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24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대상 '날마다 일하러 갑니다'-김미란

일러스트 : 손노리 작가
일러스트 : 손노리 작가

나는 올해 예순다섯이 되었다. 예전 같으면 현역에서 물러나서 손주들 봐주며 지내고 있을 나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베이비붐 세대가 대거 은퇴하면서 달라진 풍경이다. 내 나이로는 노인 축에 끼지도 못한다. 당당하게 시니어 대열에 들어가지도 못한 나 같은 사람들은 어쩔 도리없이 여기저기 일자리를 찾아 헤맨다. 병원에 가거나 식당에 가서 나이 든 사람이 일하고 있으면 관심 있게 본다. 늘어난 기대수명으로 노후 시간을 마냥 흘려보내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 부모 세대가 노후에는 일을 그만두고 대접받으며 살았던 것처럼 그렇게 살 수가 없다. 어떠한 일이라도 내게 주어지면 일하고 싶다.

오십 대 후반부터 노후를 위해 어떤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간호조무사와 사회복지사 두 가지를 저울질했다. 별다른 정보가 없어서 길을 찾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사회복지사자격을 취득해야겠다고 결정했다. 자격증 하나 마련하면 혹시라도 노후 취업에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또 무엇보다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공부를 시작해야지 머리가 점점 녹슬고 있었고, 체력도 하루하루 떨어지고 있는 걸 느꼈다.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온라인 강의를 들어야 했다. 온라인으로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까지 봐야 했다. 사이버 교육기관에 상담하니 대부분 가장 빨리 취득할 수 있는 기간은 6개월이면 된다고 하였다. 6개월분 수강 신청자에게만 할인 혜택이 주어졌다. 어느 교육원이든 최소한 일 년 안에 강의과목을 모두 들어야 할인이 되었다. 일 년 과정을 듣는 것은 내게 무리라고 판단했다. 일 끝나고 와서 온라인 강의를 여섯 과목씩 들을 수는 없었다. 주말에 몰아서 들어도 된다고 했으나 주말 만이 직장인의 희망인데 밀린 집안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강의에만 매달린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전 과목을 제 가격 모두 지급하고 느긋하게 듣기로 했다. 사이버교육원에서 나를 상담해 주는 코디 한 명이 배정되었다. 그녀에게 채팅으로 문답을 주고받는 거였으나 내겐 도움이 되질 않았다. 궁금한 걸 문의하면 '그렇게 하면 취득할 수 없어요,'라는 기계적인 답변이 왔다. 나는 한 학기에 세 과목만 신청하였다. 세 과목이 적다고 해도 과목당 중간, 기말고사까지 치른다는 것은 장난이 아니었다. 물론 오픈 북이었지만 전공필수 과목은 내용 자체도 어려웠고 통계나 그래프가 나올 때는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버벅거렸다. 시험을 보면 겨우 60점 나왔다. 아무리 잘 본다고 해도 70점은 넘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컴퓨터를 잘 다뤄서 검색만 잘해도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또 학기마다 리포트도 제출해야 한다. 리포트란 눈 감고 아웅 하는 식이었다. 인터넷 검색하고 때로는 카페에 들어가 재수가 좋아 과제로 제출할 제목과 비슷한 거 같으면 베꼈지만, 그것도 별로 없었다. 강의 들은 것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고 리포트만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시험성적이 간당간당했기에 리포트를 꼭 제출하고 강의를 85% 이상 수강해야만 D 학점 겨우 받았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싶어도 사이버 강의라서 어떻게 도움을 청하는지 몰랐다. 너무 어려울 때는 같이 사는 딸이라도 있다면 도움받을 텐데… 하는 생각이 굴뚝 같았다. 나는 왜 머리 아프고 힘들어하면서 이걸 할까? 청소년 시절 못한 공부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일까? 초고령사회로 접어들면서 기대수명은 점점 늘어난다. 대책 없이 오래 살기만 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따라다닌다. 그래도 자격증 준비하는 것이 잘하는 거라는 누군가의 응원이라도 듣고 싶었다.

까마득한 세월 저편, 초록의 나무처럼 싱그러운 십 대 시절이 보였다. 나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고등학교 진학을 할 수 없었다. 일 년을 어느 공장에서 일하며 방송통신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일을 하며 한 달에 한 번씩 가는 학교였다. 아무리 공부가 중요하다고 해도 돈을 벌어가면서 공부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공부가 너무 좋고 학문에 대한 열정이 타오르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매일 출근해야 하는 직장과 한 달에 한 번 가는 학교 둘 중 어느 곳이 더 우선일까? 공부는 뒷전이었다. 한창 꿈 많던 십 대에 일반고교 진학의 좌절을 겪었기에 공부에 대해 별로 흥미도 없었고 늘 다급한 현실의 문제만이 줄 서서 기다렸다. 그 상처는 늦은 나이에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는 자격증을 취득하려는 욕망으로 나타났을 수도 있다.

강의 초기에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구분하지 못했다. 바쁜 일과 중에 교육원에서 오는 문자에 신경을 덜 썼더니 중간고사는 이미 끝난 후였다. 중간고사를 안 봤으니 어렵사리 리포트 제출한 것과 퇴근 후, 밤늦게 들은 강의와 기말고사 점수는 물거품이 되었다. 하늘이 노랬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나에 대한 한탄과 실망이 끌어 올라 휘청거릴 만큼 힘들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세 과목을 재수강할 수밖에 없었다. 이론 과목을 모두 마치는 데 2년 정도 걸렸다.

사회복지 실습 시작은 퇴직하고 일 년이 지나서였다. 코로나19로 힘든 시기였다. 정부에서 연일 거리 띄우기를 온 국민에게 매스컴으로 강조했다. 사람들은 집안에만 있었고 음식점도 갈 수 없었고, 마스크를 구하기 위해 약국 앞에서 한 시간 반씩 줄을 서야 했다. 노인주간보호센터에서 실습하게 되었다. 노인 보호시설이라 그런지 아니면 팬데믹 시기여서 그런지 큰 병원에서 세밀한 건강검진을 받아야 했다. 검진 결과는 간이 안 좋다고 나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사회복지실습도 중요했지만, 나의 간 건강은 더 중요했기에 낙담이 컸다. 평소에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내가 약한 탓인 줄만 알았다. 대학병원에 가서 간 초음파검사를 받고, 약을 먹으면 그곳에서 실습할 수 있다는 의사의 소견서를 제출하고서야 가능하게 되었다.

