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든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고 아련한 기억 속의 그 추억들은 마냥 즐겁고 아름다운 것일 것이다. 그런데 요즘 같으면 유치원에 다닐까 말까 한 여섯 살의 나이에 6·25전쟁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만나 직접 겪은 그 경험은 일생 동안 뇌리에서 지울 수 없는 슬프고 아픈 추억으로 남아있다.
73년 전의 일들이지만 아직 까지는 그때의 기억들이 생생하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 속에 더 나이가 들어 정신이 혼미해지거나 기력이 떨어져 지난 일들을 송두리째 잊어버리거나 그나마 기록할 여력조차 없어져 일개인이 겪은 이야기이지만, 비참했던 전쟁 피난살이 이야기가 아무에게도 전해지지 않고 그냥 묻혀 버린다면 전후 세대들이 전쟁의 비참함을 모르고 지나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서둘러 피난민의 고난사를 글로 남겨 그들에게 전쟁에 대한 대비와 경각심을 갖게 하고 나아가 현재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러시아 간의 전쟁으로 인해 엄청난 고통과 시련을 겪고 있을 이들 국민에게 먼저 전쟁을 경험한 우리로서 동병상련의 처지로, "절망하지 말고 끝까지 결사 항전하라. 그러면 국제사회가 발 벗고 나서서 도와줘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1950년 7월 말경. 물론 이 날짜는 내가 성장해서 부모에게 묻고 그 후 6.25 전쟁사를 읽어서 안 것이다.
내가 여섯 살이던 당시의 경북 구미는 인구 2만이 채 안 되는 아주 보잘것없는 면(面) 소재지에 불과했다. 유치원은 고사하고 변변한 놀이시설 하나 제대로 없는 상태에서 또래 꼬마들의 매일 매일의 일과는 동네 골목길에서 맨 흙바닥에 퍼질고 앉아 땅따먹기 놀이, 모래로 까치집 짓기, 자치기 등이 놀이의 전부였다. 이날도 이런저런 놀이를 하며 실컷 놀다가 땅거미가 질 무렵 집으로 돌아와 손발을 씻는 둥 마는 둥 하고 저녁을 먹고 이내 엎어져 꿈나라로 갔다. 한참을 자고 있는데 꿈에선지 생시에선지 무슨 거대하고 육중한 물체가'우르릉 우르릉'하는 소리를 내며 집 앞에 난 도로를 지나가는 듯했다. 한참 동안 그 소리는 계속되었지만 한밤중에 자다 말고 밖에 나가 무엇인가 하고 확인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그대로 자던 잠을 잤다.
새벽에 날이 밝자 집 밖에서 동네 어른들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나가보니 도로가 온통 무슨 쇠바퀴에 눌린 듯 움푹움푹 패여 있었다. 도대체 어떤 물체가 지나가서 이렇게 도로가 패었을까? 자가용이라고는 전연 없는 시대였고 화물차가 간간이 지나다니는 정도였는데 그 차들이 지나가고 나서는 이런 자국이 남아있질 않았었는데….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동네 어른들은 자못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뿔뿔이 자기들 집으로 흩어졌다. 우리 식구는 서둘러 아침 식사를 마쳤고 식사가 끝나자마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와 세 살 위인 형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은 채 서둘러 옷가지며 이부자리, 먹을거리 등을 주섬주섬 챙겨서 보따리를 꾸리고 집 주위를 돌아보며 가져갈 만한 물건들을 골랐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는 자전거에 짐 보따리를 싣기 시작했고 어머니는 옷가지 등을 싼 보퉁이를 머리에 이고 두 살배기 젖먹이 여동생을 등에 둘러업고 형에게는 쌀 두 되박이 들어있는 책가방을 어깨에 메게 하고 나에게는 간장이 들어있는 주전자를 들려주었다. 나로서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 식구는 부지런한 아버지 덕에 끼니 거르지 않고 하루 세끼 밥을 챙겨 먹으며 별걱정 없이 한여름을 지내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밤중에 괴물체가 지나가고 나서부터 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 엄마, 지금 우리 어디 가?"
" 피난 간단다."
" 피난?"
나는 피난이 뭔지를 몰랐지만 하여간 여기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야 하고 다른 곳으로 간다면 가장 친한 친구인 옆집 점용이를 데리고 함께 가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나는 점용이 집골목까지 뛰어가, 마치 어디 소풍이라도 가듯 "점용아 우리 피난 가자"라고 외쳤다.
그러나 점용이 식구는 벌써 떠났는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우리 식구가 집을 떠나 괴평들을 가로질러 낙동강 백사장에 도착한 것은 그날 오후였다. 날씨는 삼복이라 찌는 듯이 무더웠고 20여 리 길을 타박타박 걷다 보니 목은 탔고 다리는 천근같이 무거웠다.
백사장에는 먼저 도착한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야말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평소에 나루터에는 강을 오가는 딱 한 척의 나룻배가 있었는데, 배를 모는 늙은 뱃사공이 해평 쪽 강 건너 주막집에 들어앉자 있다가 강을 건널 사람이 큰소리로 "어이~~"하고 부르면, 부스스 나와 배를 몰고 와서 강을 건너 주곤 하는 한적한 나루터였다. 그런 곳에 수천 명의 피난민이 들이닥쳤으니 도저히 감당이 불감당이 되었다. 십여 명이 겨우 탈 수 있을까 말까 하는 조그만 나룻배에 20~30명이 한꺼번에 올라타니 사공은 노를 젓기는커녕 움직일 수조차도 없을 정도가 됐고 급기야는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었다.
