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심백강의 한국고대사] 동양고전으로 다시 찾는 발해조선의 역사(26)

지금은 광활한 중국 만든 청나라, 발해조선의 후손이다
역사상 주나라·한나라·명나라 등 만리장성 밖까지 영토 확대 못해
1636년 청태종 황태극 즉위한 뒤 내몽골·동북 삼성·바이칼호 편입
신라 왕실 후손들이 세운 청나라…청·금나라 역사 한국사 포함해야

금나라에서 청나라로 국명을 개정한 청태종 애신각라 황태극
금나라에서 청나라로 국명을 개정한 청태종 애신각라 황태극

역사상의 중국은 화하족 즉 한족과 동이족 즉 밝족이 번갈아 가며 통치했다. 하夏, 서주西周, 한, 당, 송, 명은 화하족이 세운 정권이고 은殷, 진秦, 요, 금, 원, 청은 동이족이 세운 정권이다.

주나라 시대의 중국은 수도가 섬서성에 있었는데 이 때의 중국 강역은 섬서성, 하남성, 안휘성과 하북성 남쪽 일부에 불과했다. 오늘날 소위 말하는 남방의 경제특구는 중국 영토에 포함되지 않았다.

명나라 시대의 강역도
명나라 시대의 강역도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은 6국을 통일한 진나라의 강역을 계승했고 한무제, 당태종에 의해 한나라의 강역이 서쪽과 남쪽으로 확대되었으나 동북방 영토는 진시황시대의 만리장성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하남성의 개봉에 도읍한 송나라는 장강 유역을 차지하는 데 그쳤고 그 밖의 영토는 요, 서하, 토번 등이 분할 소유하였다.

명태조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1368~1644)는 건국 초기 남경에 도읍했다가 1421년 명성조 주체朱棣가 북경으로 천도하여 276년 동안 왕조를 유지하였다.

명나라 이전의 한족 왕조는 주로 중국 서쪽 지역에 위치한 장안, 낙양을 도읍으로 하였다. 중국 5,000년 역사상에서 한족이 세운 왕조가 동북방으로 진출하여 북경을 수도로 삼은 것은 명나라가 유일하다.

그러나 명나라 또한 북방 영토는 만리장성 밖까지 확대되었던 것은 아니다. 위환魏煥의 '황명구변고皇明九邊考'에 의하면 명나라가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최전방에 요동遼東, 계주薊州, 선부宣府, 데동大同, 삼관三關, 유림楡林, 영하寧夏 감숙甘肅, 고원固原 9개 군사 방어기지를 설치했는데 모두 북부변경의 만리장성 안쪽에 있었다. 이는 명나라의 북방 영토가 만리장성을 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청나라 시대의 강역도
청나라 시대의 강역도

◆오늘날의 광활한 중국 판도를 만든 것은 청(淸)나라

오늘날 중국 영토를 살펴보면 북으로는 내몽고 자치구, 서쪽으로는 파미르고원, 청해성, 신강자치구, 서장자치구, 동북쪽으로는 외흥안령, 남쪽으로는 대만까지 포함시키고 있다.

오늘의 이 거대한 중국,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광활한 중국 판도를 만든 것은 바로 청나라이다.

청나라는 원래 한족들이 차지한 중원 땅보다도 몇십 배나 더 광활한 영토를 확보하여 중국의 강역에 포함시켰다.

청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동북방 여진 부락의 한 갈래인 애신각라愛新覺羅 가문이 건립한 국가이다.

애신각라 누루하치는 1616년 동북방의 여러 부족국가를 통일한 다음 혁도아라赫圖阿拉, 지금의 요녕성 신빈현 동쪽에서 금金나라를 건립하였다.

앞서 누루하치의 조상인 아골타가 세운 금나라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호를 금이라 하였는데, 누루하치의 금나라를 아골타의 금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학계에서 이를 후금이라 호칭한다.

1636년 청태종 황태극皇太極(1592~1643)이 즉위하여 국호를 금에서 청으로 바꾸었는데 청태종시대에 중국의 강역이 엄청나게 확장되었다.

지금의 내몽고와 동북 삼성, 러시아 북쪽의 외흥안령 이북, 그리고 서쪽으로는 바이칼호에서부터 동쪽으로 사할린섬까지 이때 모두 중국 영토로 편입된 것이다.

명나라 때 만리장성을 따라 설치한 9개의 변경 방어기지
명나라 때 만리장성을 따라 설치한 9개의 변경 방어기지

서주 시대로부터 명나라 이전까지 한족 정권이 지배하던 시기에는 하북성 동북쪽이 중국 영토에 포함된 적이 없다. 동이족이 집권하면서부터 비로소 지금의 동북 삼성이 중국 영토에 편입되게 되었다.

바이칼호가 지금은 러시아 영토지만 원래는 숙신 땅이었고 청나라 때 중국 강역에 포함되었다.

모택동이 소련을 방문하는 길에 기차를 타고 바이칼호를 지나다가 몹시 분노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청나라 때 중국 영토였던 바이칼호를 러시아에게 빼앗긴 것이 안타까워서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이는 모택동의 강한 영토 야욕을 보여주는 한 단면인데 그는 바이칼호에 대한 중국의 역사 주권을 생각했던 것이다. 역사 주권에 무관심한 광복 후 우리나라 지도자들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는 대목이다.