아침이면 출근하신 어르신들 체온과 혈압을 쟀다. 체온이 조금만 높으면 코로나로 간주하였기에 철저히 쟀다. 센터에는 치매 환자들도 여러 명 있었다. 그래도 체온과 맥박을 잴 때는 순순히 팔을 내밀었다. 교육 시간과 식사 시간이 문제였다. 외부 강사가 놀이 기구를 가져와서 한 사람씩 돌아가며 하는 데 치매에 걸린 어르신은 그 자리에 오지도 않고 겨우 데려와 앉히면 화를 벌컥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여자 치매 어르신도 몇 분 있었지만, 힘이 세지 않으니 제지할 수 있었다. 문을 닫거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 막무가내로 하는 행동을 멈췄다. 남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초기에 치매 남자 어르신 옆에 앉았는데 갑자기 내 허리에 팔을 두르더니 주물러서 깜짝 놀랐다. 당황하니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요양보호사가 보고는 그 사람 옆에는 앉지 말라고 하며 고참 요양보호사가 그 옆에 앉았다.

점심시간에는 식탁에 식판을 놓아드리고 치매 어르신 식사를 도왔다. 곱상하게 생긴 할머니는 경증 치매인데 식사 거부, 낮잠 자는 것도 거부, 말은 한마디도 안 하고 모든 사람이 둥글게 의자에 앉아 있어도 바닥 중앙에 앉아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옆의 할머니가 밥 안 먹으면 (침대에 누워 꼼짝 못 하는 어르신을 가리키며) "저렇게 되고 싶으냐?" 물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귀는 다 알아들었다. 무쇠 고집 할머니에게는 아무도 관심 없었고 누구도 상대하지 않았다. 오직 착한 할머니만 그러지 말고 먹어야 한다며 진심으로 타일렀다.

2024 매일 시니어문학상 대상 수상자인 김미란 씨의 어머니 회갑식날.
2024 매일 시니어문학상 대상 수상자인 김미란 씨의 어머니 회갑식날.

어버이날 오전에는 사무실 직원들과 센터장이 와서 어르신 한명 한명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아드렸다. 직원들과 우리는 모두 서서 어버이 은혜 노래를 합창했는데 나까지 울컥하였다. 몇몇 어르신도 눈물을 흘렸다. 그날 점심은 평소와 메뉴가 달랐다. 밥과 국은 식판에 담지 않고 구릿빛 식기에 담겨 뚜껑으로 덮여서 나왔다. 반찬도 불고기와 잡채 등 정성이 넘쳤다. 어르신들이 가슴에 꽃을 달고 흐뭇하게 식사하였다. 코로나가 아니었을 때는 외부 활동으로 휠체어를 싣고 차로 가까운 공원이나 야외로 나갔다고 했지만, 그때는 그럴 수가 없었다. 오로지 센터에서만 서로 부대끼고 있는 것이 답답하기도 했다.

매주 목요일은 어르신 모두가 목욕하는 날이다. 할아버지는 남자 요양보호사 한 명이 시켰다. 할머니들은 인원이 많아 요양보호사 두 명과 보조인 나까지 세 명이 목욕 일을 담당했다. 먼저 방수 커튼으로 욕실 부근의 마루까지 공간을 넓게 가렸다. 나는 할머니들의 옷을 벗겨서 바구니에 담아 올려놓았다. 처음에는 옷 바구니가 헷갈려서 치매 할머니에게 다른 사람 옷을 입혔다. 할머니는 남의 옷인지도 모르고 단추까지 열심히 채웠다. 그다음부터 할머니들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도 세세하게 보았다. 할머니들이 목욕하고 나오면 가림막 안에서 내가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주고 로션을 발라 줬다. 할머니 등과 몸 전체를, 로션을 묻혀 두드리고 문질러 주는데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다. 다음부터는 집에서 얇은 고무장갑을 갖고 와서 착용하고 로션을 발라 주었다. 이 일을 업으로 해야 할 사람이 이걸 불편하게 생각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많이 해보면 점차로 좋아질 거 같았다. 계속 빠른 동작으로 다음 사람을 발라줘야 하므로 정신이 없었다. 중증 치매 노인은 오랜 경험으로 다져진 고참 보호사들이 어떻게 돌보는지 차근차근 배우며 노력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보호사는 성격이 활달하고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이 환영받는다. 실습생인 나는 그분들을 상대할 수 없었고 보조만 했다. 치매 어르신은 가족과 병원에 가거나 외출했을 때 잠시 한눈판 사이에 어디로 사라지는 경우가 흔하다. 그럼, 가족과 센터에서는 경찰에 신고하고 난리가 난다. 요양보호사와 센터에서 아무리 최선을 다해 치매 어르신을 보살펴도 가족들이 관심과 사랑을 주지 않으면 치매 초기라도 병이 깊어 보이고 무표정하고 세상에 미련이 없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가족들이 살기 바빠서 어르신을 맡길 수밖에 없다. 저녁이면 쓸쓸한 표정으로, 집으로 갈 봉고차를 기다리는 어르신을 보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누구에게나 닥쳐올 질병과 늙음인데 마치 나하고는 별 상관이 없다고 여기며 살았는데 현장에서 마주치니 실감이 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 달이 지나 어르신들과 작별의 시간이 왔다. 경험 없이 늦은 나이에 사회복지사가 되겠다는 것은 어렵고 욕심이란 걸 깨달았다. 젊은 사회복지사가 넘쳐났고 그곳 센터에서도 젊은 복지사들이 일했다. 요양 등급별로 정부에 보조금과 여러 가지를 청구하고 서류를 보내고 관리하는 것은 거기서 배울 수도 없었지만, 앞으로 한다고 해도 어렵게 보였다. 사전 지식 없이 자격증 하나만 따면 취직할 수 있다는 광고와 교육원 말을 너무 믿었던 내가 순진했다.

코로나19가 점차 수그러들었다. 온 국민은 백신 접종을 받았다. 나도 3차까지 접종받았다. 일선 초등학교도 모두 개방이 되었다.