한두 번 겨우 강을 건너 왔다 갔다 왕복하던 그 나룻배는 결국 이쪽으로 아예 돌아오지 않았다. 사공이 배를 버리고 도망을 갔는지 배가 가라앉고 말았는지 통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백사장을 뜨겁게 달구었던 태양이 지고 날이 깜깜해지자 넓은 백사장 여기저기서는 때아닌 불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저녁을 거르게 된 피난민들이 저마다 나뭇가지나 지푸라기 등을 구해와 모래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작은 양은 솥을 걸쳐 놓고 밥을 해 먹을 요량으로 불을 지펴 대는 것이었다. 어머니도 남들 하는 것처럼 모래 구덩이를 파고 주워온 나무쪼가리를 넣고 불을 붙였다. 그러나 솥을 걸기 위해 판 모래 구덩이가 자꾸만 슬슬 무너지는 바람에 일껏 붙여 놓은 모닥불이 계속해서 스멀스멀 꺼지고 말았다. 몇 번을 그렇게 시도하다가 도저히 밥이 될 것 같지 않자 어머니는 밥 짓기를 포기하고 강물을 뜨다 그릇에 미숫가루를 풀어 우리가 마시게 했다. 아버지는 밤늦게까지 강을 건널 나룻배를 수배하느라 미숫가루고 뭐고 아무것으로도 요기를 못 한 채 밤이 이슥해서야 돌아왔다.
아버지는 오늘 안으로는 강을 건너지 못할 것 같으니 내일 다시 건널 방도를 찾아보자고 하면서 모래사장 위에 홑이불을 깔고 그 위에 식구들이 누워 자도록 했다. 별이 총총한 밤하늘 아래 홑이불을 깔고 모랫바닥에 누우니 낮에 받은 지열로 한참 동안은 등이 뜨뜻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바닥의 모래는 열이 식어가며 점차 차가워 왔다.
밤공기는 산산했고 하늘의 별똥별이 긴 꼬리를 그으며 북쪽 하늘로 사라졌다. 내일은 배를 탈 수가 있을까? 밤새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는 동안에 강변 백사장에도 어김없이 여명이 밝아왔다. 우리 식구는 아침 식사를 또 미숫가루로 때우고 하릴없이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나절이 다 되어 아버지가 가자는 데로 식구는 강 하류 쪽으로 한참을 내려갔다. 그곳에는 고기 잡는 조그만 쪽배가 대기하고 있었고 우리 가족과 딴 집 가족이 그 쪽배를 탔다. 함석으로 배 밑창을 깐 쪽배는 강물이 일렁거릴 때마다 철썩철썩하고 밑창을 때리는 소리가 났고 그때마다 배는 이리저리 기우뚱거렸다. 배의 주인이 삿대로 여기저기 강바닥을 찔러가며 배를 몰아 우리는 가까스로 강 건너 해평 쪽 대안에 닿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런 방법 저런 방법으로 강을 건너왔다. 어렵사리 강을 건넌 피난민들은 논둑을 따라 긴 행렬을 이루면서 국도 쪽으로 옮겨왔고 그날 늦게까지 배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피난을 포기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25번 국도는 상주, 점촌 쪽에서 밀려 내려오는 피난민들과 세간살이를 실은 소달구지로 북새통을 이뤘다.
피난민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어졌고 그들은 이 길을 따라 대구시로 들어간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모든 정부 기관과 군사령부까지도 대구로 옮겨 왔기 때문에 대구는 절대 안전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가로수 그늘을 찾아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남쪽 하늘에서 '쌕쌕'하는 소리가 나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서너대의 전투기가 은빛 날개를 반짝이며 북쪽으로 날아가더니 차례차례 땅 아래로 곤두박질하듯 내리꽂다 시커먼 방앗공이 같은 물체를 내리쏟고는 다시 하늘로 치솟아 올라 멀리 산 너머로 사라졌다. 곧이어 '쿵 쿵'하는 소리와 함께 시커먼 연기 기둥이 일어나 하늘로 뻗쳤다.
"호줏기가 김천을 때리고 있다" 하고 나이 많은 한 사람이 외쳤다.
불과 50~60리 북쪽에 공중폭격이 이뤄지고 있다. 피난민들의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뛰다시피 하여 한나절이 다 돼서야 천평 삼거리에 도착했다. 곧장 가면 다부동을 거쳐 칠곡, 대구로 들어가고 왼쪽으로 꺾이면 군위, 안동 방향으로 가는 길이다. 그런데 대구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헌병과 경찰이 막아서서 피난민들이 가지 못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피난민들은 한사코 대구로 들어가길 원했지만, 허용하질 않았다.
우리는 별수 없이 군위 쪽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그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효령 고개를 넘어야 했다. 고개 입구에 접어들면서부터 입안에선 단내가 나고 땀은 팥죽 같이 흘렀다. 걸음은 떨어지지 않고 신고 다니는 고무신은 땀이 배어 미끈거리며 자꾸 벗겨졌다. 한참 고갯길을 올라가던 중에 어디서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주위를 돌아보니 도로 옆 배수로에 큰 바윗돌만 한 황소 한 마리가 달구지를 맨 채 처박혀 있었고 황소 등에는 어른 주먹 크기의 구멍이 나 있었고 그 구멍에 검붉은 피가 엉겨 붙어 있었으며 까마귀 떼가 소등에 타고 앉아 그곳을 부리로 쪼고 있었다. 유엔군 전투기가 적군의 군수품을 운반하는 달구지로 오인하고 기총소사를 한 모양이었다. 군데군데 그런 광경이 보였다.
