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 부부 금실의 상징 자귀나무

우산 모양 꽃말은 환희·두근거림…사람의 생각·관점 따라 여러 이름
짝나무·소밥나무·여설수 등 불려
대구 앞산·팔공산·청라언덕 감상…唐 '두고' 부인 조씨 꽃 효율적 이용

화려한 자귀나무
화려한 자귀나무

(전략)

언제나 성내지 않고 욕망은 눌러앉히고

이 먼지 바람 부는 세상에서

명주실 같은 고운 꽃술로 자귀나무는

옅은 듯 달콤한 향기를 한밤내 풍기며

오직 평화를 부르듯이,

자귀나무 그윽한 마음처럼 때로는

그런 날들을 기다린다. 여름 한낮에는 솨솨솨

불볓을 밀며 바람을 빚어내는,

또는 밤마다 꿈속에서 팔을 뻗고 몸을 비트는

이 가혹한 세월을 위하여

<「기다림을 위하여 6」, 이태수, 시집 『물속의 푸른 방』, 1986>

6월에서 7월로 가는 길목, 장마가 시작될 무렵 공원에 있는 자귀나무 가지 끝의 연분홍색 꽃이 피기 시작한다. 멀리서 보면 분홍 부채 살이나 화장 솔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꽃잎은 보이지 않고 15~20개의 수술이 한 움큼 모여 피어 암술을 감싸는 독특하게 생긴 꽃이다.

꽃받침 쪽의 묶인 듯한 하얀 수술은 머리로 갈수록 연분홍색으로 물들인 솜털 노리개처럼 보이기도 하고 달콤한 솜사탕의 때깔을 띠며 전체 형태는 우산을 닮았다. 자귀나무의 꽃말은 환희, 두근거림이다. 왜 이런 말이 생겼을까.

자귀나무의 수면운동. 야간에 자귀나무 잎은 수분 증발과 영양 손실을 막기 위해 마주 보는 잎이 서로 겹쳐져 합환수라는 별칭을 얻었다. 오른 쪽은 낮의 자귀나무 잎.
자귀나무의 수면운동. 야간에 자귀나무 잎은 수분 증발과 영양 손실을 막기 위해 마주 보는 잎이 서로 겹쳐져 합환수라는 별칭을 얻었다. 오른 쪽은 낮의 자귀나무 잎.

◆밤에 끌어안는 부부의 정 상징

불꽃놀이 하듯이 활짝 핀 연분홍 꽃에서 시선을 푸른 잎으로 돌려보면 자귀나무는 잎줄기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는 복엽(複葉)이다. 잎이 잎줄기에 하나씩 달리는 것이 아니라 긴 잎줄기에 작은 잎들이 깃꼴로 마주보고 매달려 있다.

복엽의 작은 잎들은 아까시나무 잎처럼 한 쌍씩 마주나고 맨 끝에 잎이 하나 남는 형태의 기수우상복엽과 참죽나무 잎과 같이 짝수를 이루는 우상복엽, 자귀나무 잎과 같이 잎줄기 좌우에 측축(側軸)이 붙고 여기에 작은 잎이 붙은 형태의 2회 우상복엽 등이 있다.

신기하게도 자귀나무는 짝을 이루는 작은 잎들이 밤이면 서로 겹쳐져 닿는다. 수분 증발을 줄이고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마주보는 잎을 포개는 이른바 수면운동(睡眠運動)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토끼풀이나 사랑초도 밤이면 잎이 오므라드는데 세 장의 잎이 완전히 겹쳐지지는 않는다. 반면 자귀나무의 잎은 서로 하나로 완전히 포개지는데 흡사 포옹하는 듯하다.

이런 수면운동을 하는 자귀나무를 두고 금실 좋은 부부가 부둥켜안고 잠자는 모습을 연상해 합환수, 합혼수, 야합수(夜合樹), 유정수(有情樹), 애정목(愛情木)이라고도 부른다. '합환'(合歡)은 부부가 정을 나누는 금실을 말한다. 전통 혼례에서 신랑과 신부가 잔을 서로 바꾸어 마시는 술이 합환주(合歡酒)다. 이런 연유로 자귀나무는 부부애를 상징하는 나무로 여겼다.

양반들은 산과 들에서 자라는 자귀나무를 뜰에 정원수로 심었다.

