전투기하고 연결이 딱 됩니다. 그런 순간에 얼마나 빠른 압력을 가지고 공중 급유를 하는지 그 짧은 시간에 탁 집어넣어가지고 단시간 내에 그냥 급유가 돼요.

▷이동재: 모든 게 다 실전이었네요. 연습도 지금.

▷김새봄: 아니 그 비행기의 속도를 공중에서 맞추는 거를

▶이재우: 일단 딱 똑같이 맞춰야 돼요. 가는 비행기하고.

▷김새봄: 연습을 해본 적도 없이

▶이재우: 그거는 조종사들의 상식이에요. 딱 그게 바로 특수기 같은 거 할 때 딱 붙어 있는 거랑 똑같은 거니까요.

▷이동재: 그렇게 급유를 하셔가지고 이제 한국에 들어오셨는데 들어오실 때 태극기를 또 전투기에다가 그려놓으셨다고 이렇게 얘기를 들었어요.

▶이재우: 급유를 받아가면서 한 번 받을 때까지는 긴장했죠. 긴장하는데 한 번 받아 두 번 받아 이렇게 5번 6번 쭉 받으면서 이렇게 쭉 오는 과정에서 자신감도 생기고 그래가지고 일본까지 우리가 도착했는데 그때 밑에를 딱 보니까 일본 열도가 이렇게 보여요. 빨리 한국으로 가면 참 기쁘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왔는데 밑에서 항공관제 시스템에서 연락이 오기를 태극기 그렸느냐 그래서 태극기 그렸다. 그럼 어떻게 그렸느냐 미군 성조기를 지우고 그 자리에다가 태극기를 그렸다 했더니 그러면 그렇게 적은 거 가지고는 안 된다. 너무 작아서 그러니까 크게 그려가지고 와야 되니까 오키나와로 가라. 그래서 오키나와로 갑작스럽게 방향을 틀어가지고 오키나와로 가서 내렸죠. 가서 내려가지고 미군 정비사들한테 태극기를 그림을 그려서 가르쳐주면서 크게 그렸습니다. 동체에다가 그냥 큼직하게 그렸어요. 그래가지고 그다음 날 이제 몰고 와가지고 그 사열대 앞으로 지나가는데 아주 기가 막히게 그냥 보기 좋게 보이더라 그래요.

▷이동재: 예. 박정희 대통령께서 보시기에

▶이재우: 대통령이 딱 앉아 있어서 보는데 6대가 그냥 딱 지나가면서 태극기를 다 6개를 그린 사람이 지나가니까 얼마나 보기가 좋았는지 아주 그냥 사열대에서 아주 박수를 치면서 그렇게 좋아했다고 그래요.

▷이동재: 가슴이 뿌듯하죠. 당시에 우리나라는 가난한 나라였는데 그래도 최첨단 전투기가 미국에서 날아와 가지고 또 이렇게 6대가 확 지나가니까 그 장면은 정말 장관이었을 것 같습니다.

▷김새봄: 그렇게 대구 기지에 착륙하셔서 기다리고 계시던 박정희 대통령께서 만나시고서는 또 어떻게 말씀하셨어요?

▶이재우: 대통령이 그냥 오셔서 우리 어깨를 두드리면서 정말 잘했다고 자랑스럽다. 너희들 정말 고생했지 하면서 그렇게 좋아하더라고요. 그리고 팬텀이라는 비행기가 특징이 또 하나 있습니다. 보통 비행기는 착륙하자마자 속도를 줄이려면 브레이크만 가지고 속도를 줄이거든요. 그런데 이 팬텀기는 워낙 속도가 빠르다고 그러는데 빠르게 내렸으니까 브레이크 가지고 잘못하면 상처가 생기고. 그러니까 비행기 뒤에서 낙하산이 나옵니다. 낙하산이 그게 그렇게 보기 좋았대요. 비행기가 다 팬텀이라는 비행기가 어떻게 생겼나. 사람들은 다 주목을 하고 있는데 탁 내리더니 뒤에서 낙하산이 탁 펴지더니 바로 속도를 딱 줄이고 그래가지고 옆으로 착 빠지고 또 다음 사람이 오더니 또 탁 하더니 또 옆으로 빠지고 그래서 여섯 대가 착 들어오는 모습이 그렇게 장관이었다고 그래요.

1969년 미국에서 팬텀기를 처음으로 한국에 몰고 온 1호 조종사 이재우 동국대 석좌교수(예비역 공군 소장). 매일신문 유튜브 〈이동재의 뉴스캐비닛〉
1969년 미국에서 팬텀기를 처음으로 한국에 몰고 온 1호 조종사 이재우 동국대 석좌교수(예비역 공군 소장). 매일신문 유튜브 〈이동재의 뉴스캐비닛〉

▷이동재: 그렇게 우리나라가 팬텀기 6대를 도입을 하고 난 이후에 또 국민들이 모은 성금으로 방위성금 헌납기 이걸 또 5대를 또 도입을 했어요.