우리는 서둘러 효령 고개를 넘어 효령 면소재지에 도달했다. 이곳 역시 안동쪽에서 내려오는 피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여기서부터 길은 또 두갈레로 나눠졌다. 한길은 팔공산 뒷쪽으로 해서 대구로 들어갈수 있는 길이고, 한길은 제2석굴암이 있는 부계쪽으로 난길이다. 사람들은 모두 또다시 대구로 들어가기 위해 대구로 가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이곳에도 헌병들이 총을 들고 지키고 서 있었다. 한 무리의 피난민이 그길로 들어서자 헌병들이 못 들어가도록 몸으로 막아섰다. 밀치고, 닥치고 하는 사이에 어느 재빠른 한 가족이 논두렁을 타고 대구 쪽 길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한 헌병이'어, 어'하며 카빈총을 그 사람들을 향해 겨누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총을 쏘지는 못했다. 그 가족은 멀리 사라졌고 헌병은 화풀이로 괜스레 공중을 향해 공포탄 쏘아댔다. 피난민들이 움칫하고 물러섰다. 피난민들은 어쩔 수 없이 부계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도로를 따라 걷지 않고 주로 냇가를 따라 이동했다. 전선이 속속 남으로 내려오면서 도로는 병력이동과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군에서 통제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피난민들은 도로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냇가를 따라 걷다가 밤이 되면 자갈밭이나 모래밭에 홑이불 텐트를 치고 자다가 소개 명령이 떨어지면 한밤중에라도 일어나 옮겨 다녀야 했다. 전황이 매우 급박해지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8월 초순쯤 금호강 지류인 듯한 꽤 넓은 천변으로 옮겨왔다.
천변에는 흰 빨래를 널어놓은 것 같이 수천 가구의 천막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그 와중에서도 장이 섰다. 하천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몇 개 안 되는 생필품을 파는 사람, 풀빵을 구워 파는 사람, 가지고 다니던 닭과 오리를 팔거나 고향에 있을 때처럼 이발 기구를 가지고 이발을 해주는 사람 등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여 있었고 천막촌 제일 높은 곳에 붉은 십자를 그린 천막에 적십자사 요원들이 나와 진료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피난민들은 처음 길을 떠날 때는 얼마만큼씩 가져온 쌀과 보리로 밥을 해 먹었지만 이제 그것이 거의 다 떨어질 지경이 되자 주변에 있는 남의 땅에서 생산되는 콩 잎사귀, 호박잎, 풋고추, 겨우 어른 손가락만 한 고구마 등을 닥치는 대로 따 먹고 캐 먹었다. 과수원 옆을 지날 땐 아직 익지도 않은 퍼런 사과를 함부로 따먹었다. 그래도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도 없고 과수원 주인은 뻔히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배고픔 앞에 양심이 무너지고 법이 사라져갔다.
이것저것 설익은 과일과 푸성귀들을 훑어다 먹다 보니 속이 온전할 리 없다. 아랫배가 살살 아프고 설사가 나기 시작했지만 어디 뒤를 볼 온전한 변소 하나가 있을 리 없다. 모두가 강 둔치로 볼일을 보러 가는데 둔치에는 벌써 먼저 볼일을 보고 간 사람들의 배설물이 온 사방에 빼곡히 들어차 있어 안심하고 발을 디밀어 놓을 공간이 없을 정도다. 당장 쳐들어온다는 인민군보다 뒤를 보러 갈 때 밟힐 남의 배설물이 더 겁이 났다.
당장 목숨을 유지하고 나서는 유지한 목숨을 건사하는 일이 또 큰 문제였다. 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난리 통에 어머니는 식구들을 먹이려고 어디서 났는지 쇠고기 몇 근을 구해 왔다. 그걸 요리해 전 식구가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딴 식구는 별 탈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나만 심한 복통과 함께 온몸이 뚱뚱 붓고 얼굴이 시퍼렇게 변해갔다. 몇 날 며칠이고 변을 볼 수가 없었다. 지독한 식중독에 걸린 모양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번갈아 업어가며 적십자사 진료소를 조석 간에 들락거렸고 그들이 지어주는 이런저런 약들을 다 먹였다. 그러나 나의 병은 점점 더 위중해졌고 급기야는 생명을 포기할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같이 피란길에 오른 한동네 최춘길 씨 아들은 나보다 한 살 위의 나이인데 나와 비슷한 고기를 먹고 식중독에 걸려 일주일 만에 피난지 하천가에서 죽었다. 그의 부모는 그를 가까운 야산에 입은 옷 채로 묻었다. 어머니는 나도 죽게 되면 역시 근처 야산에 묻고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눈물을 흘려가며 죽어가는 나를 등에 업고 이 동네 저 동네 용하다는 의원이나 침술원을 찾아 사방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던 중 우연히 같은 구미에서 피난 온 유 씨네 할머니를 만나 이왕 이렇게 된 이상 내가 한번 따 보기나 하자며 내 열 손가락을 실로 탱탱하게 감고 바늘로 일일이 땄다. 손가락에서 시커먼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그리곤 내 배를 열심히 주물러 주었다. 이렇게 하길 한나절 후, 신기하게도 꽉 막혔던 홍문이 '탁' 터지며 배설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뱃속에서 소화되지 않고 일주일 이상 썩어버린 쇠고기에서 나는 지독한 냄새가 온 천막 안을 진동시켰다. 이로부터 2~3일이 지나자 흐릿하게 꺼져가던 눈동자가 되살아나고 입맛이 돌아 겨우 미음을 먹을 수가 있게 됐다.
아버지는 내가 입맛을 다시는 것을 보고 좋아 어찌할 줄을 몰라 하며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머리 손질과 텁수룩한 수염을 말끔히 깎고 왔다. 아버지는 한 10년은 젊어 보였다. 피난살이 천막 안에서 오랜만에 전 가족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점심때나 되었을까? 가족이 둘러앉아 점심을 먹고 있을 때 갑자기 어수선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군인 몇 명과 면사무소 직원인 듯한 사람들이 불쑥 천막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다짜고짜 무슨 종이쪽지 같은 것을 꺼내 보이고는 아버지를 일으켜 세워 아래위를 살피고 난 후 자기들을 따라가자고 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따라나섰고 어머니가 울며 그들을 붙잡고 늘어졌다.
"보다시피 아이가 지금 다 죽어가고 있어요. 오늘 아침에 이발해서 그렇지, 이 양반 나이가 많애요."
"나랏일이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나랏일도 중하지만 어린 것들하고 우짜라고 이럽니까?
