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일성궁' 폭격 명령받고 출격한 그날…노장의 가족은 몰랐다

"집사람도 어린아이들도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북한 공격하면 출격 12대 모두 무사히 나와야 한다 생각 뿐"
한국 공군, 팬텀 도입 후 압도…"북한 한 번도 공중 침투 도발 못 해"
"국민 성금으로 날아오른 팬텀…55년간 영공 방어 사명감으로 완수"
인수조종사 중 유일한 생존자 '아흔 살의 현역'…다시 팬텀 조종석에
"팬텀 3천 시간 몰아…아끼고 아꼈던 예술 작품 다시 만난 기분"

1969년 미국에서 팬텀기를 처음으로 한국에 몰고 온 1호 조종사 이재우 동국대 석좌교수(예비역 공군 소장). 매일신문 유튜브 〈이동재의 뉴스캐비닛〉
1969년 미국에서 팬텀기를 처음으로 한국에 몰고 온 1호 조종사 이재우 동국대 석좌교수(예비역 공군 소장). 매일신문 유튜브 〈이동재의 뉴스캐비닛〉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으로 유엔군 소속 미군인 아더 보니파스 대위와 마크 버렛 중위가 사망했다. 전군에는 비상이 걸렸다. 당대 '세계 최강 전투기'였던 F-4D 팬텀기를 몰았던 이재우 동국대 석좌교수(90·예비역 공군 소장)는 '북한이 추가 도발하면 곧장 평양으로 날아가 주석궁을 폭격하라'는 명령을 출격했다. 그는 폭탄 12발씩 매단 팬텀기 12대를 이끌고 판문점 상공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전투를 벌여야 하는 상황을 앞두고 그는 "집사람도 어린아이들도 한 번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나왔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20일 매일신문 유튜브 <이동재의 뉴스캐비닛>에 출연해 "혹시라도 집을 나올 때 평상시와 다른 행동을 하고 갔을 때 제가 돌아오지 못하면 한이 될 것 같아 평소처럼 행동하려 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고 왔다'는 정도로 말했다"며 "군 보안상 얘기할 성질도 아니었고, 조종사의 가족이면 그런 건 다 이해하고 있어야지 뭘"이라고 웃어 보였다. 당시 그는 하늘을 선회하는데 머리 속에는 '북한으로 공격하러 간다면 함께 출격한 12대 모두를 무사히 데리고 나와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김일성 주석이 유감의 뜻을 전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됐다. 이 교수는 "90% 전쟁이 일어날 뻔 했던 상황이었다"며 "팬텀이 들어오고 북측에서도 대비하는데 상당히 위협을 느꼈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은 1969년 박정희 정부 시절 미국에서 들여올 당시 세계 최강 전투기로 불렸던 팬텀기를 도입하면서 북한의 공군력을 압도할 수 있었다. 그는 "한국이 팬텀기를 도입한 이후 북한이 단 한 번도 공중 침투 도발을 할 수가 없었다"며 "작전이 이루어질 때마다 다 성공했다보니 북측에서는 아예 대결하려고 하는 그 자체를 포기했던 것 같다. 그 정도의 전력이었다"고 했다.

1969년 팬텀기 최초 인수 조종사 6명이 미국 본토로 가 훈련을 받던 현역 시절 이재우 교수가 팬텀 앞에서 미군 교관과 함께 찍은 사진. 이재우 교수 제공.
1969년 팬텀기 최초 인수 조종사 6명이 미국 본토로 가 훈련을 받던 현역 시절 이재우 교수가 팬텀 앞에서 미군 교관과 함께 찍은 사진. 이재우 교수 제공.

당시 극빈 국가였던 한국이 미국·영국·이란에 이어 네 번째로 팬텀 보유국이 된 건 국민과 정부, 군이 함께 이뤄낸 성과였다. 이 교수는 "국민과 군이 일치돼 방위성금으로 공군에 최신 전투기를 사들여 55년간 영공방어 임무를 사명감 있게 완수할 수 있었다"고 했다. 미국은 한국에 팬텀기를 내주기를 꺼려했지만 1968년 한반도 정세가 격화한 게 기회가 됐다. 그해 1월21일 북한 특수부대의 청와대 습격 사건과, 이틀 뒤인 1월23일 발생한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북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미국 측에 팬텀기를 내줄 것을 고집해 결국 뜻을 관철시킨 것으로 전해졌다.

팬텀기 도입이 우여곡절 끝에 결정되자 공군 조종사 6명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중령이었던 이 교수는 계급장을 잠시 내려놓고 대위였던 미군 교관에게 훈련을 받으면서 팬텀기를 익혀갔다. 그는 팬텀 조종간을 처음 잡은 순간을 또렷이 기억했다. 그가 1968년 팬텀 도입요원으로 미국에 건너가 인수교육을 받았을 때였다. 그는 "시동을 딱 걸고 활주로에서 출력을 확 넣었는데 짧은 거리에서 비행기가 쉽게 떴다"며 "비행기가 뜨자마자 공중에서 조종간을 좌우로 흔들면서 해봤더니 너무 부드럽고 기동도 좋아 최신 비행기라는 걸 실감했다"고 회고했다.

1973년 한국공군 최초의 팬텀 대대인 151대대장 시절의 이재우 교수. 이재우 교수 제공.
1973년 한국공군 최초의 팬텀 대대인 151대대장 시절의 이재우 교수. 이재우 교수 제공.

이후 그는 6000시간의 비행 중 3000시간을 팬텀과 함께 하며 조국의 영공을 지켰다. 긴급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조종복을 입은 채 활주로에 야전침대를 깔고 팬텀기 옆에서 잠들기도 했다. 그런 그가 팬텀기 퇴역식을 앞두고 팬텀 조종석에 다시 앉았다. 그가 팬텀기 최초 인수 요원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아흔 살의 현역'이었다. 이 교수는 "팬텀 좌석에 딱 앉으니 옛날 생각이 그대로 났다"며 "지금 내가 활주로에 나가 빨리 떠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어 "이 비행기를 3천 시간을 탔는데 아끼고 아꼈던 예술 작품을 다시 만난 그런 기분이었다"고 했다.

6월 5일 경기 수원시 공군 제10전투비행단에서 열린. F-4팬텀 미디어데이 행사에서 퇴역을 앞둔 F-4 팬텀기들이 도열해있다. 연합뉴스
6월 5일 경기 수원시 공군 제10전투비행단에서 열린. F-4팬텀 미디어데이 행사에서 퇴역을 앞둔 F-4 팬텀기들이 도열해있다. 연합뉴스

그는 장성 진급 이후 한미연합군사령부 정보참모부장과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를 역임했고, 공군군수사령관을 지낸 후 소장으로 예편했다. 전역 이후에는 군에서 익혔던 전자장비, 컴퓨터 관련 지식과 연합사에서 갈고닦은 정보 수집·보안 노하우를 인정받아 한국전산원 초대 부원장에 임명됐다. 이어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원장으로 일하며 정보 보안 생태계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이 교수는 동국대 요청을 받고 국제정보보호대학원 설립 작업을 주도했다. 여든 살이었던 2014년에는 국제보안자문협의회(IBA)에서 '세계 10대 보안 전문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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