▶이재우: 그렇습니다. 그때는 국민들에게 안보의식을 강화시킨다는 뜻에서 방위성금이라는 걸 모집을 했어요. 그래서 기업에서도 크게 내고 개인들도 내고 싶은 사람들을 전부 내고 이렇게 해서 방위성금이라는 걸 모아가지고 그 돈을 가지고 이제 군사 원조로 받는 게 아니라 사 온 겁니다. 그러니까 미측에서도 한국에서 돈을 내고 사가 하는 정도니까 한국을 무시하지 못하는 그런 대우를 받는 국가가 됐죠. 그래서 그거를 방위성금 헌납기라고 합니다.

▷이동재: 그 생각을 하면 정말 또 훈련을 하고 작전을 할수록 더 집중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겠네요. 국민들 생각을 하면.

▶이재우: 그렇습니다. 저는 그 이후에 많은 작전을 하면서 방위성금 헌납기라는 그런 개념을 가지고 비행을 하니까 책임감이 더 무거워지고 이 작전을 성공시켜야 된다. 그래서 국민들에게 보여주고 자신감을 보여준다 이런 게 아주 정신 자세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더라고요. 그래서 방위선금 헌납기는 안보 정신을 강화시키는 데 아주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이동재: 제가 아까 장군님께 여쭤보니까 비행 시간이 6천 시간 정도 되셨는데 그중에 3천 기를 팬텀기와 함께하셨다고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근데 팬텀기와 함께한 또 역사적인 추억이 많으시다고 합니다. 이게 북한과의 분쟁이 있었던 그런 사건도 있었는데 그 얘기 한번 말씀 좀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재우: 대간첩 작전이라고 간첩전이 나오게 되면은 이놈들이 속도를 내고 그럴 때 우리 군함 가지고 따라간다든지 하면 그 속도에 차이가 느끼는 그럴 때마다 공군을 부르거든요. 팬토믹 하죠. 그냥 이건 당연히 팬토믹 가가지고 가서 결심시키고 이렇게 그런 대간첩 작전 그리고 또 공중에서 남하하는 모든 훈련기라든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든지 어떤 선이 이 나무까지 넘어오게 되면 당연히 우리가 그걸 막아야죠. 그런 의미에서 팬텀이 출격을 하고 그랬던. 그러면 그 이북 비행기들은 전부 쉽게 얘기해서 도망갈 수밖에 없는 항공기의 차이 때문에 그 도망갈 수밖에. 실제로 다 도망갔어요. 대결이 안 되거든. 그냥 도망가고 그러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제일 심각하게 느꼈던 그런 작전 중에 하나가 도끼 만행 사건이 판문점에서 일어났는데.

▷이동재: 1976년

▶이재우: 네. 도끼 만행 사건 때 그때 상황으로 봐서는 미측의 푸에블로호 그다음에 정보함 정보기 이렇게 격추 사건 이런 것 때문에 미측에서도 아주 상당히 심각하게 봤던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만행을 당한 장교가 미군 장교였고요. 그래서 만행에 대한 그런 보복을 하기 위한 모든 전쟁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 일환으로 한국 공군도 준비를 하고 있는 상태가 비행기가 12대 12대에다가 폭탄을 12발씩 달고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판문점 상공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이렇게 선회를 하면서 대기하고 있는데. 제 목표야 당연히 북쪽에 제일 심각한 그런 목표죠. 그래서 통상 늘 얘기하는 주석궁이라고 그래요. 그 주석궁. 제가 그대로 임무를 수행했더라면 뭐 엉망이 됐겠죠. 우리 편대한테 아마 엉망이 됐을 겁니다. 12대가 가가지고 폭탄 12발씩 가지고 있으니까.

▷이동재: 역사가 바뀌었겠죠. 그러면.