나는 경기도로 이사를 떠나야 했다. 서울을 떠나기 전에 요양보호사 자격을 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사 가면 그곳에서 학원 다니며 여러 가지 치러야 할 일이 많았다. 그걸 해결하는 게 서울만큼 쉽지 않을 것이다. 서울처럼 살기 좋은 도시가 또 어디 있을까. 사회복지사자격이 있으면 요양보호사는 쉽게 할 수 있었다. 겹치는 과목은 안 들어도 되었다. 나는 그때 어깨 수술이 잡혀있었다. 서울에서 수술과 중요한 일들을 몰아서 한꺼번에 해야 했다. 주중에 수술하고 4일 정도 입원했다가 퇴원하여 팔에 보호대를 차고 보호사 공부하러 다녔다. 토요 반으로 모두가 복지사 자격증을 소지하였다. 수업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에 끝났다. 이수 시간에서 1분이라도 모자라면, 시험 응시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젊은 여성이 대부분이었고 공무원도 몇 명 있었다. 나는 가장 나이 많은 축에 속했다. 그녀들은 취업할 목적이 아니라 법이 개정되기 전에 자격증을 따려고 주말에 왔다. 사회복지사와 요양보호사 자격증은 한 집 건너 하나씩 지녀야 할 국민 자격증 같았다. 젊은 사람들이 노후 준비하고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며 나도 이 일 저 일 가리지 않고 기회가 있으면 감사한 마음으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과목 이수가 끝나고, 한 달 후 자격시험이 있어서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곧바로 응시 원서를 냈다. 응시생 중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았기에 걱정이 됐다. 불합격하면 얼굴을 들 수 없을 것 같았다. 남은 기간, 어깨 보조기를 달고 도서관에서 예상 문제를 풀었다. 머리가 녹슬어서 문제를 몇 번씩 읽어도 이해가 안 되었으나 막상 시험장에 가니 아는 문제가 많이 나왔다. 토요 반 전원이 합격하였다.

나는 서울 마포구청에서 5060세대를 위한 일자리 신청했다. 마포에 있는 성산종합복지관에서 연락이 왔다. 복지관에는 아동심리 상담실이 있었다. 대상은 유아에서 초등학생까지 상담하였다. 종합사회복지관은 정부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우수한 선생님들이 상담하였으며, 학부모에게 소문이 나서 아동 대기자가 많았다. 상담실에서 아동과 학부모 안내했다. 아이와 일대일 상담과 놀이치료를 마치면 대기 중이던 학부모가 선생님과 상담에 들어갔다. 그러면 나는 아이를 봐주고 놀아주었다. 자폐가 심한 아동이 막무가내로 뛰쳐나가면 나는 아이를 붙잡으러 다녔다. 소란을 피우며 울면 복도로 데리고 나가 손을 잡고 왔다 갔다 했다.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바쁠 때면 자잘한 일을 도와주었다. 코로나로 인해 어르신께 택배로 보낼 상자에 물건을 담았고, 아동을 위한 선물 포장도 했다. 아동상담실에서 근무를 하니 큰 문제가 없고 단지 성격이 예민한 것으로만 보이는 아동도 상담받는다는 걸 알았다. 자폐적 기질을 보이는 아동도 많았다. 젊은 엄마들은 쉽게 상담실 문을 두드렸다. 한글을 좀 늦게 깨쳐서 오는 아이, 언어발달이 조금 늦어서 오는 아이. 내가 볼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데도 와서 선생님과 장난감 놀이를 하고 또 그림을 그리며 상담 수업을 받았다. 이른 시기에 아이와 학부모가 상담을 시작하면 점점 빠르게 행동이 교정되고 좋은 성격으로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의 초등학교는 한 반 인원이 이십 명 정도이고 상담 선생님이 늘 상주하고 있다. 세상 구석구석까지 상담 치료의 손길이 미치고 있었다. 내가 자식을 키울 때는 문제점이 있다 해도 상담 치료가 있는지도 몰랐고 아이의 성격이려니 하고 넘어갔다. 내 아이도 놀이치료를 받을 기회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먹고살기에 바빴고 무지했으며 지금과는 멀리 동떨어진 구석기 시대에 살았다. 지난 세월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어린이로 자라나는 그 짧은 시기에 좋은 기억을 심어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이곳의 아이들과는 매주 만난다. 정작 나의 손주는 자주 볼 수 없고 명절이나 가족 모임에 잠깐 만난다. 손주보다 더 자주 보니 정도 깊게 들었다. 유난히 상어를 좋아하는 소년은 상어 그림책을 펼치며 이야기를 나눴고 유별나게 거미를 좋아하는 여자 어린이는 인터넷에서 거미 사진을 찾아 보여주었다. 아이는 너무 좋아 소리를 지르며

"선생님! 거미가 너무너무 예뻐요, 거미 다리에 털이 빨간색이에요"

그런 걸 보며 아이들이 어른처럼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열려있다는 걸 알았다.

연말에 김장하려고 분주하게 바쁜 데 콧물이 계속 흐르고 머리가 띵하며 몸이 이상했다. 집에 있는 코로나 진단키트로 검사를 하니 빨간 줄이 보이며 코로나로 나왔다. 놀라서 이비인후과를 가니 코로나-19가 정확했다. 나는 사회복지사한테 문자로 알렸다. 그때는 코로나에 걸리면 14일에서 7일간 쉬는 걸로 바뀌었다. 심하게 일주일을 앓고 난 후, 복지관에 나갔다. 아동들을 상대하기에 철저히 마스크를 썼다. 그런데 기침이 너무 심해서 말할 때마다 괴로웠다. 일주일이 지났어도 기침은 멈추지 않았다. 다시 내과에 가서 x-레이를 찍었다. 의사는 내가 간이 좋지 않은 고위험환자라며 폐렴 증세가 보이니 큰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으라고 하였다. 더 심하면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는 고위험환자는 증상이 심하면 접근 금지하도록 입원했다. 입원해도 병원에서 수액을 꽂고 휴식을 취할 뿐 정작 치료제는 없다고 하였다. 고위험군이란 말은 방송에서 수도 없이 들었지만, 내가 거기에 속할 줄은 몰랐다. 사회복지관을 일주일 더 쉬었다. 일반 회사나 비정규직은 코로나로 판명되면 법으로 1주일은 유급으로 쉴 수가 있었다. 공공근로자는 그렇지 못하다. 하루 4시간씩 한 달에 52시간 일한다. 코로나에 걸려서 근무하지 못한 시간은 포기하든지, 아니면 그달 말일까지만 하루 4시간씩 채울 수 있다. 남들은 쉽게 말할 수 있다. 코로나에 걸려 아팠는데 돈이 뭐가 중요하냐, 몸이 우선이라고. 그러나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한 달 꽉 채워 일하면 오십만 원 받는데 코로나로 두 주 빠지면 절반인 이십오만 원 밖에 안된다. 복지관의 공공근로자 모두가 더 벌기 위해 좀 더 오래 일하기를 원했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다니는 것이 힘들었지만, 빠졌던 시간을 채우기 위해 마지막 주는 매일 나갔다. 시간은 빨리 지나 복지관에서 8개월의 근무를 마치게 되었다. 그동안 정들었던 아이들과도 헤어져야 했다. 손주를 데리고 오는 몇몇 할머니들과도 헤어지는 것이 섭섭했다. 복지사 선생님, 상담사 선생님과는 말할 것도 없다. 복지사 선생님은 그동안 수고했다며 텀블러를 선물로 주었다. 유난히 명랑하고 티 없이 맑은 소희도 예뻤고 상어를 좋아했던 경훈이도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친구들과 잘 어울릴 수 있기를 온 마음으로 빌었다.

