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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원의 기록여행] ‘전쟁 승리’에 시인이 나서달라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50년 7월 5일 자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50년 7월 5일 자
박창원 경북대 역사문화아카이브연구센터 연구원
박창원 경북대 역사문화아카이브연구센터 연구원

'국민이여 총궐기하라. 부상병을 구호하자. 피난민을 구제하자. 학도여 일어서라. 종교가여 각오하라. 조국 수호의 용사 되라. 허위 모략을 방지하자. 전시 생활을 실천하라'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50년 7월 5일 자)

'전쟁 승리'를 위해 시인이 나서달라.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지 열흘째에 경북 임시대책위원회 선전부에서는 긴급성명을 발표했다. 조국의 흥망이 달린 위급한 때에 국민 결집을 위한 계몽‧선전 활동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국민 결집의 매개로 시를 첫 번째로 꼽았다.

시인으로부터 애국애족의 정신이 담긴 시를 받아 방송이나 확성기로 알리기로 했다. 문인과 연설가들에게도 참여를 독려했다. 연설문을 투고하거나 길거리에서 직접 연설자로 나서달라는 요청이었다. 연설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전쟁 승리를 기원하는 내용으로 한정했다.

국민의 동요를 막고 승리의 염원을 담은 표어와 만화, 포스터도 널리 구했다. 종교인들에게는 전시로 인해 닥칠 고통과 마음의 준비를 일깨워 주길 원했다. 이처럼 계몽 및 선전 활동은 전방위적이었다. 부상병과 피난민을 구호하자는 항목도 활동에 포함되어 있었다.

때맞춰 부상 군경과 전재민, 피난민을 동족애로 돕자는 구호 운동이 펼쳐졌다. 현금과 식량, 의류 등 전재민 구호품과 함께 일선 장병에게 위문품을 보내는 운동이었다. 남선경제신문의 경우는 위문품 모금 외에 육군병원에 입원 치료 중인 부상군인에게 날마다 신문을 보냈다.

대책위가 시인 등에게 요청한 글의 주제 가운데는 허위 모략을 방지하자는 내용도 있었다. 당국에서는 시민들의 불안감을 부추기는 유언비어를 막을 필요가 있었다. 대구와 부산으로 무조건 피난을 가야 한다거나 북한의 주요 인사가 서울을 진두지휘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던 터였다. 이 같은 유언비어 진원지 중 하나로 북한의 방송이 지목됐다. 북한 방송을 듣다가 발각되면 수신기를 압수하고 이적죄로 처벌하겠다고 발표했다.

대책위 선전부는 공습에 대비해 야간의 등화관제를 철저히 하는 등 전시 생활의 실천을 당부하는 내용의 투고도 받았다. 여기에는 무분별한 야간활동을 통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전쟁 상황에도 아랑곳없이 일부 요정이나 유흥장은 여전히 붐볐다. 급기야 당국은 야간 통행시간을 늘리고 시내 홍등가에 대한 전면적인 영업정지도 고려하겠다고 할 정도였다. 이 같은 유흥가의 분위기는 부산 역시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전쟁통에서도 유흥의 유혹과 돈의 위력은 기승을 부렸다.

해방 직후 사람들의 입길에 자주 오르내리던 단어 중 하나는 모리배였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는 사람이나 그 무리였다. 모리배들은 주민들의 식량난‧주택난 등을 이용해 잇속을 챙겼다. 쌀이나 의료품, 생활필수품의 매점매석으로 폭리를 취했다.

전쟁 중에도 해방 직후와 다름없이 주민들의 고통을 이용해 돈벌이하는 모리배들이 설쳤다. 이들 모리배 중 일부는 매점매석으로 번 돈으로 유흥가를 출입했다. 사람들의 비난을 피하려고 심지어 군복으로 갈아입고 유흥장을 드나들었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50년 7월 13일 자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50년 7월 13일 자

'평화의 사도 연합군(미군)은 우리 정의의 나라를 돕기 위해 수만 리 고국산천을 떠나 이 땅에 와서 어제도 오늘도 북으로 북으로 향하고 있으며 대구에도 주둔하고 있는데 이 응원군에 대해 우리 국민은 마음껏 환영해야 할 것이니 너무나 관계 당국에서는 다음 몇 가지를 열거하여 국민의 성의 있는 환영으로 그들의 사기를 더한층 앙양되게 하도록 요망하고 있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50년 7월 13일 자)

전쟁 초기 전세의 불리 속에 입국한 미군 등은 '평화의 사도'로 불렸다. 승리의 염원이 담긴 표현이었다. 당국은 도로변의 건물에 미군을 환영하는 플래카드나 포스터를 걸도록 했다. 미군 뒤를 어린이들이 졸졸 따라다니지 않도록 하고 물건을 살 때는 바가지를 씌우지 말아야 한다는 사례를 열거했다.

목숨 걸고 이국땅에 온 군인들의 기분마저 헤아린 조치였다. 시인들이 앞서 벌인 주민들 대상의 계몽‧선전 활동과 다르지 않았다. 6‧25전쟁 발발 74주년의 6월을 보내는 시인의 시는 어떨까. 그때의 '전쟁 승리'는 '평화 정착'이라는 싯구로 바뀌지는 않을까.

박창원 경북대 역사문화아카이브연구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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