별의별 이야기와 통사정을 다 했지만, 그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고 아버지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터벅터벅 그들을 따라갔다. 피난민촌 여기저기서 징발한 사람들로 한 차 가득 채운 트럭은 누런 흙먼지를 일으키며 북쪽으로 사라졌다. 바야흐로 영천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또 대구를 사수하기 위해 다부동에서 명운을 건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다. 따라서 엄청난 병력손실이 일어났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30대 중반의 아버지와 그 연배 되는 사람들을 눈에 띄는 데로 잡아가는 판이었다. 꾀 많고 그런 낌새를 알아차린 사람들은 일부러 수염을 깎지 않고 이발도 하지 않은 채 노인처럼 텁수룩하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병에서 깨어나자 기분이 좋아서 아침에 이발한 것이 화근이라면 큰 화근이 되고 말았다.
이제 어머니는 젖먹이 동생을 업고 나와 형 등 세 아이를 데리고 언제 끝날지도 모를 피난살이를 계속해야 했다. 어머니는 며칠간을 우리 몰래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 내며 속으로 울었다.
전황이 어떻게 돼 가는지 우리는 자꾸 남쪽으로 내려가기만 했다. 하루는 한밤중에 소개 명령이 내려졌다. 8월 중순쯤, 날씨가 낮에는 여전히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지만, 밤이면 제법 쌀쌀한 기운이 감돌았다. 피난민들은 자다 말고 일어나 거지 같은 보따리를 주섬주섬 싸서 다시 길을 떠났다. 주로 하천을 따라가기 때문에 물이 얕은 곳을 골라 가며 물 위에 드러난 돌을 밟고 지나갔다. 그런데 내가 이끼 낀 돌을 잘못 밟아 미끄러지는 바람에 찬 물 속에 그대로 곤두박질쳐지고 말았다.
밤공기는 싸늘하고 식중독으로 죽음 직전까지 이르렀다가 겨우 목숨을 건져 몸이 허약해질 때로 허약해진 상태에서 찬 개울물에 빠져 옷을 전부 버렸으니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렸다. 어머니는 보퉁이를 끌러 물에 젖은 옷을 벗기고 형이 입던 옷을 꺼내 입혀 주었다. 옷이 너무 커서, 마치 논 가운데 세워놓은 허수아비 같은 모양이었다. 우리가 밤새 걸어서 당도한 곳은 청도군 금천면이란 곳의 하천변이었다. 비단결 같은 시냇물이 흐른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금천 냇가에서 우리의 남행은 멈췄다. 멀리 경부선 철교가 보였고 한 시간만 더 가면 경남 밀양에 이른다고 했다. 징발되어간 아버지는 감감무소식인 채 우리는 이곳에서 상당 기간을 지냈다.
피난민 모두가 나물을 넣고 끓인 멀건 죽을 삼시 세끼 먹고 나니 영양실조가 되어 얼굴에 핏기가 없이 누렇게 변해갔다. 젊은이들은 전쟁터에서 죽어가고 노인과 아녀자들은 피난처에서 병들고 굶어 죽어갔다. 매일 여기저기 천막에서 곡성이 들리고 시신이 들것에 실려 나와 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계절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입추가 지나고 극성을 부리던 모기떼가 사라진 대신 아침저녁으로 찬 기운이 천막 속을 파고들었다. 이 무렵 하늘은 그 전보다 훨씬 더 높고 깨끗해져 비행운을 그으며 북쪽 하늘로 날아가는 전투기들의 모습이 더욱 또렷하고 선명하게 보였다. 어느 날(8월16일?) 점심때쯤, 하늘에서 우레 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 하늘을 올려다보니 평소 보아 왔던 전투기보다 훨씬 더 큰 비행기가 기러기처럼 새까맣게 열을 지어 북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이때 다부동 인근 낙동강 건너 북한군 집결지였던 약목들에 B-29의 융단폭격이 이뤄졌다고 한다.
그 후 며칠이 지나고 피난민촌으로 새로운 피난민이 이고 지고 대거 몰려들었다.
행색이 피난살이 오래된 우리 같은 피난민들보단 훨씬 좋아 보였다. 대구에서 온 피난민들이었다. 피난 새내기인 것이다. 대구가 안전하다고 모두 기를 쓰고 대구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웬일로 대구 사람들이 청도 금천 냇가 피난민촌으로 흘러들어 오는 걸까? 어른들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능교?"
"말도 마이소. 대구역, 중앙통, 향촌동에 인민군 박격포탄이 날라왔어요. 곧 인민군이 대구를 포위해 들어온다고 캐서 부랴부랴 도망쳐 나오는 길이라요"
이때 다부동에서는 국군 1사단이 인민군 3개 사단을 맞아 대구를 사수하기 위해 일대 혈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인민군은 특공대를 팔공산 자락의 가산 기슭에 침투시켜 박격포를 거치하고 대구 시내 중심가에 포탄을 쏘아댄 것이다. 대구시민들은 서둘러 남행 피난길에 나서는 등 한때 공황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국군 1사단은 미 27연대의 지원을 받아 혈투 끝에 마침내 다부동에서 인민군 3개사단을 격멸하고 대구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아군의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되었다. 이제는 밤중에 사람들이 모여 앉아 모닥불을 조금 크게 피워도 누가 와서 불 끄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씩 풀어지고 엷은 미소가 스쳐 가기 시작했다. 이제 곧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는 말들이 천막촌에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철새가 혹한을 피해 남쪽 나라에 왔다가 월동을 마치고 북쪽 고향을 찾아가기 위해 출발일을 기다리며 장거리 여행을 준비하듯 우리도 이것저것 보따리를 싸고 챙기며 금천 하천가에서 고향에 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돌아갈 날이 왔다. 금천면 직원이 천막촌을 돌아다니며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이소"하고 외쳤다. 우리는 지내던 천막을 걷고 보따리를 꾸려 매일 바라보던 남쪽 하늘을 등지고 북쪽에 뾰족하게 솟아있는 소뿔 산 쪽으로 몸을 돌려 고향을 향한 출발을 시작했다. 모두 왔던 길을 기억해 가며 가족 단위로 서둘러 귀향길을 재촉했다. 이제부터는 누가 나서서 가라 오라 하며 통제하는 사람도 없고 자율적으로 알아서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우리 식구는 떠나올 때와는 달리 아버지의 소식도 모른 채 아버지 없이 귀향길에 오르는 처지가 되었다. 처음 피란 올 때와는 다르게 집으로 돌아갈 때는 먹을 거라곤 전연 없어 배가 매우 고팠다.