겹겹으로 비단 휘장 둘러친 규방

重重繡幕遮·중중수막차

처마에는 제비가 쌍쌍이 날아드네

簷角燕雙斜·첨각연쌍사

가장 부러운 건 섬돌 앞 나무 하나

最羨階前樹·최선계전수

날마다 야합화가 잘도 피네

能開夜合花·능개야합화

<『지봉집』 권1>

『지봉유설』을 쓴 이수광이 지은 오언절구 「염체」(奩體)다. 규방 앞에 핀 자귀나무 꽃을 본 감상을 염체 즉 향렴체(香奩體)로 노래한 작품이다. 향렴체는 부녀자 신변의 소소한 일을 소재로 짓는 시의 한 형식이다. 자귀나무 잎의 수면운동을 부부의 애정에 비유하고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옛 사람들이 언제부터 자귀나무와 부부의 정을 연관지어 생각했을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중국 한나라와 진나라에서는 궁궐에서 자귀나무를 재배했다. 남녀의 사랑을 상징하고 분노를 풀어준다는 약효 때문에 문인이 직접 길렀다고 한다.

자귀나무 꽃을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한 옛 사람은 당나라의 '효자' 두고(杜羔)의 부인 조(趙)씨가 아닐까 싶다. 『군방보』(羣芳譜)에 따르면 조씨 부인은 단오가 되면 자귀나무의 꽃을 따서 말린 후 베갯속으로 넣어 남편이 은은한 향을 맡으며 푹 자도록 했다고 한다. 남편이 울적하거나 기죽는 기색이 보이면 말린꽃을 조금씩 꺼내 술에 넣어 마시게 하여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현명한 부인의 내조 덕분에 두고는 지위가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이르렀다. 조씨 부인은 여러 편의 시(詩)도 남겼는데 오늘날 회자되는 작품은 마지막에 덧붙인다.

대구동산병원 남쪽 주차장에 있는 자귀나무는 줄기 둘레가 1.5m, 높이 8~9m에 이르러 보기 드물게 큰 덩치를 자랑한다.
대구동산병원 남쪽 주차장에 있는 자귀나무는 줄기 둘레가 1.5m, 높이 8~9m에 이르러 보기 드물게 큰 덩치를 자랑한다.

◆자귀나무 다양한 이름

집안에 심으면 부부의 금실이 좋아진다는 의미 외에도 자귀나무 이름의 유래에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세종대왕 때 편찬된 『향약집성방』에는 향명을 '佐歸木'(좌귀목)으로 기록했는데 이를 한글로 표기하면 '자귀나모'가 된다. '잠자다'의 15세기 표현은 '자다'이므로 '자귀'는 '자'(잠자다)와 '귀'(어귀의 의미)가 합쳐진 말이라는 주장이다.

이 외에도 목재를 깎아 다듬는 연장인 자귀의 손잡이로 사용돼서 자귀나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설, 밤마다 작은 잎들이 스스로 돌아가는 나무라는 뜻의 '자귀목'(自歸木)에서 유래됐다는 설, 수면운동을 하는 모습이 귀신처럼 보여 자귀나무라 부르게 됐다는 설, 부부의 만남을 나타내는 '짝'에서 파생된 '짝나무'가 변해서 되었다는 설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자귀나무 꽃의 끝이 분홍색인 수술 사이로 하얀 암술이 보인다.
자귀나무 꽃의 끝이 분홍색인 수술 사이로 하얀 암술이 보인다.

별칭도 다양하다. 콩과의 낙엽소교목인 자귀나무의 잎을 소가 매우 좋아한다고 하여 '소밥나무'나 '소쌀나무'로 불렸다. 어릴 적에 야산에 소를 방목하면 토심이 좋고 약간 건조해서 어린 자귀나무가 많은 계곡이나 구릉에서 소들을 자주 목격하곤 했다.

9, 10월에 씨가 들어있는 납작한 꼬투리가 아까시나무 열매처럼 익는다. 꼬투리가 이듬해까지 나무에 그대로 달려 있으면서 겨울 찬바람에 흔들리고 부딪히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므로 옛날 사람들은 여자들의 수다 소리에 빗대서 부른 이름이 '여설수(女舌樹)'다.

자귀나무의 다양한 이름과 유래는 같은 나무도 사람들의 생각과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의미와 이름이 부여됐음을 보여준다.

대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있는 자귀나무에 꽃이 활짝 피어있다. 왼쪽 광나무의 미색 꽃과 함께 초여름 공원을 꾸며준다.
대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있는 자귀나무에 꽃이 활짝 피어있다. 왼쪽 광나무의 미색 꽃과 함께 초여름 공원을 꾸며준다.