▶이재우: 그래서 아주 그 당시에 그 조종사들의 정신 자세. 그리고 편대자는 제가 가지고 있던 그런 정신 자세는 이렇게 한마디로 말씀드릴 수 있어요. 거기서 대기하고 있는 동안에 내가 북쪽에 공격을 하고 뜻대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생각 때문에 가족이 이게 어떻게 앞으로 될 건가 가족을 걱정한다든지 이런 것이 머릿속에 떠오를 것 같은데 평상시는요. 근데 실제로 상황은 어떻게 되냐면 옆에 있는 편대를 이렇게 제가 보면서 야 이 친구를 내가 임무 끝나는 대로 남쪽으로 안전하게 데리고 나와야 되는데 옆에 보면 이 친구도 내가 안전하게 데리고 나와야 되는데 이 12대를 내가 정말 임무 수행하고 안전하게 데리고 나와야 되는데 그러려면은 내가 어떻게 하느냐 머릿속에 작전 구상이 그냥 이 머릿속에 돌고 그런 상태였어요. 그러니까 지금 생각하면 그때 정신 상태가 좋지 않았나 그런 정도의 정신 상태를 가지고 있으니까 들어가서 임무 수행하고 오라고 하면 아마 100% 수행하고 왔을 것 같아요.

1969년 미국에서 팬텀기를 처음으로 한국에 몰고 온 1호 조종사 이재우 동국대 석좌교수(예비역 공군 소장). 매일신문 유튜브 〈이동재의 뉴스캐비닛〉
1969년 미국에서 팬텀기를 처음으로 한국에 몰고 온 1호 조종사 이재우 동국대 석좌교수(예비역 공군 소장). 매일신문 유튜브 〈이동재의 뉴스캐비닛〉

▷이동재: 그러니까 평양으로 날아가서 이른바 주석궁을 폭격을 해라 이 미션을 받으셨던 건데. 당시에 북한이 추가 도발을 하지 않으면서 그 작전이 취소가 됐었던 그런 상황이었잖아요. 근데 당시에 제가 생각하기에는 저한테 그런 미션을 줬으면 저는 그러니까 내 가족을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다. 그날 집을 나오실 때 어떤 생각이 드셨었어?

▶이재우: 나올 때 혹시라도 가족들이 제가 평상시와 다른 행동을 하고 갔다 했을 때 제가 돌아오지 못한 그때 한이 될 것 같아서 그런 생각을 하니까 가족을 다시 돌아보지도 않고 평상시대로 그냥 보이게 하려고 노력을 하면서 오히려 나왔던 게 지금 기억이 나요. 집사람도 어린아이들도 한 번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제가 나왔습니다.

▷이동재: 사모님은 당시에 장군님께서 그런 미션을 받으셨던 거를 나중에 하셨던 거네요.

▶이재우: 전혀 눈치도 못챘죠. 그날 임무를 다 마치고 그리고 집에 가서 집에 가서 나 오늘은 좀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고 왔다 하는 정도로 얘기해 주고 구체적인 얘기도 뭐 그건 여러 가지 보안상 얘기할 성질도 아니고 그래서 세월이 몇 년 지나서 내가 얘기했던 것 같아요.

▷김새봄: 말씀하시니까 뭐라고 하셨어요?

▶이재우: 그때 그런 얘기를 하는데 그 얘기를 안 해주고 갔다 오면 어떡하느냐 그래가지고 조종사의 가족이면 그런 건 다 이해하고 있어야지 뭘

▷이동재: 그걸 어떻게 이해를 해요?

▷김새봄: 진짜 참 군인이세요. 근데 또 야전 침대를 깔고 비행기 아래에서 또 주무시기도 하셨잖아요. 팬텀기 옆에서.

▶이재우: 크게는 이제 대북 관계 작전이죠. 적게는 팬텀이 들어온 이후에 하여튼 요구만 있으면 출격 요구만 있으면 팬텀이 떴으니까 100% 팬텀이 떴는데 다른 말씀으로 드리면 기구 떠 보니까 기구예요. 가보니까. 이게 어떤 적기 타겟트라든지 이런 게 아니고. 그래서 기구라는 거는 바람에 의해서 자꾸 날아가는 거거든요. 그래서 끝까지 기 따라가서 보면 기구예요. 그 밑에다 대고서 기구다 그러면 기구면 내려와라 그래가지고 내려온. 그러니까 다른 말씀으로 드리면 정말 실제 목표에서부터 기구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대공 방어를 했다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이동재: 철통 방어를 했다.

▶이재우: 예. 정말 영공 방어는 정말 완벽하게 했던 것 같아요. 팬텀이 들어온 이후에 기구도 안 놓쳤으니까요. 기구도.

▷이동재: 그것 때문에 그래서 그렇게 팬텀이 좋으셔서 이글루라고 하잖아요. 우리 격납고 안에서 잠도 주무시고.

▶이재우: 이글루 속에다가 넣어놓는 것도 팬텀이 들어온 이후에 팬텀을 보호하기 위해서 생긴 그런.

▷이동재: 그리고 제가 또 장군님에 대해서 공부를 해보니까 우리나라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라고 있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비행 같은 걸 하는 최고의 조종사들, 최고의 기량을 가진 조종사들로 이루어진 팀인데. 그 팀을 만드셨다고 하는 것 같아요.