주민센터에 갔다가 다시 공공근로 신청을 했다. 한 달 후에 연락이 왔다. 지정받은 공공기관으로 향하면서 마음이 두근거렸다. 주민센터에서 안내하는 일이나 유아원에서 물품과 교구를 챙기고 유아를 봐주는 일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도서관이라면 최고로 좋겠지만, 담당자가 공공근로에 도서관 업무는 없다고 했다. 별관에 도착해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나이 먹은 남자가 나오더니 공공근로 때문에 온 거냐고 물어서 맞다고 했다. 사무실로 들어서니 아주머니 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한눈에 나와 같이 일할 사람인 걸 알았다. 관리소장은 출근부를 건네며 사인하라고 했다. 그곳 건물 청소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청소 일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좀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어쩌랴. 그곳이 마음에 안 들면 관둬야 할 것이다. 내겐 선택권이 없었다. 내가 나이가 좀 더 많으니, 냉방을 켤 수 있는 2~3층을 하고 그 아주머닌 1층과 입구 작은 광장까지 하라고 했다. 소장은 계속 그렇게 하면 둘이 싸움이 일어나니 한 달씩 바꿔가며 하는 거라고 했다. 더운 여름이라 뙤약볕에서 광장 청소하려면 힘들 것 같았다. 헬스장까지 청소를 마치고 남자 화장실 바닥에 락스와 세제를 뿌리고 호수로 물을 뿌리며 청소했다. 좌변기도 비누질하여 물로 뿌렸다. 마친 후에는 너무 기운이 없어 여자용 탈의실로 와서 뻗었다. 나는 1층 아줌마에게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전화했다. 거기 화장실은 어떻게 청소하고 있냐며 좀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녀는 올라와서 소파에 늘어져 있는 나를 보더니

"언니 미쳤어? 화장실 청소 한군데만 하는 거 아니잖아? 그렇게 청소하다 몸 다 망가져! 요령껏 해야 돼."

사실 그녀는 나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일머리가 잘 돌아갔고 손도 빨랐다. 예전에는 사무직이었지만 나이가 많아 자리에서 밀려난 후, 여러 가지 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고 하였다. 사람 상대하는 것도 잘했다. 헬스장 총무가 복도에서 우리와 마주쳤다. 나를 보며

"아주머니, 남자 탈의실에 있는 휴지통 좀 비워주세요"

"알았어요" 하니 그녀가

"호칭 좀 바꿔주세요. 아주머니가 뭐예요? 여사님이라고 부르셔야죠"

"네, 앞으로는 사모님이라고 부를게요"

"여사님이 직장에서의 공식 호칭이에요, 요즘 세상에 아주머니라니요."

나는 그녀의 당당한 요구에 속이 시원하기도 했고, 한편으론 웃음이 나왔다. 그렇지만 거기서 일 끝날 때까지 나는 '여사님'이란 말은 한 번도 못 들었다. 그녀에게 어떻게든 예의를 지키고 존댓말을 썼다. 성격이 무척 억셌고 입바른 소리도 척척 내뱉을 때는 겁이 나기도 했다. 그녀에게 일을 배우는 게 많았다. 예의를 건너뛴다면 둘이 근무하며 마음이 상할 수도 있었다. 그녀는 더운 날 광장 청소와 보도블록 사이로 올라오는 풀 뽑기가 힘들다며 자주 여자 탈의실로 올라와서 쉬었다. 어떤 때는 관리소장이 올라와 탈의실 밖에서 나오라고 부르기도 했다. 헬스장 회원은 부부가 같이 헬스장을 사용할 수 있었다. 여 샤워실과 여 탈의실이 있었지만, 헬스장에 나오는 여자는 딱 한 명뿐이었다. 일반 헬스장처럼 넓지도 않은 곳에서 여자가 남자들 틈에 끼어서 운동하려면 오랜 기간 그곳을 다녔거나 아니면 안면이 두둑해야 할 거 같았다. 체육관 남자들은 나와 1층 여자가 탈의실에서 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여자 회원은 그곳은 자기들만의 공간이라며 공공근로 여성이 쉴 데가 없어서 편의를 봐주는 거라고 했다. 하루는 헬스장의 고문인 남자가 나하고 1층 아줌마를 불러 세웠다.

"당신들 거기 탈의실엔 왜 그리 자주 들어가는 거요? 나는 대답했다.

"잠시 몸이 안 좋아서 쉬고 있는 거예요"

"몸이 안 좋으면 병원에 가야 할 사람이 왜 여길 나오는 거요 관둬야지."

"아니 그럼 공공근로자 휴게실을 만들어 주세요. 법적으로도 휴식 시간 있어요. 택배기사들도 쉼터 공간 다 있다구요."

그러자 그 고문은 일 층 아주머니에게 손가락을 들이대며

"여지껏 수많은 아줌마가 와서 일했지만, 당신이 제일 맘에 안 들어"

씩씩대는 그 아저씨와 더 큰 싸움으로 번지기 전에 나는 그녀를 데리고 우선 계단으로 피했다. 어차피 우리는 약자가 아닌가? 거기서 청소하는 사람인 을이 갑하고 싸워봤자 상처는 을에게 돌아온다. 결국 그녀는 그날로 일을 그만두었다. 나는 그녀가 의지도 되고 말동무해서 외롭지 않았는데, 계속 같이하자고 졸랐으나 뿌리쳤다. 나더러도 그만두라고 했다. 언니가 어떻게 이런 데서 일을 하겠냐고, 같이 당하지 않았냐고 했다. 자기가 여러 군데 마트에서 오래 일했으니 간단한 시식 코너 자리에서 일하게 해 주겠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고맙지만 여기서 버티지 못한다면 그만두고 다른 곳에서는 일하지 않겠다고 했다. 체육관 사람들은 나하고 말하지 않았지만, 유심히 관찰하며 이전에 청소했던 아주머니와 끝없이 비교했다. 헬스장의 운동기구와 바닥을 하는데 요령이 없어서 힘에 부쳤다.