대만은 '명사明史'에는 이주夷洲로 표기되어 있다. 이주라는 지명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대만은 명나라 이전까지 줄곧 동이족의 나라였다. 대만을 중국으로 통일한 것은 청나라 강희康熙 황제에 의해서이다. 1683년 강희 22년에 대만을 공격하여 중국에 편입시켰다.

강희황제는 대만뿐만 아니라 강희 27년(1688)에서 37년까지 10년 동안 신강, 서장, 청해, 사천성 서부, 감숙성 서부, 파미르고원, 외몽고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중국에 통일시키는 대성과를 거두었다.

그 뒤 청나라는 옹정雍正, 건륭乾隆 황제시대에 새로 귀속된 지역에서 종종 발생하는 반란세력을 진압하면서 공전의 광활한 국토를 소유한 대 중국으로 탈바꿈하였다.

청나라는 신해혁명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12년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가 퇴위하면서 12대 297년 만에 멸망했는데 오늘날의 이 거대한 중국 판도를 만든 것은 한족의 영웅 한무제, 당태종이 아니라 동이족 정권인 청나라의 강희, 옹정, 건륭 황제에 의해서였다.

◆청나라는 발해조선의 후손이다

금태조 완안 아골타는 숙신의 옛 땅인 지금의 흑룡강성 아성阿城 남쪽에 금나라(1115~1234)를 세웠다.

아골타는 요나라 말엽 여진의 여러 부락을 통일하여 1115년 지금의 흑룡강성 하얼빈시 아성구에 있던 회녕부會寧府에 나라를 세운 다음 국호를 금金, 연호를 수국收國으로 정하였다.

'금사金史' 본기에는 "금나라의 시조는 휘가 함보인데 처음에 고려에서 왔다(金之始祖 諱函普 初從高麗來)"라고 적고 있다. 함보는 본래 신라사람이었으나 그가 떠나올 때 신라의 옛 땅은 고려 땅으로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함보는 고려에서 왔지만 고려인이 아닌 "고려에서 온 신라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흠정만주원류고'에서는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인이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금나라의 시조는 본래 신라에서 왔는데 완안씨라 호칭했다.(金始祖本從新羅來 號完顔氏)" "신라왕의 성은 김씨이다. 그러니 금나라의 먼 조상은 신라에서 나왔다.(新羅王金姓 則金之遠派 出於新羅)"

'흠정만주원류고'에서는 금나라가 신라왕실 김씨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못 박아서 말한 다음과 같은 내용도 보인다.

"신라왕의 성이 김씨인데 서로 전하기를 수십세를 하였다. 그렇다면 금나라가 신라로부터 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新羅王金姓 相傳數十世 則金之自新羅來無疑)"

'흠정만주원류고'는 청나라의 대신 아계阿桂 등이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만주족의 원류를 고증하여 편찬한 책이다. 앞에 흠정 두 글자가 붙어 있는 것은 황제의 특명에 의해 편찬된 것을 의미한다. 당시에는 황제가 국가를 대표하였으므로 흠정은 오늘날의 국정이란 말과 같다.

따라서 만주족의 뿌리를 연구하여 편찬한 '흠정만주원류고'에서 금나라의 시조를 신라왕실 김씨의 후손으로 단정한 것은, 당대 학자들의 종합적인 연구 검토를 거친 끝에 내린 최종적 결론이라 말할 수 있다.

명나라 말엽 조정이 부패하고 변방의 방비가 허술해지자 1616년 건주建州 여진 수령 누루하치가 분열된 여진족의 각 부락을 통일하여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1616~1636)을 세웠다.

1626년 누루하치가 전쟁 도중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 황태극이 즉위하여 1636년 국호를 청으로 바꾸었다.

후금을 세운 주역인 누루하치 등 건주여진의 귀족들은 금태조 완안 아골타의 직계후손들이다.

아골타가 건국한 금나라의 시조는 김함보인데 김함보는 신라왕실 김씨의 후손이므로 금나라를 계승하여 후금을 건국한 누루하치는 당연히 김씨의 자손이 된다.

신라에서 고려로 왕조가 교체된 이후 신라왕실의 김씨 후손들은 중국으로 건너가서 다시 김씨 왕조인 금나라를 세웠고 금나라는 황태극에 이르러 국명을 청나라로 바꾸었는데, 만리장성의 안과 밖을 통일하여 오늘날의 거대한 중국 판도를 만든 것은 바로 이 청나라였던 것이다.

청나라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의 김씨에 가서 닿게 되는데 신라는 고조선의 유민들이 세운 나라라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청나라는 혈통적으로 따지자면 오늘의 한국인과 피를 나눈 발해조선의 후손들이다.

유득공柳得恭이 발해사를 한국사에 포함시킨 것처럼 앞으로 금나라와 청나라의 역사를 한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 그러면 "한국사가 중국역사에 귀속된다"고 주장하는 동북공정이나 "한국은 역사상 중국의 일부였다"는 시진핑의 허튼소리는 저절로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shimbg200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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