▶이재우: 네. 공군에서 10월 1일날만 되면 국군의 날에 한강 백사장에 관망대를 만들어 놓고요. 그때 대통령도 이렇게 모시고 그랬죠. 그렇게 해서 큰 행사를 하고 그러다 보니까 공군에서 편대대행 지나가는 거 그다음에 폭격 연습하는 거 이런 걸 다 보여주는데 이게 특수 비행 기동 훈련하는 것도 좀 넣는 게 좋지 않느냐 그래서 부분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했습니다. 그냥 지나가고 지나가고 또 이렇게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보다 전문적으로 전문성을 보여주는 게 좋겠다 해서 팀을 만들자고 하는 그런 상황이 됐어요. 그래서 팀을 그때도 6명 또는 8명 이렇게 해가지고서 비행을 잘하는 친구들을 뽑아가지고. 연습을 하고 그래서 한강 백사장에서 그때 바로 그 특수 비행을 보여주고 했던 게 스타트였어요. 그래서 그 팀 이름을 뭐라고 하면 좋겠나 그래가지고 팀들이 의견들을 내고 그러는데. 한 친구가 우리가 독수리니까 우리 이름을 검은 독수리라고 하자 검은 독수리. 그래 검은 독수리가 제일 강한 것 같다. 그래서 영어로 얘기하면 블랙이글이다. 그래서 블랙이글이라는 이름을 그때 지어가지고 그때부터 계속해서 블랙이글이 돼서 지금까지는 전문팀이 구성이 돼 있죠. 그렇게 해서 처음에 만들었던 생각이 납니다.

▷이동재: 제가 팬텀에 대해서 또 공부를 해보니까 우리나라에 들여왔던 팬텀 기종에 당시 미국에서 핵 투발 버튼을 이걸 제거 하지 않고 들여왔다 이러는 것 같아요. 그거 혹시 기억나세요? 핵투발 버튼이?

▶이재우: 특별히 핵 투발하는 버튼이다 이렇게 돼 있는 건 아니고. 모든 투하물은 폭탄을 위시해서 유도탄은 유도탄 쏘는 스위치가 있고요. 폭탄은 폭탄 떨어뜨리는 스위치가 있는데. 두 가지로 딱 스위치가 2개죠. 그런데 그때 그런 거를 제거하지 않고 우리한테 줬다는 얘기가 나온 거는 이런 얘기입니다. 이제까지의 모든 우리가 가지고 있던 비행기는 전천후 능력이 없었어요. 구름 속에 들어가서 폭격을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없었는데 이 팬텀은 전천후 폭격기입니다. 구름 속에서도 폭격을 하려면 구름 속에서 쏠 수 있는 그런 자동 무장 투하 장치라는 게 있거든요. 그 무장 투하 장치를 가지고 실제로 구름 속에서 목표 상공에 가면 자동적으로 투하가 되는. 그거는 비밀 장비에 속하는데 그게 바로 핵폭탄까지 떨어뜨릴 수 있는 그 장치입니다. 그러니까 이 핵폭탄도 팬텀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자동 무장 투하 장치를 제거하고 보내야 되는 걸로 그렇게 생각이 드는데 그대로 달고 있는 상태로 들어왔어요. 그러니까 미측에서 그걸 달고 그냥 보낸 것도 일단 유사시에 필요하다면 한국 공군도 써먹으려고 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도 좀 들어요.

1969년 팬텀기 최초 인수 조종사 6명이 미국 본토로 가 훈련을 받던 현역 시절 이재우 교수가 팬텀 앞에서 미군 교관과 함께 찍은 사진. 이재우 교수 제공.
1969년 팬텀기 최초 인수 조종사 6명이 미국 본토로 가 훈련을 받던 현역 시절 이재우 교수가 팬텀 앞에서 미군 교관과 함께 찍은 사진. 이재우 교수 제공.

▷이동재: 그런 역사가 또 있었네요. 제가 개인적으로 저도 이제 공군에서 장교 생활하면서 항공 생리훈련이라고 있거든요. 전투기를 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건데 훈련받다가 저는 기절을 했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이거를 최고의 파일럿이었고 그다음에 특수 비행팀까지 만드시고 하셨는데 최근에 55년 만에 퇴역을 한 이 팬텀기를 한 번 운행을 하셨다고 제가 들었어요. 그 어떤 소감이셨는지 좀 알고 싶습니다.