이 년 전 수술한 어깨가 계속 속을 썩였다. 집에만 있을 때는 통증이 없었는데 일하면서 아프기 시작하였다. 수술한 어깨가 잘못될까 봐 '그만둘까……' 고심하다가 그만두면 경제적으로 힘들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어찌 됐든 어깨 때문에 조심하며 걸레질했으며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서 도수치료와 물리치료를 받았다. 헬스장 남자들은 계속 그곳의 여기저기를 지적하며 잔소리하였다. 언제 닦았느냐 몇 시에 출근하느냐며 따지듯이 물었다. 나이 든 남자들이 거기서 운동하고 있을 때 나는 혼자 청소하는 것이 창피해서 사람들 나오기 전, 일찍 출근해서 청소를 끝냈더니 그들은 내가 청소를 안 한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는 출근해서 남자 샤워실과 탈의실을 느긋하게 청소하였다. 헬스장은 남자 회원이 한 사람이라도 나온 후에 청소했다. 그들이 보게끔 걸레로 러닝 머신의 손잡이와 화면을 차례로 닦았다. 창틀도 닦고 역기도 닦고 특히 코로나로 신경을 써서 점심 먹고 와서 운동기구 손잡이를 더 닦았다. 관리소장은 이 층 모든 곳의 청소를 하라고 했고 헬스장의 총무는 오로지 헬스장이 우선이라고 그곳에 가장 많이 신경 써야 한다고 했다. 다른 곳은 형편 되는 대로 하라 하니 나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몰랐다. 나는 관리소장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어 남자 화장실과 이층 로비에 신경을 많이 썼다. 그러니 헬스장 총무가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어느 날 헬스장에서 청소하는데, 평소 운동하러 한 번도 나오지 않던 체육관의 회장 할아버지가 유리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보더니 사무실로 가자고 했다. 아마도 총무가 나에 대한 불만을 회장한테 털어놓고 해결사로 나서 달라고 한 것 같았다. 회장은 관리소장에게 내가 하는 청소 구역이 어디까지냐고 물었다. 관리소장은 머뭇머뭇하더니 그때 마침 그의 핸드폰이 울리자 받으러 밖으로 나갔다. 회장은 나더러 이런 일 하는 것이 처음이냐고 물었다.

"네, 처음입니다. 그동안 저는 사회복지관 데스크에서 방문객 대응하는 일을 하였고, 또 다른 곳에서도 일을 해봤지만, 이곳 일은 좀 힘이 들어요."

"아주머니, 일이 정 힘들면 일자리 경제과에 연락해서 다른 일자리로 옮겨달라고 하는 게 어때요?."

"일자리가 부족해서 지금 대기자가 줄 서 있어요. 회장님은 시청에 아시는 분 있잖아요, 거기에 말씀해 보세요. 저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사무실 소파에 앉아서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더 앉아 있기 싫어서 그 자리를 나왔다. 괜한 나의 자격지심 때문인지 무시당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멀리 떨어진 본관의 식당으로 향했다. 아침도 제대로 못 먹고 출근하기에 점심 한 끼라도 잘 먹어야 일을 할 수 있었다. 괜히 속이 좀 상했다. 내가 화장실 청소하고 있는 중에도 나이 많은 어르신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꾸역꾸역 들어와 일을 볼 때는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화장실 입구쯤 누군가 걸어오는 발소리만 들리면 내가 먼저 후닥닥 뛰쳐나갔다. 죄지은 사람처럼 가슴이 철썩 내려앉기도 했다. 그곳 별관은 국가 유공자로 6.25 참전용사 또는 월남 참전용사들의 회관으로 고령의 어르신들이 출입하는 곳이었다. 헬스장도 그렇다 보니 아침에 9시부터 나와서 규칙적으로 운동하며 건강을 지키려고 모두 열심이었다. 그곳이 만남의 장소였고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남자들은 헬스장 모든 집기와 운동기구에 유난히 신경을 썼다. 나는 차츰 마음을 내려놓았다. '이곳에 드나드는 분은 나라에 공을 세웠고 이젠 나이가 많아 몸도 아주 불편하다. 내가 괜한 자격지심에 총무와 대립할 게 아니라 좀 더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자' 그렇게 나를 다독거렸다. 고령으로 지팡이 짚는 어른들이 많아 비가 오는 날이면 바닥이 미끄러울까 봐 걸레질도 안 했다. 화장실 청소할 때는 호수로 물을 뿌리며 했는데 소장이 와서 미끄럽다고 물 사용하지 말라고 하였다. 물로 안 하면 냄새가 나는데 어떡하라는 건지 난감했다.

2024 매일 시니어문학상 대상 수상자인 김미란 씨가 1984년 결혼식에서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2024 매일 시니어문학상 대상 수상자인 김미란 씨가 1984년 결혼식에서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친정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는 큰 회사의 빌딩에서 오랜 기간 청소 일하였다. 어느 해 일요일, 그 시절에 토요일은 공휴일이 아니었다. 난 아기를 둘러업고 큰 애는 걸리면서 친정을 갔다. 결혼해서 산다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연년생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 한 달에 두 번씩 시집을 방문하는 것이 힘에 겨웠다. 한 끼라도 누가 해 주는 밥을 먹고 싶었다. 갈 곳은 단칸방이었지만 친정밖에 없었다. 그 전날 간다고 분명히 어머니한테 알렸고 그다음 날 가니. 친목계 날이라며 점심은 해 놨으니 챙겨 먹으라고 하며 어머니는 외출하였다.

동생 결혼식은 서울서 멀리 떨어진 전북 전주에서 하기로 했다. 친척들도 별로 없지만, 전주까지 왔다 갔다 하며 참석할 친지는 더더욱 모자랐다. 몇 해 동안 다져놓은 어머니의 친목계원들이 결혼식 날의 구세주였다. 어머니는 본인이 친목계를 안 들었다면 하객이 하나도 없을 거라며, 그동안 지방까지 오가며 두루두루 계원들 경조사를 챙긴 덕분이라고 하였다. 하객이 타고 갈 버스를 대절 했다. 결혼식 전날까지 집에서 마련한 음식을 버스에 싣는데 유독 많은 소주 상자가 보였다. 나는 웬 술이 이렇게 많으냐고 물으니 친목계원들 대접할 거라고 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올라올 때는 중간 어디쯤 정차하여 잠시라도 친목계원이 흥겹게 놀도록 해 줘야 한다고 했다. 난 도무지 어머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결혼식 축하하는 거예요? 놀러 가는 거지."

어머니는 화를 냈다.

"그럼, 결혼식에 올 하객이 누가 있니? 썰렁하게 예식 치르고 싶니?"

친정이 시원찮아 보이면 동생의 시집에서 평생 우습게 볼 거라고 했다. 올라오는 버스에서 술 한 잔씩 한 친목계원들이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데 나는 남편 보기가 민망하였다.