귀향 3일째 되는 날, 점심때가 훨씬 지나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나던 차에 누렇게 익은 콩밭 옆을 함께 지나가던 한동네 형 친구가 불쑥 형에게 "야! 콩서리 해 먹으면 좋겠다."하고 말했다. 전쟁 전에도 시골에선 꼬마들이 장난 비슷하게 종종 남의 밭 콩을 서리해 불에 구워 먹곤 했었다. "그래"하고 형이 대답하자 그가 먼저 콩밭에 뛰어들었다. 그 순간 "뻥"하고 귀를 찢는 듯한 굉음이 들리고 둘둘 말린 흙먼지와 함께 형 친구는 공중에 '붕' 떴다가 콩밭에 그대로 "퍽"하고 떨어졌고 가까이 있던 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주위에 있던 귀 향민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로를 가로질러 도망갔고 나와 어머니는 그 어마어마한 광경에 넋이 빠져 길 가운데 장승처럼 뻣뻣이 서 있었다. 이어서 눈앞이 캄캄해지고 전류가 흐르듯 '찡'하는 느낌이 머리를 관통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려보니 형 친구는 흙을 덮어쓴 채 콩밭에 엎어져 있었고 형의 왼쪽 눈에서는 붉은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어머니는 입고 있던 저고리 옷고름을 급히 떼어내 형의 눈에 대고 머리부터 칭칭 동여맸다. 한참 후 멀리 도망갔던 동네 어른들이 돌아와 헝겊 같이 돼버린 형 친구의 시신을 수습해 나왔다.
" 다 와 가지고 이기 무신 변이고, 집이 얼마 안 남았는데……." 죽은 아이의 어머니가 통곡했고 어머니도 "야, 이놈의 자석아! 이거 우짜면 좋노"하며 울부짖었다.
국도변 코스모스는 활짝 피어 바람에 하늘거렸고 벼 이삭은 돌보는 없어도 누렇게 익어 황금 물결을 이뤘다. 도로를 메우고 북으로 질주하던 군용 트럭들은 이제 국도에서 뜨문뜨문 보였고 대신 많은 피난민이 고향을 찾아가기 위해 꾸물꾸물 움직일 뿐이다. 겉으로 보기는 그저 그런 정도의 난민들로 보이나 그들은 엄청난 마음의 상처와 육체의 손상을 입고 돌아가는 중이다. 우리는 군위를 지나 천평 삼거리로 나섰다. 아! 거기에는 처참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도로 양옆으로는 미처 수습하지 못한 인민군들의 시체가 즐비했고 말(馬)의 사체도 곳곳에 흩어져 동물과 사람의 시신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트럭들과 전차들이 불에 탄체 나동그라져 있었고 무기와 탄약들이 그대로 흩어져 있었다. 아! 지옥이 있다면 아마 이 모습이 아닐까?
그 흩어진 무기와 탄약들 사이 사이에 만년필 같은 물건이 띄엄띄엄 보였다. 같이 가던 피난민 아이가 그걸 줍기 위해 뛰어가려고 했다. 아버지인듯한 사람이 그 아이 팔목을 거칠게 낚아채며
"야! 이놈아 죽는다! 죽어~하며 큰소리로 아이를 나무랐다. 피난길, 돌아오는 어느 곳에서 만년필 같은 물건을 주운 아이가 뚜껑을 여는 순간 그 물건이 폭발해 아이가 죽었다고 한다.
어느 날, 그날도 온종일 걸어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 팔공산 자락이 멀리 보이는 냇가에서 천막을 치고 늦은 저녁을 삶은 고구마로 때우고 있는데 같은 동네에서 피난 온 장 씨 아저씨가 흰 솜바지 저고리를 입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한 사람을 부축해 우리 천막을 찾아왔다. 얼굴이 뚱뚱 붓고 다리가 불편한 그이를 우리는 처음엔 알아보질 못했다. 어머니가 먼저 울음을 터트렸고 나와 형은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돌아온 것이다. 아버지는 우리를 쓱 둘러보다가, "석이 눈이 왜 저래"하며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다쳤어요. 지뢰가 터져"
"아~ 내가 죽을걸. 석이가 대신 다쳤구나" 하며 형을 끌어안고 소리 없이 울었다.
장 씨 아저씨가 돌아가고 아버지는 바로 자리를 깔고 누웠다. 건강한 상태에서 멀쩡히 징발되어간 아버지가 완전히 중환자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서둘러 귀향길을 재촉했지만, 우리 식구는 아버지의 몸과 마음의 충격을 추스르기 위해 며칠을 천막에서 더 머물렀다. 아버지는 영천전투에 동원돼 8사단에 소속되어 전장에 실탄과 포탄을 지게로 지어 날랐다. 보현산과 아미산으로 이어지는 영천 북쪽 산지에 방어선을 형성한 아군은 적 15사단의 공격으로 방어진지가 돌파되어 기룡산 자락으로 물러나 방어선을 새롭게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 과정에서 죽자사자 포탄과 실탄을 나르던, 말하자면 지게 부대들은 현역군인들과 달리 총도 없고 수류탄 한 발도 소지 할 수가 없었다. 아군이 후퇴 할 때는 적군에 대해 자기 몸을 방어할 방법이 없었다. 무조건 현역들을 따라 뛰어야 살 수 있는데, 나이가 많아 체력도 따르지 못하지만, 지게에 지고 있는 포탄의 무게 때문에 뛸 수가 없었다.