▶이재우: 팬텀에 좌석에 가서 딱 앉으니까 옛날 생각이 그냥 그대로 나죠. 그러고 스위치 모양을 딱 보니까 어떻게 시동을 걸었는가 이것이 아주 그냥 그냥 눈에 팍 들어오는 거예요. 이게 순서가 있거든요. 요놈 다음에 요놈 이렇게 이렇게 순서가 있는데 그게 눈에 탁 들어오고 그래서 시동을 걸라고 그러길래 앞에서 걸고 뒤에서는 레이더부터 만지는 게 몇 개 있습니다. 이 후방석에서 할 거는 제가 다 이렇게 만지고 하면서 이 비행기를 내가 3천 시간을 탔는데 하면서 정말 어떤 예술 작품 아끼고 아꼈던 그 예술 작품을 다시 만난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죠. 그래서 그냥 차 아끼고 싶은 그런 기분이 딱 드는데 시동을 걸고 캐노피를 닫고 하는 과정이 다 스위치거든요. 그래서 스위치를 캐노피를 딱 닫고 막 숨을 쉬는데 산소 마스크가 딱 이렇게 입을 막아야 되니까 보통 사람들은 답답해서 못 견딘다고 그러더라고요. 그거를 그런데 산소마스크를 끼고도 얘기를 다 이렇게 편안하게 하고 산소마스크를 이렇게 쉽게 마시고 하니까 같이 탔던 조종사가 아니 어떻게 그렇게 숨도 편하게 쉬고 모든 게 편합니까? 그러더라고요. 옛날 생각해서 지금 그 생각이 났다. 지금 내가 활주로에 나가서 빨리 떠야 되겠다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이동재: 역시 영원한 현역이시네요. 저라면 그럴 것 같아요. 제가 비행기를 탈 때 그런 생각이 들잖아요. 왜 이렇게 착륙을 좀 세게 하지 하드하게 하지 이번에는 굉장히 스무스하게 착륙하네 이런 생각이 들 것 같은데 조종사로서는 더 민감하게 민항기를 타실 때 이 친구 운전 못하네 이 친구 착륙 좀 잘하네 이런 생각 드실 것 같은데 어떠세요?

▶이재우: 그 비행기가 이제까지 뜨고 있던 비행기가 착륙을 한다는 거는 그 비행기 마지막 착륙할 때까지 이렇게 플라잉 센스거든요. 그 비행기가 이렇게 침하하는 그게 몸에 옵니다. 이렇게 필링이 오는데. 그 필링이 너무 갑작스럽게 오면 빵 떨어지는 거고요. 그것도 오지 않으면 길게 뻗어나가고 하는 그런 거기 때문에 그 침하량이 그게 플라잉 센스거든요. 그걸 계속해서 잘하면 잘 내리고 잘 내리고 이렇게 오랫동안 하다 보면 그게 센스가 몸에 배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여객기를 타도 그 플라잉 센스가 그대로 느껴지는 거예요. 그래서 여객기 조종사들이 침하를 확하고 그러면 옆에 있는데 이 친구는 아마 훈련하나 보다 학생인가 보다 그렇게 얘기를 하죠. 조종사들은 많이 알거든요. 그래서 조종석에서 나오는 조종사를 만나가지고 야 지금 부조종사들 지금 훈련시키는 거야? 그렇게 물으면 내가 그거 어떻게 알았어? 알지 내가 그런 얘기를 할 것 같은데 많이 대화를 하고 그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이동재: 진짜 영원한 현역이신 것 같습니다. 근데 그동안에 오랫동안 비행 활동을 하셨지만 사실 전투기 조종사들 중에는 또 임무 중에 또 유명을 달리하는 경우가 또 있지 않습니까? 주변에서도 그런 케이스를 좀 보셨을 것 같고 동료 동기들 중에서도 그런 사례가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걸 접하실 때 보면 또 어떤 기분이 드셨는지 좀 궁금합니다.

▶이재우: 사관학교 생도 시절부터 저는 비행기를 타고 생도 때 이미 전투 조종사가 돼 있었거든요. 그럴 때 생도니까 뭐 시원치 않아 가지고 몇 사람이 희생됐어요. 그때 희생된 친구들을 보내면서 국립묘지에 눈물을 흘려가면서 가서 장례식을 해주고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근데 이게 몇 번 연속 자꾸 이렇게 생기다 보니까 그런 것들이 다 하고 생사 단계 그게 그냥 완전히 없어지더라고요. 뭐 살고 죽는다는 건 순간이다. 그러니까 이 조종사 생활한다는 거는 항상 죽음에 대해서는 이게 더 이상 이제 어떤 미련을 둔다든지 이런 거는 있을 수가 없는 거다. 이래가지고 죽는 거에 대한 두려움이나 미련이 싹 없어져요. 없어지고서는 하여튼 탈 때까지 책임 완수하고 안전하게 타야 된다 그런 사명감이에요. 자꾸 이렇게 몸이 이렇게 집중화되기 시작하더라고요.