어느 날 어머니는 우리 집에 왔다. 지우개, 딱풀, 플라스틱 자, 연필 깎는 칼을 조심조심 꺼내 놓았다. 나는 웬 거냐고 물었다. 사무실에서 버린 것들인데 이것들을 도저히 그냥 버릴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런 학용품을 보면 마음이 푸근해지며, 이걸로 학교에 가서 못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였다. 예쁜 손주들에게 주고 싶어서 갖고 왔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가슴이 쓰렸다. 어머니는 세상을 잘못 타고났고, 부모 복도 없었다. 외할아버지는 어머니 네다섯 살 무렵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많은 형제 중 끝에서 두 번째 딸이었다. 아들을 바라고 낳았건만 계속되는 딸이었다. 어머니는 가끔 힘없이 말했다.

"나는 늘 언니 옷을 물려받았고 내가 입고 나면 옷이 너덜너덜해져서 입을 수 없어 막내한테는 꼭 사서 입히더라."

나는 어머니가 왜 옷을 이것저것 세심하게 고르는지 머리 모양에는 그리 신경 쓰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부모나 형제 그 누구 하나 신경 써주는 사람이 없었고 그렇지만 멋에 대한 감각은 타고났으니, 옷을 사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늘 고쳐서 입었다.

나는 못내 섭섭한 심정을 숨기며 애들과 텅 빈 친정에서 있다가 쓸쓸히 집으로 돌아왔다. 점점 나의 살기 힘든 점이나 마음의 근심 같은 걸 어머니한테 잘 내보이지 않았다. 친정에 경조사가 있으면 굳이 내게 전화해서 꼭 참석하라고 하였다. 난 화가 났다. 나 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친정은 내가 기댈 곳이 아니었고 어머니가 이기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가 맡은 청소일은 처음 하는 사람이라도 마음을 굳게 먹고 한다면 할 수 있는 일이다. 번화가의 빌딩은 말할 것도 없고 이곳의 본관 건물에 비교하여도 일하기가 쉽다. 바닥을 쓸고 닦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어지러뜨린 공간을 정리하고 깨끗하게 하는 일이 고되지만, 나름대로 의미를 찾으려 했다. 나이 육십 넘어 좋은 일자리를 바라는 것은 놀부 심보이다. '젊은 사람들도 일자리를 못 구해서 노동 현장에서 발로 뛰고 있다. 감사하게 이 일을 하자' 그런데 웬걸, 자꾸만 불만이 터져 나왔다. 세상이 온통 나를 두고 등을 돌리고 있다는 억울함이 생겼다. 사람들은 제각각 살기 바쁘고 결혼한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쓸쓸한 날이면 나는 동네 근처의 숲을 찾아가 걷기도 하고 도서관을 찾아가 책을 읽기도 했다.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는가. 세상을 좀 더 단순하게 보기로, 나의 감정을 잠재우려고 애를 썼다.

청소 일을 마치고 조리된 음식을 사기 위해 반찬가게에 들렀다. 평소에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시장에 들러 배추를 사고 건어물과 과일을 샀다. 즉석 음식을 살 때는 좀 머뭇거렸다. 힘들었던 시대를 살아온 한 사람으로 식구들이 먹을 반찬은 내가 만들어야 한다는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반찬가게로 들어서니 투명한 사각 통에 갖가지 나물과, 메추리알 조림, 오이소박이 등이 예쁘게 담겨있었다. 나는 속으로 '이것저것 마음껏 사도 돼. 오늘 하루 열심히 일했잖아.' 마음 한구석에서 철모르는 개구쟁이가 엄마한테 학교에서 상장 하나 받았으니 이 정도는 당연한 거야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난 평생 일해야만 떳떳하게 돈을 쓰고 살까. 돈 안 벌면 기죽어서 살아야 하나, 그건 아닐 것이다. 그보다 더 깊숙한 곳에는 사회의 구석진 자리의 한 구성원으로 육칠십이 되어서도 일을 하고 사회에 보탬이 된다는 자긍심이 있었다. 그것은 나를 지탱해 주는 귀한 마음이고 나를 아끼고 사랑하고 이웃과 나눌 수 있는 물줄기이며 노후의 자양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가 처음 청소 일을 시작하였을 때 동료들이 본척만척하고 일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아 애를 먹었다고 했다. 유독 어머니를 힘들게 하던 여자에게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 살기 어려워서 왔는데 힘든 사람끼리 서로 잘 지내야 하지 않느냐고, 입장 바꿔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고 했다.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자식이 오랜만에 방문하여도 친목계에 나갔을까. 일요일만이 유일하게 쉬는 날인데 나와 어린 손주가 방문하면 그건 휴일이 아니라 또 노동의 날이 되었다. 주어진 환경이 척박하다면, 어떻게 진흙땅에서 장미를 피워낼 수 있을까. 어머니와 거리가 멀어져 이해할 수 없었던 마음이 파도처럼 왔다가 가슴을 철썩 때리고 돌아갔다. 그때는 몰랐던 것을 인제야, 그것도 내가 그 일을 해보니 그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본관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미화원 두 명과 점심을 먹었다. 유일하게 두 사람이 내게 아는 척을 하였고, 점심만큼이라도 쓸쓸하지 않게 두 형님과 먹고 싶었다. 좋지 않은 일은 속으로 눌러 삼키지만, 그날은 어쩐 일로 털어놓았다. 여사님은 다 듣고 난 뒤에 타이르듯 말했다.

"자기는 같이 일하는 동료들 없이 혼자만 일하면 되잖아. 우리는 여러 사람이 모여있고 거기서 반장을 뽑고, 그럼 반장 편으로 여자들이 우르르 몰려가 한편이 되고… 그쪽으로 안 붙는 사람은 어떻게든 왕따를 시키고… 그런저런 꼴 안 당하잖아."

선배 미화원의 고단한 삶이 폐부를 깊숙이 찔렀다. 아직도 나는 세상에 대한 좁은 식견과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제가 형님들 앞에서 괜히 엄살을 부렸네요. 지혜를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웃으며 말했지만, 속으론 가슴이 먹먹하였다. 그 말속에 온갖 속상함과 치사함을 뚫고 해야 했을 노동의 땀이 배어있었다.

일러스트 : 손노리 작가
일러스트 : 손노리 작가

올해는 시니어 일자리 센터에서 초등학교 급식 도우미 제안받았다. 하루에 3시간씩 한 달에 열 번 할 수 있다. 더 많이 참여하면 좋겠지만 많은 사람에게 일자리가 돌아갈 수 있도록 열 번만 제공한다. 첫 출근을 해서는 조리실의 기계에서 압축된 김빠지는 소리,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 우다당탕 철판 부딪치는 굉음에 정신이 산만하고 얼떨떨하였다. 조리원들은 시끄러운 속에서 숨 가쁘게 바퀴 달린 운반대를 밀며 식당과 조리실을 왔다 갔다 했다. 지금은 일하는 동안 그런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지 않고 어느새 적응한 나를 보면 신기하다. 2인 1조로 오전 11시부터 배식을 시작하면 오후 두 시 전에 선생님과 전교생 그리고 유치원생까지 배식이 끝난다. 내가 하는 일은 오븐의 밥을 아이들 식판에 담아주거나 국을 퍼준다. 그러면 일 이 학년과 오륙 학년 모든 학생이 똑같은 말로 인사한다.