항상 뒤처지는 지게 부대의 인명 피해는 현역보다 훨씬 컸다. 아버지는 구사일생으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다 국군이 북진할 때 더 이상 지게 부대가 필요 없고 고령이라는 이유로 귀향 조치 되어 가족들을 찾기 위해 피난민촌을 죄다 돌며 몇 날 며칠을 헤매다가 거의 탈진한 상태에서 장씨 아저씨를 만나 우리 가족을 찾게 된 것이다. 며칠이 지나고 근근이 다소간 몸을 회복시킨 아버지는 다시 가족들을 이끌고 귀향길에 올랐다. 피난을 갈 때나 귀향길을 올 때나 바쁘기는 매일반이었다. 갈 때는 뒤에서 적군이 쳐내려오니 도망가느라 바빴고 돌아갈 때는 한시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어서 바빴다. 더욱이 초가을로 접어들면서 아침저녁으로 찬 기운이 감돌아 야외에서 먹고 자는 것이 신체적으로 무리였다. 피난살이의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우리 식구는 내를 건너고 고개를 넘어 9월 하순 무렵 처음 피난길에 올랐던 해평 쪽 낙동강 변에 다다랐다. 이때 하늘에 경비행기 한대가 날아와 '까딱까딱'하며 피난민들 머리 위에 종이 삐라를 뿌렸다. 반짝거리며 내려오던 삐라가 땅 위에 떨어지자 모두 달려가 그것을 주워서 읽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지도에 붉은색으로 38선이 그어져 있고 그 선을 뚫고 총칼을 든 국군이 진격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아버지는 "지금쯤 우리 중대도 저기 정도 갔을 낀데……." 하며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처음 떠나올 때 그렇게 붐볐던 백사장은 이제 별로 복잡하지 않았고 배도 수월하게 구할 수 있었다. 낙동강을 다시 건널 땐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왕복 1,000리 가까이 되는 길을 두어 달에 걸쳐 한 번도 탈 것에 타보지 못하고 줄곧 걸어서만 다니다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니 엄청나게 호강하는 것 같았다. 강물은 조용히 흘렀고 맑고 투명하여 강바닥의 모래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나는 강물에 비친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물속에는 더부룩하게 자란 머리칼과 두 눈이 쑥 들어가고 양쪽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아이 모습이 나타났다. 이어서 지뢰 폭발로 숨져간 형 친구의 모습도 나타났고 수많은 주검이 흩어진 지옥 같은 국도변 광경도 물속에서 일렁거리다가 사라졌다. 강물은 그 모든 것들을 싣고 흘러갔다.
우리 식구는 기진맥진한 채 괴평들을 지나면 소재지가 가까운 삽지마을 삼거리까지 왔다. 삼거리에는 몇 사람이 서성이고 있었다. 우리식구가 가까이 가자 누가 "종수" 하며 큰 소리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의 이름이 '종수'였다. 우리 식구 모두 아버지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누군가하고 쳐다보았다. 구미 인근 아포면 상송에 사는 큰아버지였다.
아버지 형제는 셋이었는데, 제일 맏이인 큰아버지 백부께서는 상송에서 농사를 지으며 조상제사와 선산관리를 하며 지냈고 둘째인 중부께서는 일찍 구미로 나와 면서기로부터 시작해 부면장까지 지냈고 이승만 정부 시절 지방자치제 시절이라 면의원에 출마해 당선됐다. 현직 면의원인 셈이다. 아버지는 미곡상을 하면서 지금으로 치자면 의용소방대장인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삼 형제는 모두 피난을 가자고 상의를 했었다. 그러나 백부께서는 "나는 농사일도 해야 하고 조상제사와 집안 제실도 지켜야 하는데 우에 피난을 갈 수가 있는가? 자네들이나 빨리 피난들 가게…."
"인민군들이 몰려오면 어떤 피해를 볼지 모르는 판에 우짤라고 그래요. 같이 떠납시다." 하며 중부님과 아버지가 권했다. 그러나 그는 "나는 자네들 알다시피 일자 무식꾼에 농사일 밖에 하는 게 없는데 인민군들이 와 봤자 무슨 해코지를 하겠어" 하며 한사코 피난 가기를 마다했다.
결국, 나머지 형제만 피난길을 나서게 되었는데, 처음엔 우리 식구와 사촌 식구 모두 구미역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 식구 중 겨우 첫돌을 지낸 막내 여동생은 웬일인지 사람들이 모인 곳에만 가면 심하게 울음보를 터트렸다. 그런데 기차를 타고 가면 여러 사람이 한데 모여 있을 텐데 그곳에서 '앙앙'하고 울기라도 하면 감당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피난을 간다고 해봤자 일주일 정도면 돌아오겠지 하며 어머니와 상의해 걸어서 잠시 갔다오자고 결정을 했다. 결국, 사촌 식구들은 기차로 떠나고 우리 식구는 걷고 걸어서 피난을 떠나게 된 것이다.
백부께서는 근 두 달 가까이 생사를 건 피난살이를 하고 동생 내외와 조카들이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인편으로 듣고 2~30리 길을 내쳐 달려온 모양이었다. 그는 큰 알루미늄 통에 호박을 쓸어 넣고 끓인 수제비를 가득 담아왔다. 나와 형은 백부에게 인사할 겨를도 없이 배 고픈 김에 그 알루미늄 통에 머리를 처박고 수제비를 마구 건져 먹었다. 한참을 퍼먹다가 고개를 들고 주위를 돌아보니 아버지, 어머니는 우리 형제가 걸신들린 것처럼 수제비를 퍼먹는 모습을 애처롭게 보고 있었다.