▷이동재: 사실 저도 이제 수많은 조종사들을 봤지만 우리나라 조종사들이 정말 사명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재우: 네. 그때 처음에는 저희가 뭐 봉급도 적었어요. 그러니까 그런 거 가지고 비행을 못했고 사명감 때문에 했는데 나중에는 자꾸 이렇게 동료들이 희생을 당하고 그러니까. 그래. 내가 언제 갈지도 모르는데 네가 먼저 가서 편하게 있거라 이제 그런 마음 자체가 더 들더라고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 생사를 떠나니깐요. 두려울 게 없어요.

▷이동재: 참 대단하십니다. 장군님께 또 여쭤보고 싶은 게요. 원래 처음에 장군님이 팬텀을 타시기 전에는 F5나 F86 같은 거를 타셨을 것 같은데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가 굉장히 극빈국이었고 그다음에 최신 기종을 타는 것 자체가 너무나 힘든 일이었는데 지금은 우리나라가 또 전투기를 수출하는 국가가 됐어요. 특히 항공인으로서 그런 걸 보시면 더욱더 좀 감개가 무량하실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이재우: 네. 팬텀이 들어오고 나서는 책임감이 비행하는데 안전하게 비행을 해야 된다는 책임감이 수십 배 더 증가된 거죠. 그 이전까지는 한국 공군이 비행을 한다 하더라도 군원으로 받아서 비행을 했거든요. 주로 군은 비행기를 가지고 비행을 했던 그 상태에서 방위성금을 가지고 비행기를 사들여 오는 그런 비행기를 우리가 타야 되고. 그리고 팬텀이라는 비행기 1대가 10억 원 정도 이렇게 된다고 그러니까. 이제까지 비행기보다도 전혀 받아들이는 게 다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혹시라도 부주의한 상태로 팬텀 한 대를 잃어버린다 그러면 국가 자산이 10억 원이 날아간다 이런 생각을 하니까 굉장히 그 책임감이 훨씬 더 늘었어요.

▷이동재: 지금 돈으로 수백억이죠.

▶이재우: 그래서 팬텀 타고 나서부터는 오히려 국민들에 대한 우리가 안전하게 책임지고 영공 방위를 하고 있습니다 하는 거를 보여드려야 되겠다 하는 그런 사명감이 이게 그대로 그냥 더 강화되더라고요. 그런 게 있었습니다.

▷이동재: 또 장군님에 대해서 조금 더 말씀드리면 이재우 장군님께서는 장성 진급 이후에 한미연합사 정보참모부장 역임하시고 유엔사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로 또 역임을 하셨습니다. 공군 군수사령관을 지낸 후에 소장으로 예편을 하시기도 했는데 그다음에는 또 또 다른 분야 완전 새로운 분야에 도전을 하셔서 지금 교수로 재직 중이세요. 그 말씀도 좀 궁금합니다.

▶이재우: 지금 돌이켜 보면 군 생활을 했던 것이 더군다나 이렇게 최신의 비행기의 모든 전자화된 그런 무기를 다루었던 것이 전역 후에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데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어차피 군 생활하면서 모든 전자화된 거는 컴퓨터 시스템이거든요. 그러니까 전역 후에 컴퓨터하고 인연을 맺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됐는데. 그때는 전 군 생활에 어떻게 평가를 좀 해 주셨는지 정부로부터 컴퓨터 시스템을 운영하는 우리 한국 사회를 사이버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어라 하고 만드는 비행기가 조직이 바로 한국전산원이라는 조직이었습니다. 그 조직에 들어가서 그때부터 어떻게 한국을 전산화시킬 거냐 하는 거를 연구를 하다 보니까 상당히 보안이라는 것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앞으로 사이버 사회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오히려 골치 아픈 문제가 많이 벌어질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부터 정부에다가 제가 많은 건의를 했던 게 보안 시스템을 발전시켜야 된다 하는 얘기를 강조를 했더니 그게 어떻게 또 통과가 돼가지고 저한테 보안을 중심으로 하는 센터 조직을 만들어라 해서 오늘날 키사라고 하는