"제발 조금만 주세요."

"잘 먹겠습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고학년생은 인사도 예쁘게 한다.

"지금 다이어트 중이니 아주 쬐금만 주세요"

참새들의 조잘거림에 일은 힘들게 느껴지지 않고 시간은 빠르게 지나간다. 체육부 학생들이 와서 추가로 달라고 하면 듬뿍듬뿍 주며 꼭꼭 씹어먹으라고 말한다. 남학생들이 불고기, 제육볶음을 너무 많이 가져가 먹으면 탈이 날지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학생들을 위해 위생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의무이기에 손에 목장갑을 끼고 그 위로 얇은 고무장갑을 착용한 후에도 수시로 장갑 낀 손을 씻는다. 영양사 선생님이 엄청 위생에 신경을 쓴다. 처음에는 핸드폰을 들고 쉬는 시간에 잠시 보다가 꾸지람을 들었다.

"핸드폰은 급식장 안으로 들고 오면 안 돼요. 거기에 얼마나 세균이 많은지 아세요?"

중간에 잠깐 짬이 날 때 커피 한 잔 마실 때도 텀블러를 사용하면 안 된다. 일회용 컵에 마시라고 했다. 텀블러를 잡는 순간 균이 묻을 수도 있다. 외부에서 가져온 물건 사용은 자제해야 한다. 영양사님이 우리에게 30분 일찍 와서 조리원과 함께 식사하고 일을 시작하라고 했다. 이곳에서 식사하려고 나는 집에서 아침을 간단하게 삶은 계란 한 개와 사과 반쪽만 먹고 온다. 급식이 너무 맛있고 반찬도 다양해서 외식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동안 방송 매체에서 한국은 선진국이라고 떠들어도 내 피부에 와닿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곳에서 배식하며 우리나라가 먹을 것이 풍부한 선진국임을 느꼈다. 학생들은 먹는 거에 연연하지 않았다. 내가 겪었던 시절에는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았다.

나는 결혼해서 십 년 넘을 때까지도 집에 쌀과 김치가 떨어지면 마음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이 허전하고 불안했다. 배추를 사다 김치를 듬뿍 담근 날은 부자가 된 것 같았고 마음이 뿌듯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해가 안 되기도 하지만, 그때는 애들 키우며 내 손으로 직접 모든 걸 해야 했고 삶의 많은 부분을, 먹을 것을 장만하는 데 바쳤다. 쌀도 유모차를 끌고 마트에 가서 그 무거운 걸 싣고 왔다. 배달비를 아껴야 했기 때문이다. 줄 서서 밥을 기다리는 조무래기들을 보며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국민학교 5학년쯤 학급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한 달간 급식 빵 한 개씩 먹을 수 있었다. 문제는 학급 전체가 아니라 이십 명만 먹을 수 있었다. 학급 수는 오십 명도 훨씬 넘는 콩나물시루였다. 그 빵을 먹으려고 제비뽑기도 하였고 가위바위보를 하며 빵에 당첨되려고 애를 썼다. 내가 운 좋게 뽑기로 뽑혔다. 어머니가 빵값을 주셨는데 문제는 꼭 빵의 반을 남겨서 동생을 갖다주라고 하였다. 다음날 학교에서 친구가 빵값 반을 줄 테니 빵의 절반을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 나는 돈에 욕심이 생겨서 얼른 돈을 받았다. 반쪽은 친구에게 주고 반을 동생 갖다줬다. 동생 몫의 빵만 보면 먹고 싶었다. 친구에게 반을 팔아버린 게 후회되었다. 물리고 싶었지만 때는 늦었다. 빵을 못 먹고 굶은 그 한 달이 엿가락처럼 길게 느꼈다. 겨울이면 석탄 난로에 도시락을 데웠다. 우리가 도시락을 내놓으면 담임선생님이 차곡차곡 난로 위에 도시락을 쌓았다. 30~40분 지나면 김치 냄새가 교실에 진동했다. 도시락 안에 들어있는 반찬도 데워지며 내뿜는 냄새 때문에 공부도 머리에 들어오질 않았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다 데워진 아래 칸 도시락을 위쪽으로 바꿔놓을 때였다. 장갑을 끼고 긴 난로용 쇠꼬챙이로 도시락 하나씩 끌어내는 데 내 도시락이 재수 없게 난로 옆에 있던 양동이의 더러운 물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청소 시간에 걸레 빨 물을 데우는 양동이였다. 담임선생님은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했지만 나는 속상했다. 담임이 있는 교실에서는 풀이 팍 죽은 얼굴을 할 수 없어 밖으로 나가서 울었다.

2024 매일 시니어문학상 대상 수상자인 김미란 님의 가족사진. 지금은 구순을 넘긴 어머니와 주인공, 그리고 여동생이 함께 찍었다.
2024 매일 시니어문학상 대상 수상자인 김미란 님의 가족사진. 지금은 구순을 넘긴 어머니와 주인공, 그리고 여동생이 함께 찍었다.