-아이들이 그동안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부모의 애타는 심정이었다. 배가 부르니 힘이 생겼다. 멀리 시가지 보였다. 원평교를 건너고 나서 부터는 형과 나는 달리기 경주라도 하듯 마구 뛰었다. 구미초등학교 까지 왔다. 학교 건물은 인민군의 막사로 사용되어 유엔군의 비행기 폭격으로 완전히 주저앉았고 운동장도 포탄을 맞아 호박구덩이처럼 움푹움푹 폐였다. 시가지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다. 금융조합 건물, 구미역사, 영단 정미소, 가마니 창고도 총탄 구멍이 숭숭 난 게 어느 것 하나 멀쩡하게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도로 옆 우리 집도 지붕이 반쯤은 날아간 상태로 위태롭게 서 있었다.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점용이네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처음 우리 가족이 낙동강을 건너 피난 가는 준비를 할 때, 점용이 식구는 금오산 아홉 산골짝으로 먼저 피난을 갔다. 글자 그대로 아홉 산골짝은 골짜기가 아홉 개나 중첩된, 금오산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골이다. 임진왜란 때도 왜군을 피해 인근 백성들이 이곳으로 피난했다 하고 지금도 옛 성터가 남아있다. 그런데 구미를 점령한 인민군이 미군의 공중폭격을 피해 이곳에 사단사령부를 설치하고 다부동 전투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점용이 식구는 먼저 이곳에 왔지만, 범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온다는 것이 운 없게 제 발로 범굴을 찾아온 셈이 되었다. 점용이 아버지는 인민군의 강요와 협박으로 피난 가지 않은 몇몇 사람을 데리고 완장을 차고 면내에 들어와 피난민들이 숨겨 놓고 간 양곡을 찾아내고, 키우다 두고 간 닭, 돼지 등을 잡아 아홉산으로 운반했다. 이윽고 다부동에서 치명타를 입은 인민군이 북으로 패주할 때 점용이 식구들도 그들을 따라 월북하고 말았다. 나는 코흘리개 친구였던 점용이를 다시 볼 수 없게 된 것이 제일 슬프고 안타까웠다.
우리와 같이 피난길에 올랐다가 낙동강 변에서 강을 건너갈 배를 구하지 못해 집으로 되돌아간 낙동강 주변 많은 지산동 주민들은 인민군 5사단이 쳐내려와 가가호호 수색을해 18세 이상의 젊은이들을 다부동 전선에 투입 시켜 국군1사단과 싸우게 했고 노인들과 아낙네들은 인민군 탱크들이 낙동강을 도하 할 수 있게 드럼통과 가마니에 자갈을 채워 강물 속에 집어넣는 일에 동원되었다. 상주 낙정쪽에서도 꼭 같은 방법으로 사역이 이뤄져 인민군 탱크가 낙동강을 도하했고, 지산앞 낙동강에서도 인민군 탱크가 도하했다. 이 탱크들이 다부동 입구 천평동으로 이동해 미27연대 탱크부대와 대결하게 된 것이다.
구미가 수복되고 지산동 피난민들이 돌아와 제일 먼저 한 일이 부역자 색출과 보복이었다. 남겨 놓고 간 양곡을 털어간 사람이나 인민군에 부역한 사람, 인민군 의용군으로 입대한 가족들이 보복의 대상이었다. 관에서 해야 할 일을 민간인들이 먼저 손을 보는 것이다. 죽을 고생을한 보복을 피난 가지 않은 이웃에게 하는 것이다. 덕석말이라 해서 사람을 덕석으로 말아 마구 몽둥이질을 하고 발로 차고 밟았다. 민심이 흉흉해졌고 경찰에선 부역자들을 요시찰 인물로 관리했다. 결국, 그들의 상당수는 고향을 떠나 큰 도시로 이주하고 말았다.
돌아온 사람들은 다가올 겨울을 견디기 위해 서둘러 부서진 집을 수리하고 땔감을 마련하기 바빴다. 땔감을 구하기 위해 산에 오른 사람들은 나무를 베어 오면서 전쟁 시 피아간 전투 중에 벌이고 간 군용 수통이나 탄피 통, 철모들을 주워 오는 사람도 있었다. 수통은 어디 갈 때 물을 담아서 갔고 탄피 통은 돈 통으로 요긴하게 쓰였고 철모는 긴 작대기에 매달아 변소의 똥오줌 퍼내는 똥바가지로 사용했다. 겨울이 왔다. 전쟁은 북쪽에서 계속되었고 중공군이 개입해 더 큰 싸움이 벌어졌다고 어른들이 말했다.
어느 날 나는 동네 친구 몇몇과 구미역에 놀러 갔다. 마땅한 놀이가 없는 터라 기차가 기적을 울리고 칙칙푹푹 증기를 내뿜으며 달려오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서다. 그날은 김천 쪽에서 객차가 아닌 뚜껑도 없는 화차가 콩나물시루처럼 빽빽이 앉아 있는 사람들을 싣고 역 플랫폼으로 들어왔다. 남녀구분 없이 벙거지 같은 털모자를 눌러쓰고 두툼한 검은 솜바지 저고리를 입고 눈썹엔 하얀 성에를 달고 있었다. 거기다 노인들은 고드름이 수염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서로 뭐라고 뭐라고 하는 말들이 모두 윗녘 말이었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1.4 후퇴로 서울, 경기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다시 피난길에 나선 것이었다. 우리는 그래도 다행히 고향에 돌아와 불을 땐 온돌방에서 편히 자고 있는데, 저 사람들은 두 번씩이나 집을 버리고 추운 겨울에 피난살이를 떠나고 있으니 고생이 얼마나 많을까. 어린 마음에도 그들이 매우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 발발 후 2년이 지난봄에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전방에선 계속해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수도권에선 모르겠지만 우리가 사는 지방에서는 학교를 개교했고 신입생을 받았다. 교실은 비행기 폭격으로 완전히 사라졌고 우리 동급생뿐 아니라 전교생이 시멘트 바닥만 남은 교실 터에서 엎드려 글씨를 써가며 공부를 했다. 모두 무명옷을 집에서 만들어 입었고 한복을 입고 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나마 교회에서 얻어온 구제품 양복을 입거나 미군 방한모를 쓰고 온 학생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학교가 파하고 집에 올 때는 미국에서 보내온 큰 통의 우윳가루를 선생님이 빈도시락에 일일이 담아 줬다. 집에 가져온 우윳가루를 먹을 줄 몰라 도시락째 밥솥에 넣고 쪄서 식으면 딱딱해져 과자처럼 깨물어 먹었다.