▷이동재: 한국인터넷진흥원

▶이재우: 인터넷 진흥원을 만들라고 그래서 원장으로 임명을 받았어요. 그래서 거기에 가서 보안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미국이나 영국 독일 프랑스 이런 데 다 돌아다니면서 선진화된 시스템을 보고 왔고 그리고 한국의 실정에 맞는 그런 분야를 단시간 내에 발전시키는 데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랬더니 안기부나 그 당시에 청와대에서 놀라더라고요. 아니 그렇게 단시간 내에 조직이 그런 중요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그런 조직을 어떻게 그렇게 만들었느냐 아니 제가 지금 생각하면 한국의 보안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전문가라 하는 사람들을 다 모았거든요. 그 친구들한테 지금 5시 됐으니까 퇴근합시다 그러면 퇴근하겠습니다 하겠습니다 하고 밤 11시 됐는데도 제가 한 바퀴 돌면 퇴근을 안 해요. 이 친구들이. 아니 퇴근하라 그러면 집에서 자꾸 기다리고 있지 않느냐 아 나가겠습니다. 나가겠습니다. 그다음 날 아침에 제가 일찍 와서 보면 밤새웠다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조직원들이 사기가 오르니까 대단해요. 성과라는 건 그래서 단시간 내에 보안 시스템을 강화시켜가지고 조직을 만드는 게 오늘날의 보안 기반을 만드는 그거를 제가 처음에 했죠.

▷이동재: 충격적인 게 장군님께서 80살이셨던 2014년에 국제 보안자문협의회로부터 세계 10대 보안 전문가로 선정되기도 했어요. 팔순의 세계 10대 보안 전문가 이것도 정말 대단한 인생을 사신 것 같아요.

▶이재우: 그것도 어떻게 아세요? 청와대 그 당시에 그러한 것을 평가하고 하는 그 평가협회가 있었는데 거기에 위원장 한 사람이 백악관에 어느 한 책임 부서에 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로 말하면 이제 비서실이라든지 이런 식으로 책임을 지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프로젝트로 전 세계에 보안 전문가를 평가를 한 거예요. 그래가지고 평가했는데 이 아세아 지역에서 한국의 동양에서는 한국의 저다 하는 게 평가가 나왔다고 그래가지고 그래 10대 전문가로 그냥 저는 예상치도 않게 선발이 됐습니다.

▷이동재: 대단하십니다.

▶이재우: 그래가지고 또 재밌는 거는 아이고 이거 비밀인데 큰일 났네.

▷이동재: 비밀 좋습니다.

▶이재우: 그러면 10대 전문가들이 어떤 전문성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거를 발표하라고 도미니카에 가지고 도미니카에서 한다고 그래가지고 도미니카에 갔습니다. 가서 발표를 하는데 저는 저대로 순서가 돼 가지고 발표를 했죠. 잘 하고 그러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있는데 은행에서 연락이 왔어요. 외화가 지금 당신한테 왔으니까 외화를 찾아가라 제가 그래? 내가 외국에서 나한테 외화 보낼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그랬더니 그쪽에서 무슨 무슨 위원회 협회 이런 데서 왔다. 그래서 돈을 받아보니까 바로 그 탑텐이 발표했다고 탑텐 발표에 대한 사례금이 나온 거예요. 사례금이 자그마치 많이 나왔습니다.

▷이동재: 부럽습니다.

▷김새봄: 아니 그리고 아까 짧게 언급하셨던 도끼 사건을 조금 더 여쭤보자면 그때 김일성 주석이 편지를 썼다고 들었거든요. 그 부분이 좀 궁금합니다.

▶이재우: 그때 저는 판문점 한국군 수석대표였기 때문에 상황을 잘 알았는데 바로 판문점에 가면 반은 북측에 반은 우리 측에 이렇게 앉아가지고 회의를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밖에 상황이 심각하게 벌어지는 거를 양쪽 대표들이 테이블에 앉아가지고 아주 그냥 돌보면서 상황을 아주 예의주시하고 있는 상황이죠. 그래서 이게 전쟁이 벌어지느냐 이게 상황이 끝나느냐 하는 그 심각한 상황인데 김일성 편지가 왔다는 거예요. 김일성 편지가 왔다고 그 미측 수석이 그걸 받아가지고 보는데 그 편지 내용을 영어로 번역을 하고 하는 과정에서 아주 심각한 그런 일이 많이 벌어졌죠.

1973년 한국공군 최초의 팬텀 대대인 151대대장 시절의 이재우 교수. 이재우 교수 제공.
1973년 한국공군 최초의 팬텀 대대인 151대대장 시절의 이재우 교수. 이재우 교수 제공.

▷김새봄: 어떤 심각한 일이?

