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망(未忘).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다'는 뜻이다. 지난해 여름, 거대한 자연 재해로 소중한 사람과 보금자리를 잃은 이들이 있다. 흙과 모래에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날의 상처가 여전한데, 미망의 계절이 돌아왔다. 매일신문 기획탐사팀은 지난해 폭우 피해가 컸던 지역들을 찾아 재해 복구 실태와 안전 대책을 담은 시리즈를 3회에 걸쳐 보도한다.
지난해 6, 7월 여름 경북 지역 곳곳에서 산사태가 발생했다. 마을들이 흙에 쓸렸고,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1년이 지났지만 재난에 대한 트라우마와 불안, 새 보금자리 마련에 대한 고민 등으로 피해민들은 여전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26일 경상북도에 따르면, 지난해 6~7월 집중호우로 경북에서 모두 29명이 세상을 떠났다. 예천이 17명으로 가장 많고, 영주(5명)와 봉화(4명), 문경(3명) 등 대부분 북부지역에서 희생자가 나왔다. 재산피해도 상당했다. 도로와 교량, 하천, 주택 등 2천945억원 상당의 피해가 발생했다.
◆"올해 여름은 어떻게…"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
지난해 집중호우로 특히 피해가 집중됐던 마을 주민들의 불안은 장마철이 다가올수록 심해지고 있다.
지난 17일 오전 11시 30분쯤 찾은 경북 문경 산북면 가좌리. 산북면사무소에서 1차로 길을 따라 차로 20분 정도 달려 가좌리마을회관에 도착했다. 마을은 조그마한 집들이 가파른 경사면 위에 띄엄띄엄 자리를 잡고 있었다.
평화로워 보이는 이 작은 마을에선 지난해 7월 집중호우로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이 마을로 이사를 오고자 헌 집을 수리하던 70대 남성 A씨가 갑자기 집으로 들이닥친 산사태 때문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현재 A씨의 집이 있던 자리는 터만 남아 있고, 산과 맞붙어 있는 집터 뒤편으로는 옹벽 설치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김상동 가좌리 이장은 "A씨는 다른 지역에서 건축 관련 일을 했는데, 마을 주민 중 집수리가 필요하면 무료로 고쳐 주고 싶다고 할 정도로 인상이 좋고 따뜻한 사람이었다"며 "올해는 마을에 재해가 없어야 할 텐데 걱정이다. 작년 산사태도 순식간에 발생했기 때문에 올해도 불안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마을에 배수가 원활하지 않아 비가 오면 물이 도로 위로 쏟아져 나온다. 집과 집 사이 하수로가 잘 조성돼 있지 않다. 하루빨리 시설 개선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다른 주민들도 마을 전체적으로 배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불안을 호소했다.
지난해 인명피해가 발생한 곳에서 도보로 1분 거리에 사는 신모(77) 씨는 "집들이 계단식으로 층층이 있다 보니 비가 내리면 물이 윗부분부터 길을 따라 우리 집 뒷마당으로 고스란히 흘러 들어오곤 한다"며 "심할 땐 마당에 있는 화장실 변기까지 물이 차올라 난리가 벌어진다. 혼자 살기 때문에 밤에 비가 오면 혹시 자다가 대피를 못 할까 봐 너무 무섭다"고 했다.
◆"그날, 산이 주저앉았어요"… 트라우마 안고 사는 사람들
다행히 목숨은 구했지만, 수해 당시 상황을 직접 겪은 주민들의 트라우마도 상당하다.
지난 19일 방문한 경북 영주시 풍기읍. 금계1리마을회관에서 용전동못 위쪽으로 비좁은 외길을 따라 차를 타고 5분 정도 올라가면 유모(59) 씨의 '집'이 나온다.
유 씨는 지난해 7월 집중호우와 산사태로 어린 시절의 소중한 추억이 서려 있던 집을 잃었다. 그는 현재 산사태가 휩쓸고 간 텅 빈 집터에 마련한 6평짜리 컨테이너에서 홀로 생활하고 있다. 컨테이너 앞엔 그 당시 내려왔던 커다란 바위가 아직도 자리를 잡고 있다. 집 앞에 있는 100년 넘은 느티나무 기둥에도 산사태 때 생긴 상처가 생생하다. 이처럼 그날의 기억은 유 씨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유 씨는 "여기서 태어나서 평생 살고 있다. 어머니가 쓰시던 장독대 등 추억이 서려 있던 것들이 집과 함께 모두 사라져 버렸다"며 "집 앞 나무는 두 팔을 벌려도 다 안지 못할 만큼 굵고 튼튼했는데, 그날 이후로 뿌리가 다 드러나고 기둥 옆에 무언가에 긁힌 상처가 생겼다"고 말했다.
이어 "운 좋게 탈출했지만, 산 전체가 주저앉고 수십 그루의 나무가 흙과 함께 내려오는 모습 등 당시 상황이 계속 떠오른다"며 "올해 3월부터 사방댐 공사가 진행돼 이달 초 마무리됐는데, 공사가 완료되기 전까지는 잠도 제대로 못 잤다. 만약 사방댐이 세워지지 않았다면, 장마철 한 달 동안 여인숙에 나가서 살려고 했다"고 토로했다.
◆"아직 계획이 없어요…" 갈 곳 없는 사람들
집을 잃고 새로운 거처를 마련해야 하는 사람들의 고민도 깊다. 지자체에서 마련한 임시거주 시설에서 지내고 있는 경우라도 무기한으로 머무를 순 없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은 무거워진다.
지난해 집중호우로 가장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던 예천군은 수재민을 위한 임시조립주택과 LH임대주택 등 임시거주 시설을 조성했다. 이달 기준 예천군 내 10개 동네에 조성된 임시조립주택 27가구(벌방리 10가구, 백석리 5가구, 명봉리 4가구 등)에는 모두 40명이 거주 중이고, 호명읍에 있는 LH임대주택에 1가구(2명)가 생활하고 있다.
임시조립주택의 경우 입주일로부터 1년, LH임대주택은 6개월을 각각 거주할 수 있으며, 연장 신청을 해도 최대 2년 동안만 살 수 있다. 최대한 연장해도 내년 하반기 중에는 임시거주 시설을 떠나야 한다는 얘기다.
지난 11일 찾은 예천군 효자면 명봉리. 마을회관에서 걸어서 2분 정도 가니 작은 컨테이너 건물 4채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B(51) 씨는 세를 들어 살던 집이 지난해 7월 수해로 사라져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최근 예천군에서 주택 지붕에 특수도료를 칠해 건물에 열기가 쌓이는 걸 막아주는 '쿨루프'를 설치했지만, 8평짜리 비좁은 컨테이너집에서 생활하기란 여전히 고통스럽다. 그러나 이곳 생활조차 B씨에겐 감지덕지인 상황이다.
B씨는 "나는 올해 9월 1일까지 살 수 있는데 비용 문제로 아직 살 곳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집을 지을 계획도 지금으로선 없다"며 "임시주택에 사는 이웃 중에는 소유한 땅에 집을 마련해 나가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땅마저도 없다. 정부 보상금 역시 세입자인 나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고 말했다.
예천군 안전재난과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신고자 본인 소유의 사유재산에 대한 피해를 신고해 보상을 받는 건데, 세입자에 대해서도 '세입자 보조금'으로 6개월간 임대료를 지급해 주는 조항은 있다"며 "신고주의라서 신고가 들어온 건에만 보상이 이뤄진다"고 설명했다.
기획탐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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