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임터뷰] '왼손 기린 그림' 이시빈 작가 "못 해도 괜찮아, 실수해도 괜찮아"

이시빈 작가 대구 펙스코서 7월 말까지 전시

대구 펙스코에서는 7월 말까지
대구 펙스코에서는 7월 말까지 '왼손으로 그린 기린 그림' 전시가 열린다. 사진은 펙스코 앞에서 '왼손으로 그린 기린 그림' 티셔츠를 들고 있는 이시빈 작가.

삐뚤빼뚤 그림 80점이 전시장에 걸렸다. 매끄럽지 못하게 그어진 스케치에 색칠이 덜 되었는지 군데군데 비어있기까지 하다. 액자 밑에 달린 작품 설명 또한 범상치가 않다. 어린 아이의 그림일기 같기도, 한글을 갓 깨친 어르신의 글씨 같기도 하다. 그림도 삐뚤빼뚤. 글씨도 삐뚤빼뚤. 대구 펙스코에서는 7월 말까지 '왼손으로 그린 기린 그림' 전시가 열린다.

"왼손으로 그린 그림으로 전시회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SNS에 하나씩 올리던 그림이 이렇게까지 인기를 끌지도 몰랐고요. 솔직히 제 그림이 잘 그린 그림은 아니잖아요(웃음)" 대구에서 활동 중인 이시빈(31) 작가는 아직까지도 얼떨떨하다는 반응이다. 그의 말처럼 왼손으로 그린 그림은 어딘가 모르게 엉성하다. 하지만 대중들은 웬일인지 그의 그림과 글씨에 열광하고 있다.

-왼손으로 그린 기린 그림(왼그기그)의 탄생 비화부터 듣고 싶다.

▶다들 '기린'에 초점을 맞추는데 사실 내 그림의 핵심은 '왼손으로 그린'이다. 2021년 갑자기 '왼손으로 그림을 그려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 문득 이 문구가 떠올랐다. '내가 그린 기린 그림은 잘 그린 기린그림이고 네가 그린 기린 그림은 못 그린 기린 그림이다'. 이게 일종의 말장난인데 '간장공장 공장장은 간 공장장이고~' '경찰청 철창살은 외철창살이고~' 같은 유형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거기에 왼손으로를 넣어 '왼손으로 그린 기린 그림' 으로 주제를 정했고, 그날부터 왼손으로 기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원래도 이쪽 일을 하셨던 건가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웹디자인 브랜딩 회사에 다니다가 조금 무력감이 들더라. 그리고 그때부터 내가 재밌게 할수 있는게 뭘까라는 고민이 시작됐다. 디자인을 하다보면 대부분 컨펌을 받아야 하니, 내가 재밌는 걸 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기린은 희생양일 뿐이었나. 기린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다.

▶하하. 희생양이 맞다. 여태껏 왼손으로 그린 기린만 500여마리쯤 되는데, 그럼에도 기린을 좋아하지 않는 걸 보면 기린에게 조금 미안하기도 하다. 하지만 내 그림의 포인트는 왼손 그림이다. 내가 오른손으로 기린을 그렸으면 이런 반응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왼그기그를 시작하고 많은 분들이 "나도 이정도는 그리겠다" 라며 왼손으로 그린 본인들의 그림을 나에게 마구 보내주더라.

그러면서 "잘 그려도 되지 않으니 부담이 없다" "왼손에 펜을 이렇게 오래 잡아본 것은 처음이다" "완벽하게 그린 그림만이 멋있는게 아니라는걸 깨달았다" 등의 코멘트를 달아 주셨다.

대구 펙스코에서는 7월 말까지
대구 펙스코에서는 7월 말까지 '왼손으로 그린 기린 그림' 전시가 열린다. 전시에는 이시빈 작가가 왼손으로 그린 기린 작품 80개가 걸렸다.
이시빈 작가는 왼손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그가 그린 기린은 모습도 제각각, 느낌도 제각각이다.
이시빈 작가는 왼손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그가 그린 기린은 모습도 제각각, 느낌도 제각각이다.

-이번 전시에 걸린 기린들은 500여개 기린 그림 중 선별된건가.

▶기린을 그리다보니 조금 상업적인 느낌, 그러니까 본래 왼손으로 그려보자는 초심에서 벗어난 기린을 꽤 많이 그리게 됐다. 유명해지면서 팝업 행사도 많이 초청됐었는데, 그때는 그 수요에 맞게 조금 더 화려하거나 기린에 의미를 부여한 것들을 그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 걸린 기린들은 그런 것을 덜어낸, 그러니까 초심을 담은 기린이라고 표현하면 되겠다.

기린을 매일 그리기 시작했을때 내 왼손의 실력도 늘어가는 걸 느꼈었다. 그러니까 첫 번째 기린보다 두 번째 기린이 선이 더 매끄럽고, 두 번째 기린보다 세 번째 기린이 색칠이 더 자연스럽고. 그런 과정을 담은. 그러니까 매일 하나씩 그린 기린들만 선별해서 전시했다.

-하루에 그림 한개씩. 매일 그리는데도 어떻게 다른 그림을 그려내는 건가. 특히 애정하는 기린 그림도 있나.

▶기린 그림은 다 다르다. 음 그중에서 색감이 안정적이고, 색 조합도 좋았고, 얼룩의 완급조절도 인상적인 기린 한 마리가 생각난다. 하지만 내가 만족하는 기린과 또 봐주는 이들이 만족하는 기린은 다르다. 어떤 사람은 발을 6개 그린 기림이 마음에 든다고, 또 어떤 사람은 오이처럼 그린 기린을 마음에 든다고 한다. 내 기린을 보고 느꼈으면 하는 바도 바로 그것이다. 그림에 정해진 게 어딨나. 본인이 자신있게 그리면 그게 바로 좋은 그림이다.