◆장마를 알리는 나무

자귀나무를 농촌에서는 장마나무로 인식한다. 기상관측시설이 없던 시절이나 관측기술이 형편없었던 시절 시골에 사는 농민들은 달력보다 나무나 풀의 꽃과 생태를 보고 시후를 판단했다. 자귀나무의 개화 시기가 장마 시기와 비교적 잘 맞았기 때문에 '장마나무'라고 불렀다.

옛 시골어른들 사이에서 자귀나무는 대추나무와 더불어 늦게 새순을 내미는 '게으른' 나무로 통한다. 반드시 늦서리가 지나가야 움이 트는 까닭에 자귀나무의 새순이 돋으면 서리피해 걱정 없이 곡식과 채소 파종을 하고 대추나무에 꽃이 피면 벼 모내기를 서둘렀다.

대구 앞산이나 팔공산 자락에도 자귀나무가 무더운 초여름을 싱그럽게 장식한다. 매년 이맘때 도심에도 자귀나무를 어렵잖게 볼 수 있다. 대구동산병원 청라언덕의 주차장에는 사람 가슴 높이의 줄기 둘레가 1.5m, 높이 7~8m에 이르는 커다란 자귀나무가 있다. 해마다 아기자기한 연분홍 꽃을 가지마다 수북하게 피운다. 거센 장맛비가 약한 꽃술을 할퀴더라도 며칠 지나면 화사하게 다시 핀다.

콩과식물인 자귀나무 열매 꼬투리는 아까시나무와 비슷하다.
콩과식물인 자귀나무 열매 꼬투리는 아까시나무와 비슷하다.

2~3주일은 거뜬하게 비단결 같은 아름다움에 눈을 호강시킨다. 아침에는 꽃들이 비교적 싱싱하지만 오후에는 주변 건물 시멘트에서 내뿜는 열과 자동차 등의 공해 탓에 분홍 수술이 축 처지거나 시들시들해진다.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이나 어린이세상, 두류공원에도 다양한 수형의 자귀나무 있어 대구를 더 푸르고 아름답게 해준다.

자귀나무 꽃을 잘 이용했던 당나라 두고의 부인 조씨의 재미있는 사연을 덧붙여 소개한다.

두고가 젊은 시절 과거에 낙방하고 두고가 집에 돌아가려 하니, 부인이 시를 지어서 보냈다

낭군께선 우뚝한 재주를 지니시곤/ 무슨 일로 해마다 낙제하고 오십니까/ 이제는 님의 낯을 뵙기 부끄러우니/ 오시려거던 밤중에나 돌아오소(良人的的有奇才/ 何事年年被放廻/ 如今妾面羞君面/ 君到來時近夜來)

야박하다고 생각이 들었는지 두고는 열심히 공부해서 이듬해 과거에 마침내 급제하자 부인이 다시 시를 지어 보냈다.

서방님 뜻을 얻었고 지금 나이 한창 젊으신데/ 오늘 밤은 어느 주막에서 주무시는지요(良人得意正年少/ 今夜醉眠何處樓)

17세기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 권14에 나오는 이야기다.

공부 열심히 하라고 좀 까칠하게 대했던 조씨 부인의 현명한 사전 당부일까? 아니면 남편 두고의 '뒤끝'을 걱정했던 것일까?

나무칼럼니스트 chunghaman@korea.com

자귀나무= 학명은 Albizia Julibrissin Durazz. 속명의 알비지아(Albizia)는 자귀나무를 유럽에 최초로 소개한 18세기의 이탈리아 자연사학자 알비치(Albizzi)의 이름에서 유래했으며 자귀나무속을 일컫는다. 종소명 율리브리신(julibrissin)은 페르시아어 gul-i abrisham에서 유래한 말로 비단꽃(silk flower)이라는 뜻이다. Durazz는 이탈리아 식물학자 두라지니(Durazzini)를 가리킨다.

길가에 핀 자귀나무꽃
길가에 핀 자귀나무꽃

◆'천연기념물' 용어 탄생 일등공신 자귀나무

자귀나무는 '천연기념물'이라는 용어를 탄생하게 만든 일등 공신이다. 천연기념물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제창한 사람은 독일의 지리학자 겸 지연과학자 알렉산더 폰 훔볼트다. 1800년 남미를 여행하다가 베네수엘라 북부 마을에 들렀다. 사방으로 뻗은 나뭇가지(수관)의 둘레가 거의 180m에 달하는 거대한 자귀나무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나투어뎅크말'(Naturdenkmal)이라고 처음 명명했다. 1850년대 독일에 유학했던 일본 식물학자 미요시 마나부(三好學)가 '天然紀念物'(천연기념물)이라고 번역했고 우리나라에 그대로 도입돼 사용하고 있다.

나무칼럼니스트 chungham@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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