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8~9월 대한민국은 풍전등화라는 표현이 들어맞을 정도로 위기의 연속이었다. 포항-영천-대구-마산으로 이어진 동서 80㎞, 남북 160㎞의 '낙동강 방어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처절한 항전을 계속했다. 어느 한 곳이라도 전선이 뚫리면 부산이 하루 이틀 사이에 공산군에게 점령당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낙동강 방어전에 투입된 아군은 국군 5개 사단, 미 8군 3개 사단 등 총 8개 사단이었다. 통상 사단 방어 정면은 아무리 길어야 15㎞인데, 8개 사단이 240㎞를 방어하자니 1개 사단이 통상 방어구역의 2배인 30㎞를 책임져야 했다(정일권, 『정일권 회고록』, 고려서적, 1996, 181~182쪽).
김천에 전선 사령부(사령관 김책)를 설치한 인민군은 2개 군단(총 13개 사단) 병력이 낙동강 방어선 일대에 배치됐다. 김일성은 김천에 나타나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고 다그쳤다.
이 무렵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은 주저항선이 무너져 유엔군이 어쩔 수 없이 철수해야 할 때 부산항을 유지하기 위해 낙동강 방어선 안쪽에 최후의 저지선을 극비리에 준비했다. 울산 동북쪽 17㎞의 서동리에서 경상남북도 경계선을 지나 밀양 북쪽의 유천과 서쪽 무안리 능선을 따라 마산 동북쪽 고지까지를 잇는 약 90㎞의 이 방어선은 '데이비드슨 라인'이라 명명됐다.
8월 18일 정부는 부산으로 임시 수도를 이전했다. 전세가 점차 불리해지자 워커 장군은 미 8군 사령부의 부산 이전을 결정하고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한국 국방부와 내무부도 부산으로의 철수를 권고했다.
◆9월 4일부터 영천에서 혈전 벌어져
신 장관은 국방부를 부산으로 철수하려 했으나 조병옥 내무부장관은 절대 대구에서 물러나선 안 된다고 외쳤다. 그는 워커 장군을 찾아가 "대구를 포기하면 부산마저 잃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반드시 대구를 사수해야 한다"고 강력 주장했다. 부산으로의 철수 준비를 끝내고 있던 워커 장군은 조병옥 장관의 설득에 마음을 돌렸다. 그는 "나도 사령관실에 침대를 갖다 놓고 작전 지휘를 할 것이니 귀하도 미군 작전에 협조해 달라"면서 미8군 사령부의 부산 이동 계획을 취소했다.
다부동과 포항에서의 격전에 이어 9월 4일부터 대구와 포항의 중간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인 영천을 둘러싼 대혈전이 벌어졌다. 낙동강 전투 최후 결전장이 된 영천은 유재흥 장군의 국군 제2군단(8사단, 7사단, 6사단 일부)이 방어를 맡고 있었다. 인민군은 박성철이 지휘하는 15사단이 영천에서 국군과 혈투를 벌였다.
9월 8일, 영천이 인민군에게 함락되자 워커 장군은 중대한 기로에 섰다. 영천 방어선이 붕괴되면 대구와 경주가 적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고, 미군은 한국을 포기하고 떠날 수밖에 없다. 워커 사령관은 데이비드슨 라인으로의 전면 철수를 계획하고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을 만났다.
◆데이비드슨 라인으로 철수 준비
그는 정 총장에게 "한국군 중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2개 사단과 한국의 존립에 반드시 필요한 민간인 10만 명을 극비리에 선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국군 2개 사단과 민간인 10만 명을 제주도나 하와이, 괌 등지로 이송시켜 망명정부를 세우기 위한 계획이었다.
정일권 총장이 이 내용을 이승만에게 보고하자 대통령은 "워커 그 사람 역전의 맹장이라고 듣고 있는데, 보기보다는 여간 겁쟁이가 아니구먼" 하며 격노했다.
"정 장군! 워커 장군에게 말하시오. 나, 대한민국 대통령은 누가 가자고 해서 나의 조국을 등질 비겁자가 아니라고 말하시오. 나, 이승만은 공산군이 여기 부산에 오면 내가 먼저 앞장서 싸울 것이오. 그래서 내 침실 머리맡에는 언제나 권총이 준비돼 있다고 말하시오. 미군들은 왜 여기에 왔는가. 공산 침략군을 물리치고 정의와 자유를 지키자고 온 것 아닌가. 그런데도 좀 위태롭다 해서 가고 싶다면 자기들끼리만 떠나라고 하시오!"(정일권, 앞의 책, 238쪽).
이 무렵 영천을 점령한 인민군이 경주 쪽으로 진출할 것을 예측한 유재흥 군단장은 경주로 넘어가는 길목에 국군 5개 연대를 매복시켜 놓았다. 예상대로 인민군은 경주를 향해 내려오다가 국군 포위망에 걸려들었다. 국군은 9월 10일부터 13일까지 사흘 간 전사(戰史)에 길이 남을 '영천 섬멸전'을 전개했다.
이 전투에서 국군은 인민군 3천799명을 사살하고 309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전차 5대와 장갑차 2대, 각종 화포 14문, 소화기 2천327정, 차량 85대를 노획했다. 인민군은 투입된 병력 거의 전부가 사살되거나 부상 당하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반면 국군의 피해는 전사 29명, 부상 148명, 실종 48명 등이었다. 영천 섬멸전의 대승으로 미군의 데이비드슨 라인으로의 철수는 없던 일이 됐다.
영천 섬멸전이 시작되기 전날인 9월 9일에는 경주 지역 방어선이 적의 대공세로 위태롭게 됐다. 정일권 총장은 수도사단 18연대(일명 백골부대) 연대장 임충식 대령에게 다음과 같은 훈령을 보냈다.
"대한민국의 명운은 오직 백골부대 여러분의 용전에 달려 있다. 본직(本職)은 여러분의 분발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감히 말하노니, 여러분은 경주를 무덤으로 삼아 전원 옥쇄하라!"(정일권, 앞의 책, 217쪽)
수도사단 18연대는 서북청년단원들이 18연대에 자진 입대하면서 죽어 백골이 되어서라도 고향땅을 되찾겠다는 뜻으로 철모에 백골을 그려 넣은 데서 부대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전투를 했다 하면 승리하여 인민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긍지 높은 연대에 육군참모총장이 옥쇄를 명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임충식 연대장은 대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훈시했다.
"우리 연대의 영예 높은 백골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할 때가 왔다. 참모총장 각하의 각별하신 격려의 뜻을 받들어 연대장은 진두에 서서 경주를 사수할 것이다. 이 연대장이 진두에서 조금이라도 물러서면, 누구라도 좋다. 이 연대장을 쏴 죽여주기 바란다. 그리고 이 연대장의 시체를 방패 삼아 최후의 일병까지 싸워주기 바란다."
연대 장병들은 '결사(決死)' 두 글자를 백골 철모에 동여매고 경주를 지켜냈다. 그들은 지원 나온 미군 제19연대와 협동하여 안강·기계를 탈환하고 인민군 제12사단을 섬멸했다. 영천 섬멸전, 안강·기계 탈환 직후인 9월 15일,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대한민국은 기사회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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