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름은 한식, 설날, 추석과 함께 우리나라의 4대 명절인 단옷날 풍속이다. 사랑받는 풍속화인 김홍도의 '씨름'에 여름철 필수품 부채가 나온다. 두 선수가 한창 용을 쓰며 경기 중이다. 곧 승부가 판가름 날 흥미진진한 순간이라 엿장수 소년만 멀뚱하니 서있다.
씨름판을 마름모꼴로 에워싼 구경꾼은 모두 19명이다. 이들 중 네 명이 부채를 들었다. 네 자루의 부채는 모두 비슷한 각도로 펼쳐진 상투적인 모양이다. 씨름→ 단오→ 여름→ 부채로 이어지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 익숙한 소품으로 배치된 것이기도 하고, 실제로도 부채는 씨름 구경에서 더위를 날리고, 먼지도 가리고, 경기 관람의 흥분도 식힌 유용한 소지품이었을 터다.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해 부채를 마련할 때인 단옷날이 되면 왕이 신하들에게 부채를 하사했다. 세종부터 성종까지 여섯 왕을 섬기며 45년간 관직에 있었던 서거정의 시에 이렇게 나온다.
양진지이근(良辰知已近)/ 좋은 시절이 가까워졌음을 알겠는데
소우우숭조(小雨又崇朝)/ 조금씩 내리는 비 아침 내내 오는구나
노각선요치(老覺先搖齒)/ 늙었음은 이가 먼저 흔들리는 것으로 알겠고
수지우감요(瘦知又減腰)/ 여위었음은 허리가 준 것으로 알겠네
준료부세앙(樽醪浮細盎)/ 막걸리 거품은 작은 항아리에 뜨고
반채눈신묘(盤菜嫩新苗)/ 소반의 나물은 새싹이라 부드럽네
단오응반선(端午應頒扇)/ 단오엔 응당 부채를 나눠주실 텐데
미재괴이초(微才愧珥貂)/ 미천한 재주에 초관(貂冠) 쓴 것 부끄럽네
단오 무렵이라 관례대로 부채 하사가 있을 것을 짐작하며 부족한 자신이 고위직에 있는 것이 부끄럽다고 했다. '초관'은 담비 꼬리로 장식한 관으로 중국 한나라 때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관리가 쓴 모자다.
왕뿐만 아니라 왕세자도 부채를 내려주었다. 이덕무는 1786년 "왕세자가 내리는 단오선 한 자루를 하사받았다. 대전(大殿)에서 내린 백첩선(白貼扇)·칠첩선(漆貼扇) 각 한 자루를 하사받았다"고 기록해 놓았다. 대전은 정조이고 왕세자는 당시 다섯 살인 문효세자다.
여름이 다가오면 왕이 가까운 신하들에게 부채를 하사하는 것은 당나라 태종 때부터 있었던 오래된 궁중 풍속이었다. 선풍기도 냉방기도 없어 의지할 게 부채뿐이었던 시절 여름이면 누구나 애용하던 것이 부채다.
부채 선물은 온열질환 없이 여름을 무탈하게 잘 나라는 염려를 품위 있게 전하는 뜻이고 상층사회의 배려의 풍속이었다. 그래서 부채의 아칭이 '인풍(仁風)'이다. 단오에 하사해 단오선, 단오절 부채라고 해서 절선(節扇)이라고 했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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