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두어 달 더 얹어야 익어가는 우리 집 장준감이 고등어 빛 하늘을 꽃등처럼 밝히는 계절이 오면 두 분의 어머니가 더욱 그립습니다.
결혼함으로써 '말' 못하는 어머님을 모시게 됐습니다. 말을 못하게 된 이유가 참으로 온당치 못합니다. 어머님의 '말'은 목울대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꾸르륵거리다 번번이 유산되고 말았으니까요.
아버님의 주먹다짐, 하찮은 일에도 다짜고짜 대들어 애먼 아내를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쳤습니다. 그때마다 어머님은 시르죽은 이(蝨)처럼 픽 쓰러져 맨바닥에 얼굴을 갈았어요. 맷돌에 콩을 간 것처럼 딱지 앉은 얼굴로 보리쌀을 삶아 안치던 여인, 북적대는 가족들에게는 고봉밥을 안기면서 자신의 밥그릇엔 가난만 뚝뚝 떼어 담은 여인, 둘 다 다치고 부러지는 비극적 현실 앞에서도 줄의 인연을 끊지 않음으로 자식의 미래를 보장받고, 배곯음으로 가난을 극복한 여인, 비련의 여주인공이던 어머님은 장준감이 하늘을 물들이는 계절 입을 다문 채 이승에 붉은 줄을 남기셨습니다.
막내며느리인 제가 마지막 상을 차려드리고 향에 불을 붙였지요. 그때 향이 피워낸 연기는 하늘로 솟구쳐 오르지 못하고 똬리를 틀더니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여성 멸시 집안 내력으로 입이 틀어 막혀 없는 듯 살다 가신 어머님을 남들은 시대착오적 여인이라 말하거나 여느 한국의 여인 정도로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여자의 길을 넘어 '사임당'의 길로 향한 어머님을 내 인생 한가운데 모셔놓고 삽니다. 언제나처럼.
육친의 어머니는 '달변가'입니다. 말솜씨 하나로 독특한 빛을 발했으니까요.
"우리 막내며느리는 변호사 유~."
"너희 엄마는 누에고치가 입에서 실을 뽑아내듯 술술 말도 잘하지."
앞말은 할아버지께서 어머니를 며느리로 맞이하고 하신 말씀이라 하고, 뒷말은 여남은 살 때부터 주변 사람들로부터 귀가 나긋나긋해지도록 들은 말입니다. 비록 소소한 일상적 대화지만 의미와 소리를 조합하여 빚어내는 능력이 대단하니, 소문은 꼬리를 흔들며 담장을 넘게 되었지요. 자라면서 어머니께서 '말' 하나로 근방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이유가 궁금해졌습니다.
옳거니, 탁…. 돌담을 기어가는 곤충의 숨소리도, 몸집을 키우지 못한 새들의 사투리도 허투루 듣지 않음으로 받은 은혜임을 알고 무릎을 쳤어요. 흉내 내면 닮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흉내 내 보았지만, 어머님 길 위에서 꾼 나의 일장춘몽인걸요.
탁월한 언변 하나로 인간으로서의 이성의 몸집을 불려 나가던 분이지만, 남편을 언 땅에 묻고는 감정의 모든 문양을 지워버리더군요. 첩첩산중 외딴집에 홀로 남게 된 어머니는 "어둠이 도둑처럼 밀려오면 혼자 있기가 죽기보다 싫다." 하셨습니다. 별칭이 변호사였던 당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허깨비처럼 지내다 앉은 채로 목을 떨구셨습니다. 새하얀 찔레꽃이 봉긋한 아버지 무덤처럼 피어오르던 계절이었어요.
서쪽으로 약 30㎞ 떨어진 지점에 법으로 맺어진 어머님이, 동쪽으로 불과 5㎞ 떨어진 땅속에는 육친의 어머니가 각각 누워계십니다. '말'을 억압당해 갑갑하게 사셨던 분도, '말'의 은혜 가운데 사셨던 분도 노을이 하늘을 황홀하게 물들일 때 찾아가도 뵙고 올 수 있는 괜찮은 거리에 계시지요.
하찮은 일로 말싸움을 벌이고 있는 우리 내외를 별들이 창문에 매달려 엿보고 있습니다. 얼른 입가의 게거품을 걷어 내고, 홍산 어머님처럼 함봉하고 슬그머니 물러앉을지, 아니면 송선 어머니의 언변을 불쏘시개 삼아 버럭 화를 내는 그를 살살 구슬려 볼지를 살짝 고민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어느 한 분의 화술도 '넘을 수 없는 벽'입니다. 생명의 빛이 사라기 전에 '벽'의 한 면이라도 넘을 수 있다면 다행이지요.
반짝, 보석처럼 박힌 별들 곁에서 두 어머니가 조우하여 감성과 이성의 편차를 잘 다스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네요. 기본 문법이 흔들리지 않았건만, 시간과 공간이 다른 곳인지라 두 분의 대화를 알아들을 순 없습니다. 그러나 정제된 언어로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하는 말씀이 금(line)을 넘고 울(enclosure)을 넘어 전해지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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