육십 살 넘게 살며 해맑은 목소리로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이토록 많이 들어본 적이 없다. 배식이 끝나고 퇴근할 때는 뿌듯함으로 가득 찬다. 노동의 신성함을 육십 넘어 깨닫다니, 다른 일을 했다면 즐거운 참새들의 짹짹거리는 수다를 어디서 들어볼 수 있을까. 시니어 일자리를 신청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편하게, 우아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꽉 들어찬 적도 있었다. 국내의 가볼 만한 곳을 찾아가고, 해외여행을 다니는 것이 멋진 삶인 줄 알았다. 그러나 땀 흘리며 이 나라의 새싹들에게 밥을 퍼주는 일 또한 가치 있다. 나의 몸속 나이테 안에 살아온 습관과 기억이 남아서일까? 주어진 일을 끝마쳤을 때의 보람과 기쁨은 돈 주고도 살 수 없을 만큼 값지다. 베이비붐 세대로 가난의 아우성이 울리는 나라에서 성장했다. 학교에 가면 담임의 등록금 독촉이 수업 시간 내내 걱정이 되어 공부할 수가 없었다. 쌀밥을 먹는 것이 힘들어서 밀가루로 수제비를 끓여 먹거나 국수를 해서 먹었다. 나는 지금도 외식하면 수제비는 절대로 주문하지 않는다. 수제비의 맛은 별개로 쳐도 그 음식만 보면 나의 청소년 시절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수제비가 별미라서 맛있다고 하는 사람을 보면 쳐다보고 싶지 않다. 노후에는 경제적 능력이 최고라고 젊었을 때부터 생각했다. 젊은 시절은 그렇다고 해도 늙어서도 경제적 능력이 없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나는 절대로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클릭 한 번만 하면 새벽 배송이 오고 홈 쇼핑 채널은 시청자의 구매 욕구를 불러일으켜 전화 한 통이면 만사 오케이다. 인터넷과 SNS로 전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세계에 살리라고는 꿈꿔본 적도 없었다. 현재 누리고 있는 지금의 풍요는 어머니 세대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여자는 배울 필요가 없는 존재라며 학교도 못 갔고, 갖은 차별을 당한 눈물의 강을 건넜기 때문이다. '여자는 시집만 가면 그만이다.' 나 역시 그 소리를 무수히 들었고 당연한 건 줄 알았다. 젊은 세대에게 그런 말을 한다면 케케묵은 구시대적 넋두리로 들리겠지만, 불과 몇십 년 전까지 그렇게 살았다. 그 말속엔 결혼에 대한 부푼 꿈도 있지만 내 인생을 주관적으로 살지 못하고 결혼에 기대어 갈 수밖에 없는 체념도 담겼다. 나 또한 십 대에 못한 공부가 한으로 남아있다. 그 시절, 여학생들은 많은 소설을 읽었고 학교 교지에 시와 독후감을 실어 책으로 만들었다. 나는 책을 많이 못 읽은 것, 공부하지 못한 것은 크게 후회되지 않는다. 하지만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방과 후 분식집에서 라면과 튀김을 먹으며 울고 웃는 시간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은 가슴 아프다. 외국 남자배우의 사진이 들어있는 책받침을 모으며 행복함을 느끼고, 좋아하는 가수, 전영록, 어니언스, 양희은, 트윈폴리오 노래를 들을 수 없었던 시간이 상처로 남아있다.

요즈음은 5060을 위한 교육기관에서 글쓰기 강의를 듣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 가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예비 작가들이 타원형 책상으로 빙 둘러앉으면, 동아리 모임으로 카페에 온 것처럼 푸근하다. 그날 자기가 쓴 글을 발표할 사람은 빵이나 떡, 과자를 돌린다. 자기 작품을 문우들이 심하게 난도질할까 봐 걱정되는 걸까. 나를 발가벗겨 드러낸다는 건 용기가 필요하다. 나의 얘기를 수필로 써서 발표하는 날은 꿈속에서도 창피함과 부끄러움으로 힘들어하다 깬다. 어려서는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서 군대식 명령 위주와 주입식 교육을 받았고 청소년기는 일하느라 학교는 뒷전이었다. 시와 소설보다는 현실의 걱정과 가난에 짓눌려 감성은 나무껍질처럼 단단해졌다. 글쓰기 반에서 '안나까레리나'를 읽었고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었다. 혼자서는 감행하지 못할 것을 문우들과 함께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김유정 문학관이나 황순원 문학관을 갔을 때는 소풍 가는 어린아이처럼 들떴고 세상이 너무 아름답게 보였다. 더 자주 그런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 은퇴 후, 작가로 도전하기 위해 열심히 소설을 쓰는 전직 임원, 현역에서 싸우느라 지쳐서 수필을 배우며 충전하려는 엔지니어, 은퇴한 교사, 젊은 주부로 모인 수업은 문학을 떠나서라도 그들의 다양한 삶을 엿볼 수 있어 좋다. 꿈이 있는 노후를 바라기에 문우들과 공부하고 있으면 제주도의 어느 푸른 목장에 온 것처럼 평화롭다. 아이들은 이미 독립하였고 사오십 대의 시골 장터 같은 삶을 벗어났다. 이제 완숙기, 추수기에 들어서니 그동안 거둬드린 사연과 만난 인연, 현장에서 발로 뛴 얘기를 건져 올려 감칠맛 나는 한 권의 책으로 엮고 싶다.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려고 하기 때문일까. 시들시들 죽어가던 나의 감성이 조금씩 가을비를 맞고 있다. 아름다운 문장 하나를 만들기 위해 희끗희끗한 머리카락까지 참기름 짜듯이 쥐어짠다.

5G의 새로운 세상, 광케이블과 접시 안테나로 4차원 세계 안에서 산다는 것은 2차원 시대를 살았던 내 젊은 날의 체념과 눈물, 어머니의 한(恨), 또 베이비붐 세대들의 땀으로 일군 산물이다. 좋은 세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본인 핸드폰의 핵심 기능도 다 몰라서 사용 못 하는 세대이기도 하다. 마트를 가거나 음식점을 가도 키오스크 기계가 버티고 있다. TV도 무슨 기능이 그렇게 많은지 복잡하고 어려워서 노인으로 살아갈 날들이 두렵다. 육칠십 대가 할 수 있는 직업, 단순한 일, 유아 돌봄 일자리 등이 정보통신 기술에 떠밀려 사라지지 않기를 기도한다. 앞으로 내가 뛰어야 할 마라톤에서 쓰러질 것처럼 힘들 때, 발바닥에 물집이 터져 절뚝거릴 때, 대열에서 잠시 빠져나와 아스팔트 바닥에 앉았다가 꿈을 붙들고 일어서서 완주하는 나를 그려 본다.

오늘은 급식 도우미 당번이다. 급식실에서 미끄럼 방지용 장화를 신기에 통이 좁고 신축성 있는 고무줄 바지를 입었다. 운동 삼아 걸어가기로 했다. 걷기에 딱 좋은 날씨이다. 오늘의 메뉴는 무엇일까. '아! 참 설렁탕이었지. 설렁탕에는 당면을 넣어 주는데 삶은 당면은 시간이 지나면 척척 달라붙어 있어서 장갑 낀 손으로 떼어내기가 불편한데.' 살짝 걱정되다가 '아니야, 그래도 애들이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아이들이 우르르 급식실로 달려와 내 앞에 줄을 선다.

"당면 많이 주세요"

참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나는 앞치마 끈을 바짝 당겨 입고 아이들을 바라본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맛있게 먹을 음식을 담아주는 일이 즐겁고 뿌듯하다. 나는 내일도, 모레도, 그다음 날에도, '날마다 일하러 갑니다'를 외치며 新시니어 시대를 당당하게 살아간다.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