서로 엄청난 희생을 치른 3년간의 무모한 전쟁이 가까스로 멈춰 섰다. 휴전이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전쟁의 후유증은 컸다. 전 국토가 초토화되었으니 산업생산과 농업생산은 제로인 상태에서 대다수 국민은 보릿고개를 넘기가 힘들었다. 쌀독의 쌀은 다 떨어지고 보리가 익어 탈곡해야 그나마 끼니를 때울 수 있는데 아직 보리가 익질 않고 있는 5~6월, 이때가 이른바 보릿고개, 춘궁기다. 많은 사람이 부황에 걸려 살가죽이 들떠서 붓고 누렇게 변해갔다. 마을 사람들은 산에 올라 산나물을 캐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 송기떡을 해 먹었다. 초근목피로 겨우 연명해 나갔고 참전국 등 유엔 각국에서 보내오는 밀가루와 우윳가루,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꿀꿀이죽 등으로 겨우 영양 보충을 해 나갔다. 농촌은 피폐해졌고 도시는 실업자로 우글거렸다. 1960년대 한국은 이전까지 주로 미국에서 무상원조를 받아오던 상황에서 미국이 서유럽 경제 회복과 자국 국제수지 악화에 따라 기존의 무상원조를 줄이는 상황에 놓이게 되어 정부에서는 다른 서방 국가에 대해서도 경제 지원의 유치를 시도하게 되었다. 1963년, 한국은 인구 급증으로 실업난이 심각했고 마침 서독은 라인강의 기적으로 전후 부흥에 따른 노동력이 몹시 부족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양국 간의 이해득실이 맞아 떨어져 실업 문제 해소와 외화 획득을 위해 서독에 광부, 간호사를 송출했다. 그 후 64~73년까지 월남전에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다. 이들이 탄광 막장에서,숨 막히는 정글에서 목숨을 건 대가로 받은 돈을 고국에 송금한 금액이 대한민국 전체 수출금액의 36%에 달했다. 그 후 월남전이 끝나자 사우디를 비롯한 중동에 진출해서 검은 황금을 캐냈고 결국 이것이 우리 경제가 일어서는 종잣돈이 되었고 주춧돌이 되었다. 성실하고 근면한 국민은 사회 곳곳에서, 모든 산업 분야에서 열심히 일해 마침내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최빈국에서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우뚝 서게 했다.
6.25 전쟁 후 74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 한밤중 탱크가 지나가 움푹움푹 패였던 구미 중앙로는 이제 4차선으로 확장돼 말끔히 포장되었고 총탄 맞고 폭격받아 불타고 쓰러진 초등학교는 번듯한 5층 교실 건물로 다시 태어났고 개인집들과 가게들은 이제 고층 아파트와 멋진 상가 건물로 변신했으며 나룻배로 강을 건너 피난길에 올랐던 낙동강 변엔 국내 최대의 전자공단이 조성되면서 구미는 면(面)에서 시(市)로 승격되어 아주 현대화된 도시가 되었다. 지게 지고, 소달구지 타고 다니고, 기껏 자전거였던 집집은 이제 가구마다 자가용차에 여름에는 에어컨을 켜고 지낸다.
6·25전쟁이 한창 중일 때 전방에서 근무 중이던 외숙이 포상 휴가를 얻어 우리 집에 들렀다. 그로서는 누님인 우리 어머니와 매형인 우리 아버지, 생질인 우리 형제를 보기 위해서다. 그는 철모를 쓰고 카빈총을 맨 채 손에는 작은 C-레이션 박스를 손에 들고 왔다. 당시에는 휴가 가는 장병들도 단독군장을 한 채 내보냈다. 사태가 위급할 땐 바로 투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 어머니는 그야말로 버선발로 뛰어가 그를 맞았다. 그러나 형과 나는 반가운 외삼촌보다 C-레이션이 더 반가웠다. 외삼촌에게는 인사도 하지 않고 그 작은 박스에만 관심을 가지고 외숙의 손만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C-레이션의 비스킷과 초콜릿을 맛나게 먹었지만, 나중에 아버지에게 혼이 났다. 인사도 하지 않고 먹는 것에만 눈을 판다고…. 그래도 외숙은 우리 머리를 쓰다듬으며 "너희가 나중에 장정이 됐을 땐 군대 안 가도 될 끼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군 복무 중 베트남전에도 참전했고 50년 전에 군을 마쳤다. 그 후 20년 전에는 아들이 군에서 제대했으며 이제 손주가 군 복무 중이다. 전쟁을 맞았던 우리 세대에서 이를 마무리 짓지 못하고 다음 세대, 또 그다음 세대로 넘어가고 있다. 휴전된 지 71년, 그러나 아직 남북 간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오히려 양측간 갈등의 골은 더 깊어져 가고만 있다. 북한은 남한을 같은 동포로 보지 않고 완전한 적대국으로 규정해 놓고 핵무기와 미사일 능력을 고도화하여 수시로 미사일을 쏘아대며 아주 공공연하게 적대행위와 협박을 하고 있다. 최근엔 오물풍선까지 남한 전역에 날려 보내는 치졸한 행위를 하고 있다.
앞으로의 우리 통일 안보 정책은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것인가?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라는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 요즘이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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