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1987년 민주화까지 40년간 9차례 헌법이 개정되었다. 4년 남짓마다 헌법을 고쳤으니 헌법의 권위라는 게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 알다시피 그 핵심은 위정자의 권력 연장을 위해 권력구조를 바꾸는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낙동강 위의 전 국토가 인민군 수중에 떨어진 전란 중에 부산 정치파동을 일으켜 헌법을 고쳤다. 박정희 대통령은 군정 10년 차에 또다시 유신을 단행하여 전체주의 체제를 완성했다. 이러한 개헌의 하이라이트는 개인의 권력욕이 헌법 위에 군림하며 헌법의 권위를 유린할 수 있음을 입증한 것이었다.
반면 1987년 이후로 37년간 한 차례의 개헌도 없었다. 민주화가 가져온 역설이었다. 1990년대 위정자들은 내각제 개헌을 밀약하고 야합했지만 국민 앞에 공론화하지 못했다. 2000년대에는 집권자들이 개헌을 공론화했다. 노무현, 박근혜 대통령의 원 포인트 개헌론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 역시 대통령 국정 지지도가 바닥을 헤매는 시점의 권력구조 개헌이라는 점에서 국민들이 수용하지 않았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이제 헌법을 유린하는 것은 물론 국민이 동의하지 않는 정략적 개헌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자명해진다.
22대 총선에서 야당 일부가 대통령 임기 단축 개헌을 공론화한 뒤로 개헌론이 가열되고 있다. 그러나 작금의 개헌론은 개헌보다는 대통령 퇴진을 목표로 한 정파적 슬로건이 본질이다. 동시에 주요 야당 대표들이 갖은 범죄 의혹으로 사법의 심판대에 올라서 있는 처지라 대단히 정략적인 술책이다.
따라서 이러한 식으로 헌법을 고친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 사회의 미래 길잡이가 될 리는 만무하다. 아무튼 과거와 달리 야당 주도로 개헌이 의제화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대통령 스스로가 아니라 야당이 임기 단축을 못 박고 있는 점은 전례 없는 현상이다. 덧붙이면 탄핵소추의 기로에 섰던 박근혜 대통령 외에 역대 어느 집권자도 자신의 임기 단축을 전제로 개헌을 추진한 예가 없다.
이런 배경에서 지난 6월 10일 한 일간지 기자의 기사(성한용 한겨레신문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537)는 임기 단축 개헌론의 속내를 공공연히 드러낸다.
기사의 요지는 이러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레임덕에 빠지지 않고 대통령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가 임기 단축을 포함한 개헌"이며, "여소 야대 정치 지형,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 추락,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 등 모든 정치적 환경이 개헌에 맞춰져 있다. 바로 지금이 개헌의 최적기"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이런 인식도 덧붙인다. "법원의 재판이 끝나기 전에 대선을 치르는 게 유리할 수 있다. 더구나 잘하면 4년 임기 대통령을 한 번 더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주장이 지극히 위험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무엇보다 야당 대표의 사법 위기와 사당화가 정점에 오른 시기에, 지지율이 곤궁한 대통령을 볼모 삼아 방탄 개헌을 조장하는 언동이 불순하다. 정당과 국회가 특정인을 방탄하는 사유재로 전락했고, 끝모를 재판 지연으로 사법적 판단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재판이 끝나기 전에 대선을 치르고 잘하면 한 번 더 할 수 있도록" 면죄부를 주는 발상은 반헌법적이다.
더욱이 비리 의혹 수사 검사 탄핵부터 검찰수사조작방지법, 표적수사금지법, 피의사실공표금지법, 법왜곡죄, 판사선출제까지 이 망측한 적폐는 언제 멈출지 기약이 없다. 대선 전에 사법적 판단을 일단락해서 반듯한 후보들이 경쟁할 수 있도록 성실히 재판에 임하도록 촉구하는 것이 정론직필이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니까 말이다.
대통령 임기 단축의 또 다른 방식은 야당 일부가 제기하고 있는 탄핵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내용적으로 '상당한 사유와 국민적 동의' 그리고 절차적으로 '국회의 소추와 헌법재판소의 인용'이 충족되어야 한다. 거듭된 대통령 탄핵은 국가적 불행이지만 그렇다고 누구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개헌을 잣대로 사법 위기와 탄핵을 거래하는 것은 헌법과 국정을 농단하는 간교에 불과하다. 정치와 언론은 민심에 순응하고 헌법의 권위에 순복해야 한다. 그 순리 위에서 방탄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전향적 개헌이 진행된다면 국민의 갈채를 받을 것이다. 모름지기 헌법은 일개 정파의 사유물이 아니라 국가 공동체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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