이 작가의 왼손으로 그린 기린 그림은 전국구 인기다. 그렇기에 전국에서 팝업 스토어를 열고 있는데, 장소마다 다른 기린을 그려내며 호평을 듣고 있다.
"왼손으로 그려볼래?" 지난 달 열린 '왼손으로 그린 기린 그림' 수상작들. 해당 콘테스트에는 334명이 참가했고, 투표도 664명이 직접 했다.

-왼그기그 콘테스트도 그런 의미에서 열린 것 같더라. 참가자가 300명이 넘었다고 하던데.

▶그렇다. 왼손으로 그리는 그림이다보니, 일단 사람들이 부담을 안 가진다. 실수하면 어떤가. 실수로 보이지도 않는데 말이다. 왼그기그 콘테스트는 2021년도에 처음 시작했다. 시작 동기라고 하면, 내가 그림을 올리기 시작했을 때 연락이 참 많이 왔었다. 본인들이 그린 왼손 그림이라며 보내주고 하더라.

그래서 나는 판을 한번 열어주자는 생각이었다. 올해는 332명이 참여 했다. 깜짝 놀랐다. 참가 연령대도 정말 다양했다. 선생님이 본인 학급 아이들을 데리고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올해 주제는 '내가 그린 빠른 기린 그림' 이었는데 잘 그리는 대회가 아니라는 공지도 했다.

-나도 알았으면 참여했을 것 같다. 너무 재밌는 경연이다. 대상받은 기린은 어떤 기린이었나

▶우선 이 말부터 하고 싶다. 우리 콘테스트의 재미있는 점은 모든 그림을 봐도 실력차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인이든 아이든, 거의 다 비슷하다. 보통 미술대회를 열면 잘 그려야 참여할 수 있지 않는가. 하지만 우리 콘테스트에서는 모든 그림이 다 개성있고 좋았다. 람보르기린, 치타 다리를 한 기린 등 여러 수상작들이 기억에 남는다. 투표에도 664명이 참가해 주셨다.

참가비는 받지 않았는데, 참가상은 전원에게 다 줬다. 스케치북, 돗자리, 연필, 티셔츠를 드렸는데 사실 이렇게 많이 참가할지 몰랐기에 지출이 꽤 컸다. 하지만 마치고 나니 참 뿌듯하더라. 콘테스트 그림들은 오프라인 전시도 할 예정이다. 어린 아이들이 특히 좋아한다. 자기 그림이 어딘가에 걸린다는게 흔한 경험이 아니지 않는가. 심지어 왼손으로 그린 그림도 이렇게 인정해주다니. 어린 아이들의 자신감이나 자존감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시빈 작가는 왼손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그가 그린 기린은 모습도 제각각, 느낌도 제각각이다.
이 작가의 왼손으로 그린 기린 그림은 전국구 인기다. 그렇기에 전국에서 팝업 스토어를 열고 있는데, 장소마다 다른 기린을 그려내며 호평을 듣고 있다.

-이번 전시회 말고 활동하시는 것들은 어떤 게 있나.

▶전시회는 이번 펙스코 전시가 처음이다. 대구에서 태어나고 대구에서 그림을 그려온만큼 대구에서 첫 전시를 할 수 있어 감회가 새롭다. 여태 활동하면서는 전국에서 팝업 스토어를 많이 열었었다. 그때마다 그 장소에 맞는 기린 그림을 그렸었는데, 서울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열렸을 때에는 기린 버스를 그렸었고, 서울 선정릉에서 열렸을때는 정릉 주변을 감싸는 문석인(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을 기린으로 바꿔 그렸었다.

앨범 커버 작업도 했었고, 카페와 콜라보도 했었는데 카페는 케냐 원두를 보고 떠오른 아이디어였다. 케냐에 기린이 살지 않는가. 그래서 카페와도 연관지어 볼 수 있겠더라. 이런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대구에 5M 기린이 출몰했다! 이시빈 작가가 왼손으로 그린 대형 기린 그림이다.
이시빈 작가는 왼손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그가 그린 기린은 모습도 제각각, 느낌도 제각각이다.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인데, 동물원과 콜라보는 어떨까. 달성공원 기린 친구들 옆에 작가님이 왼손으로 그린 기린 그림이 있으면 재밌을 것 같다

▶안타깝게도 대구에는 기린이 없다. 그렇기에 펙스코 '왼그기그' 전시가 더 뜻깊다. (웃음) 실제로 이번 전시에는 상자 500개 정도를 쌓아 기린을 그린 5M 기린이 있다. 평균적으로 기린이 4M 라고 하니, 진짜 기린을 못 본 것이 아쉽다면 내 전시에 와서 보고 가면 좋겠다. 국내에 기린은 에버랜드에만 있는 걸로 아는데 그마저도 사라질 위기라고 하더라. 보호종이라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나 또한 기린을 본 적이 없다. 본 적도 없는 기린을 이렇게나 많이 그려내는 데는 왼손이 한 몫 했다. 오른손으로 잘 그려야 한다 생각했으면 기린 생김새를 잘 파악하고 특징을 잘 담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들었을 테다. 하지만 왼손으로 그린 그림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도 이런 왼손의 마음으로 임했으면 좋겠다. 삐뚤빼뚤하면 어떻고, 조금 엉성하면 어떠한가!

500개 박스를 쌓아 기린을 그리는 이 작가. 기린이 없는 대구에 그야말로 안성맞춤 전시회다.
대구에 5M 기린이 출몰했다! 이시빈 작가가 왼손으로 그린 대형 기린 그림이다.
500개 박스를 쌓아 기린을 그리는 이 작가. 기린이 없는 대구에 그야말로 안성맞춤 전시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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