▶이재우: 그 괜찮을 것 같아요. 그때 어려움을 제가 겪었던 그런 거 제가 겪은 게 아니라 저는 공중에 있었고요. 공중에 12대 가지고 있었던 상황이고. 그때 그 내용 속에 김일성이가 이 상황은 대단히 유감이다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미측에서 유감이라는 게 이게 사과냐 대단히 미안하다는 얘기냐 이게 무슨 뜻으로 해석을 해야 되느냐 하는 게 그때 어려움을 겪었던 한 상황이었습니다. 최종적으로 결정하기는 김일성이가 유감이라고 했으면 그냥 사과의 뜻이 포함이 돼 있는 거다 하는 식으로 미측에서 최종적으로 받아들였다고 그래요. 그래서 이제 백악관에 펜타곤에서 상황 종료 끝 해가지고 전쟁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동재: 그 정도 편지가 아니었으면 북한의 주석궁에다 투하하고 오셨을 텐데.

▶이재우: 제가 생각할 때는 90%는 전쟁이 일어나는 것처럼 그때는 뭐 심각한 상황이죠. 왜냐하면 이쪽은 피해를 입은 쪽이고 저쪽은 대기하고 있는 상태인데 양쪽이 다 내용을 알죠. 레이더로 보든 너무나 잘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내용이 어떻게 지금 전력이 배치된 거 다 알죠. 그런 상태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니까 북측에서도 대비하는데 아마 상당히 위협을 많이 느꼈을 거예요. 조금만 여차 있으면 전쟁 발발하는 거지 그런데 그때 그걸로 그냥 상황이 종료되고 우리는 팬텀이 들어오고 전력이 강화되고 그다음에 북측은 그렇게 사과를 하고 이렇게 해서 안보에 그 당시에 심각했던 상황이 이제 진정이 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이동재: 오늘 많은 걸 알게 됐습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는데 오늘 저희는 한국 공군의 전설 팬텀의 아버지 이재우 장군님 모시고 아주 정말 전설 같은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정말 영화 같은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저희가 오늘 장군님을 모신 거는 장모님을 모신 이 내용을 역사에 남기려고 합니다. 그래서 역사에 남기려고 모셨는데 저희 시청자 여러분들을 위해서 또 우리나라 공군과 군대를 위해서 한 말씀 마지막으로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재우: 네 제가 이제 팬텀을 오래 탄 그런 입장에서 제가 현재 느끼고 있는 거는 팬텀이라는 비행기는 한국 공군의 어마어마한 공헌을 했다. 크게 보면 우리 대한민국의 안보에 큰 공헌을 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팬텀이라는 비행기가 최신의 비행기인데 그 당시에 그런 수준까지 올라간 그런 비행을 운영해보지 않은 그런 상황에서 최신의 비행기를 갑작스럽게 받아 가지고 그래도 그걸 공부를 하고 정비를 하고 그리고 비행을 하고 이렇게 해서 발전한 상태로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작전을 성공하고 이렇게 했다는 거는 한국 공군이 갑작스럽게 점프업했다는 뜻인데. 그렇게 갑작스럽게 레벨업 될 수 있는 그런 기반을 만드는 비행기가 팬덤이었어요. 팬텀이라는 비행기를 운영하는 그 실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다음에는 뭐 F15나 F16 F35 들어와도 하나도 어렵지 않게 지금 운영을 하고 있는 그런 상황이 돼서 가장 한국 공군에다가 강력한 전력의 기반을 깔아줬다 기반을 한국 공군에다 주었다 하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두 번째는 팬텀이라는 비행기가 워낙 최신의 비행기를 가져왔기 때문에 이 영공 방어에 있어서는 아주 절대 우위를 가지고 점하고 있어서 완전한 영공방어를 할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갖거든요. 그래서 거기다가 국민들이 방위성금 헌납기까지 사주고 참 아주 국민과 군이 일치돼서 영공방어를 하지 않았었나 하는 그런 회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국민 여러분들에게 아주 제가 사명을 다하고 책임 완수를 하는데 그나마 그렇게 하고 성공적으로 군 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는 건 국민들의 성원과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참 오늘날까지 이렇게 살고 지금 옛날을 회상하면서 말씀을 드릴 수 있다 하는 거에서 감사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습니다.

▷이동재: 저 역시 국민의 한 사람이자 또 까마득한 공군 후배로서 저희 장군님께 무한한 감사와 정말 무한한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정말 오늘 정말 뜻깊은 시간 보냈는데요. 저희가 이제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서 6월 동안 이제 기회가 될 때마다 우리 국가를 위해서 헌신하신 많은 분들을 좀 모시려고 합니다. 오늘 그래서 공군의 전설 대한민국 팬텀의 아버지 이재우 장군님 모시고 정말 의미 있는 시간 보냈습니다. 저희 뉴스캐비닛 오늘 준비한 내용은 여기까지고요. 내일 오전 7시 30분에 더 열심히 준비해서 찾아뵙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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